모든 시민은 기자다

제8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 / 20회] 그가 중정부장에 임명될 당시 국내외 정세

등록|2020.05.13 17:12 수정|2020.05.13 17:12
 

▲ 박정희(중앙)와 김재규(오른쪽), 그리고 차지철(왼족) ⓒ 박도


김재규는 1976년 12월 4일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하였다.

만 51세, 건설부장관에서 곧바로 직행이었다. 김종필→김재춘→김형욱→이후락→신직수로 이어지는, 중정의 제8대 부장이다.

중정은 1972년 12월 서울 이문동의 청사에서 새로 남산 청사를 준공하여 이때부터 세칭 '남산'으로 불리는, 민주인사들에게는 고문과 악몽의 소굴이었다.

그의 취임을 전후한 내외 정세를 살펴보자.

박대통령의 잇따른 긴급조치 선포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반유신 항쟁이 계속되자, 정부는 1975년 2월 12일 유신체제 찬반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73%의 찬성률을 얻어냈다. 반대운동이 허용되지 않는 일방적인 국민투표의 결과였다. 이를 신뢰하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박정희는 이를 계기삼아 4월 8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다음날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 관련자 8명을 사형집행하였다. 이들은 뒷날 재심에서 모두 무죄판결되었다. 5월 13일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방ㆍ반대ㆍ개정 주장 및 긴급조치 9호에 대한 비방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가장 반헌법적이고 포악한 조치였다.
 

▲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 자료사진



7월 16일에는 또 시국사범의 사회복귀를 봉쇄할 목적으로 사회안전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유신정권의 이같은 폭압에도 학생들과 민주세력은 기죽지 않았다. 1976년 3월 1일을 기해 윤보선ㆍ김대중ㆍ함석헌ㆍ이해동ㆍ함세웅 등 민주인사들이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자, 정부는 관련자 11명을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구속 또는 입건하였다.

김재규가 취임하고 20여일이 지난 후 미국의 유력지 『워싱턴 포스트』에서 박동선이 한국정부의 기관요원으로 미국의 상하의원과 고위공직자들을 매수했다고 보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사건으로 인한 미의회의 청문회가 열리고,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망명 등 굵직한 사건들이 터져나왔다.

국내의 반독재 민주화투쟁은 한층 거세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난마처럼 꼬인 시기에 박정희는 그를 중정부장에 임명하였다. '운명'이랄까?    

이종찬 장군이종찬(1916~1983)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군의 '정치적 중립' 원칙을 정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 위키피디아 퍼브릭도메인



중앙정보부는 10ㆍ26사건 후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되고,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다. 제22대 원장으로 국가정보원 개혁작업에 나섰던 이종찬(허정 내각의 국방장관과 동명이인) 씨가 지켜보았던 김재규의 모습이다.

1976년 6월 내가 영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신직수 부장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김재규 부장이 부임했고, 그때부터 10ㆍ26사건이 벌어진 1979년 말까지 근 3년 동안 나는 중앙정보부 본부에 근무하면서 김 부장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받았다. 동기들 가운데 과장에서 부국장으로 가장 먼저 승진했고, 김 부장으로부터 특별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심지어 이철희 차장이 내 소관 사항을 부장에게 보고할 일이 있을 때에는 나를 데려와 직접 보고하라고 시키기도 했다.

나는 속으로 '김 부장이 이종찬장군(동명이인)을 존경하는 바람에 내가 그 덕을 보나'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직접 부장으로 모신 김재규는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이었다. 정의감도 있고, 인정도 많았다. 게다가 그는 효자였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다른 자존심이 있었다. 그 자존심이 훼손되면 참지 못하고 욱하는 기질이 발동되곤 했다. 주위에서는 그것을 일제시대에 소년항공병으로 가서 얻은 '사무라이 기질'이라고 보기도 했다. 문제는 군을 포함해 그의 공직 경력에서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는 점이다. 인간적으로 안타까울 정도였다. (주석 1)

 

▲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정보사용자인 대통령의 태도가 국정원 개혁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 SBSCNBC 화면 갈무리



김재규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공직생활이 계속되면서 마시는 기회가 더러 있었다. 과로때문인지, 6사단장 이후 나빠진 간(肝)이 근래에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장이 되어서 업무는 과중되고 휴식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해서 김재규 부장의 건강상태는 간경화증으로 위험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간 전문 주치의 서울대 병원 김정용 박사의 정규 검진 외에도 김재규 부장의 6촌 여동생 김차분 씨가 공관으로 와서 관장(약을 항문에 주입하여 대변을 보게 해서 독소가 빠지게 함)을 시키곤 했으나, 술을 먹은 날은 팔 위에 반점이 생기는 등 간경화증의 상태는 날로 나빠만 갔다. 김차분 씨는 김재규 부장 시절 3년을 매주 2~3회씩 정기적으로 공관에 드나들며, 김부장에게 관장을 시키고 김부장을 소파에 쉬게 하여 반점이 사라지도록 했다. (주석 2)


주석
1> 이종찬, 앞의 책, 307~308쪽.
2> 오성현, 앞의 책, 10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