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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동안 숨겨둔 조성만 열사 아버지의 한

내 영혼의 친구 조성만 열사 부모님을 뵙고 오던 날

등록|2020.05.25 15:04 수정|2020.05.25 15:24

조성만 열사88년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 조성만 열사 ⓒ 최종수


나와 동갑내기 친구가 있다. 살아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5.18 구묘역에 잠들어 있는 내 영혼의 친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88년 전주 민중서관 사거리 노제였다. 그날 이후 조성만 열사는 내 영혼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나자렛 예수의 정의와 평화의 길을 따라 가는 사제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서둘러 분단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육신을 민주평화와 자주통일의 제단에 바치고 말았다.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태어나 인간을 사랑하고자 했던 한 인간이 조국통일을 염원하며..., 진정한 언론자유의 활성화, 노동형제들의 민중 생존권 싸움, 농민형제들의 뿌리 뽑힌 삶의 회복, 민족교육의 활성화 등등..., 지금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아버지, 어머님 얼굴. 차마 떠날 수 없는 길을 떠나고자 하는 순간에 척박한 팔레스티나에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한 인간이 고행 전에 느낀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 조성만 유서


그는 유서를 남기고 명동성당 교육관 4층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고 할복 투신했다. "88올림픽 남북공동개최하여 평화통일 앞당기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을 몰아내자!"

신학교에 입학한 89년부터 조성만 부모님을 찾아뵙고 있다. 성만이를 대신할 수 없지만, 아버지와 애틋한 관계가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통해 성만이가 이루고자 했던 사제를 보게 되고, 나는 아버지를 통해 성만이가 못 다한 효도를 대신 드리고 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찾아뵙는다. 전주에 나가면 부모님에게 주로 다슬기탕을 대접한다.

지난 5월 8일, 새만금 해수유통 관련 회의가 있어 전주에 갔다. 카네이션 화분을 들고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아버님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뜨신 아버지가 "신부님 자는가?" 하며 말을 꺼내셨다.

"성만이가 하늘로 간 지 32년이 되었네. 서울대를 졸업하고 광주신학교에 가기로 했던 성만이가 살아있으면 사제가 되어 최 신부랑 가난한 이웃과 세상, 민주와 통일, 정의와 평화의 길을 열심히 가고 있을 텐데."
 

망월동 참배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미사 후 참배 중인 정의구현 사제단 ⓒ 최종수

 
32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 속 맺힌 한을 토해내셨다. 아버지의 한이 내 영혼으로 전이된 것일까. 눈시울을 뜨거워졌다. 어떤 위로의 말도 드릴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말이 떨리고 울먹일 것 같았다. 아버지 오른손을 내 왼손으로 말없이 잡아 드렸다. 아버지의 한이 내 두 눈에서 뜨겁게 흘러내렸다. 누가 아버지의 한을 알 수 있을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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