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은 어떻게 싸움 준비했을까
의병성과 막사 터, 무기제작소 흔적 남아있는 화순 증동마을
▲ 모내기를 한 논에 반영된 화순 증리마을 풍경. 증리와 증동은 한말 의병들이 일본군과의 전쟁을 준비했던 진지였다. ⓒ 이돈삼
의병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나라를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을 가리킨다. 나라가 전쟁 등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나타난다. 의병의 날은 2010년 법정기념일로 제정됐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의병의 날을 앞두고, 우리의 미래이기도 한 의병마을을 찾아가는 이유다.
▲ 한말 의병들이 방어용으로 쌓은 성과 먹고 자며 훈련했던 막사의 흔적.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왕피골에 있다. ⓒ 이돈삼
▲ 화순 쌍산 왕피골에 있는 한말 의병 성과 막사, 훈련장의 흔적. 호남의병들이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준비했던 곳이다. ⓒ 이돈삼
쌍산의소는 쌍봉사 인근,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증리 계당산 자락에 있다. 오래 전에 '쌍봉', '쌍치'로 불렸던 쌍산의 왕피골이다. 옛날에 왕이 피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골짜기다. 왕피골은 기름진 나주평야를 적시는, 영산강의 상류 줄기인 지석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왕피골에는 한말 의병들이 방어용으로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의병들이 함께 먹고 자며 훈련했던 막사와 훈련장도 있다. 의병들이 탄약과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 터, 탄약의 재료인 유황을 채취했던 유황굴의 흔적도 보인다.
▲ 쌍산의소에 핀 엉겅퀴꽃. 보랏빛 엉겅퀴가 한말 의병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 이돈삼
▲ 화순 계당산을 가로질러 놓인 임도. 한말 의병 성과 막사 터에서 무기제작소를 이어준다. ⓒ 이돈삼
하지만, 성의 규모에 비해 흔적이 또렷하지는 않다. 일제의 눈을 피하려고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은 탓으로 추정된다. 쌍산의소가 항일 의병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쌍산의소는 의병들이 머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깊은 산중이어서 일제의 눈을 피하기 쉬웠다. 그만큼 의병을 모으고, 활동을 하기에 유리했다.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공급하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산골 주민의 도움을 받기에도 수월했다.
▲ 화순 쌍산의소의 유황굴 자리. 한말 의병들이 탄약과 무기를 만들려고 유황을 채취했던 자리라고 한다. ⓒ 이돈삼
▲ 밭에 고추가 심어진 화순 증동마을의 농가 풍경. 한말 의병활동을 모의하고 결의했던 임노복의 집 앞이다. ⓒ 이돈삼
겨우내 얼어붙은 산과 들에 봄기운이 감돌던 1907년 3월, 양회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단숨에 능주를 점령했다. 연이어 화순으로 진격해 관아와 분견소를 습격했다. 동복을 거쳐 내친김에 광주로 향해 가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다. 그의 행적이 제주 양씨 화순문중에서 펴낸 〈행사실기(杏史實紀)〉에 적혀 있다.
쌍산의소는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고 문병란 시인은 시 '불멸의 사랑'을 지어 쌍산의소 항일의병에게 바쳤다.
'명예를 탐하지 않았기에/ 호화로운 무덤이 필요 없었고/ 황금을 구하지 않았기에/ 빛나는 청석(靑石)을 원하지 않았다.// 족보에 새기고/ 사서에 장식하고/ 공과 훈을 원하지 않았기에//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슬프지 않았다.…'
▲ 화순 증동마을에 복원돼 있는 임노복의 집. 한말 의병들의 지휘본부였고, 군량미 비축창고 역할도 했던 집이다. ⓒ 이돈삼
▲ 한말 의병들이 탄약과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의 터. 화순군 이양면 증동마을에 있다. ⓒ 이돈삼
이후 임노복의 집은 의병지휘본부가 됐다. 군량미 비축창고 역할도 했다. 폐허가 돼 사라진 집을, 화순군에서 2006년 기와집으로 복원했다. 쌍산의소 의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의병사도 세웠다.
의병들이 쌓은 성과 막사 터, 무기제작소, 의병창의소는 차를 타고 돌아볼 수도 있다. 깊은 산골이지만, 임도가 잘 단장된 덕이다. 비포장 산길 드라이브를 겸해 쉬엄쉬엄 돌아보며 호젓한 숲을 만끽하면 더 좋다.
▲ 화순 증동마을에서 만난 윤명임 할머니. 장흥에서 시집 왔다는 할머니는 증동마을의 산증인이다. ⓒ 이돈삼
▲ 한말 의병들의 주무대였던 화순 증리마을 풍경. 기묘사화 때 화순 능성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의 시신이 처음 안치됐던 마을이다. ⓒ 이돈삼
쌍산의소를 품은 증리(甑里)는 의병마을로 통했다. 지형이 시루를 닮았다고 '증동(甑洞)'으로도 불렸다. 사동(寺洞), 서원동, 증동, 사은동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다. 사동은 쌍봉사에서 가깝다고 이름 붙었다. '절골'로도 불렸다.
서원동은 서원이 있던 자리다. 기묘사화 때 화순 능성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학포 양팽손이 사당을 지어 제향했던 곳이다. 현 죽수서원의 모체다. 서원이 있었다고 '서원터', '서운태'로 불렸다. 조광조의 시신이 묻혔다고, '조대감골'로도 통한다.
▲ 증리마을에 세워져 있는 정암 조광조 추모비. 증리는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은 정암 조광조의 시신이 처음 안치됐던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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