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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번아웃 된 활동가입니다

[활동가 인터뷰] 용산시민연대 사무처장 이원영을 만나다

등록|2020.06.02 09:01 수정|2020.08.12 13:03
"오늘 용산지역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여름김치를 담그느라 좀 늦었어. 미안해."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11년 전 용산구 동자동 쪽방주민공동체 활동을 할 때였다. 상근 활동가 두 명으로 운영하는 우리 단체는 늘 사람, 돈 그리고 지원이 필요했다. 급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곳이 용산시민연대였다. 그때 달려와 준 사람이 이원영이다.

태어난 연도가 같다는 걸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린 친구가 되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활동가로 살고 있다. 지난 2019년 말, 그의 SNS에서 번아웃(burn-out 심신이 탈진한 상태) 증후군이 왔다는 글을 읽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5월 23일 토요일 용산시민연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활동가도 '쉼'이 필요해
 

▲ 용산시민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이원영 ⓒ 문세경


"활동가로 살다 보니 퇴근이 없어. 주말도 없고 쉴 수 있는 시간도 없어. 결국 작년 가을에 번아웃이 왔어.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어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란 가족을 소홀히 대한 거야. 그러다 보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 내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가족에게 소홀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죄책감은 갖게 돼.

다음은 경제적 문제야. 시민단체는 재정이 항상 열악하니까 이 일만 해서는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어.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병행해야 해. 최근에 두부 만드는 공장에서 8개월 정도 일 했어. 생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도 하고, 건축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공사장 인부도 했어."


쉼이 없고, 가족을 소홀히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3중 문제에 시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번아웃이 왔다는 이원영 용산시민연대 사무처장. 언제나 기분 좋은 미소를 하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줄 것 같은 그에게 번아웃이 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활동가가 강철로 만든 사람도 아닐 텐데 나는 왜 예측하지 못했을까. 마음이 아팠다. 그 글을 본 다음 날 술이라도 한잔 하자며 불러내고 싶었지만, 그 또한 에너지를 소모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어.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폭로하고 알리는 그런 기자 말이야. 그래서 학보사에 들어가 3년 동안 활동했어.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기자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글을 잘 못 쓴다는 걸 알고 포기했어. 그리고 꿈을 바꿨지. 좋은 사회를 만드는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간 곳이 전교조였어. 그때까지만 해도 전교조가 합법 단체가 아니어서 전임할 교사를 둘 수 없었어. 상근자를 채용한다고 해서 내가 하게 됐어. 전교조에서 상근하면서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고, 우리나라 교육에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바뀌어야 되는지를 알게 됐지. 7년 동안 활동하면서 많이 배웠어. 물론 그때도 활동비가 많지는 않았지만.


7년 동안의 전교조 활동을 그만둔 것은 농부가 되고 싶어서였어. 부모님도 농사를 짓고 계시거든. 그런데 농부가 되지 못했어. 2004년도에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국회의원을 배출했어. 그때 전교조에서 상근활동을 했던 나에게 교육정책 보좌관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어. 학보사 시절의 친구가 먼저 보좌관을 하고 있길래 보좌관이라는 일이 어떤지 물어봤어. 좋은 직업이니까 한번 해보라 하더라고.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보좌관 생활을 시작했지. 마침 최순영 의원이 교육상임위를 맡고 계셨거든. 4년 동안 열심히 했어. 그때 많은 걸 배웠어. 정치가 정말 중요한 거구나. 특히 진보정당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지. 결과도 많이 만들어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정치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결국 이원영은 보좌관 임기를 마치고 정치에 직접 뛰어든다. 2010년, 2014년, 2018년 세 번에 걸쳐 용산구의원으로 출마했다.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당선을 염두에 두고 나가지 않아. 지역주민에게 진보정당을 알리고 좋은 정책을 만드는데 함께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까. 선거운동 할 때 주민들 반응이 좋아서 할만했어. 젊은 사람이 나오니까 격려도 많이 해주시고, 주민들의 생각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정치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선거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 이거야말로 민주주의의 배움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민주노동당이 분당하고 정의당 후보로 나갔을 때는 주민들이 정의당이 어떤 정당인지 물어봤어. 그래서 심상정, 노회찬, 유시민 등이 있는 당이라고 말했어. 두 번 출마 하다 보니 나도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고. 2018년도에는 출마할 생각이 없었는데, 두 번의 출마에서 득표율이 10% 이상 나왔으니 한 번만 더 출마해 보라고 당원들과 주변에서 강하게 권유했어. 이번에도 당선 가능성은 없지만 선거 과정에서 얻는 것이 많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갔지.
  

사실 용산에서 화상경마장 설립 반대 싸움을 5년 정도 했잖아. 그러면서 인지도가 좀 생겼어. 정치인은 선거운동만 하는 줄 알지만 실제로 내가 오랫동안 했던 시민운동은 친환경무상급식운동이야. 2003년도에 급식조례제정운동 시작할 때부터 참여했어. 전국 급식운동본부의 집행위원장도 여러 번 했고. 급식운동은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 15년을 넘게 했네. 세 번의 출마에서 마지막은 등 떠밀려서 나갔지만 후회하지 않아. 당선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시간이었지. 세 번이나 출마하면서 당선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진보정당의 당선이 얼마나 힘든 건지 잘 아니까. 이렇게 말하면 너무 솔직한가?"
 

"좋은 사회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 2018년 용산구의원 출마당시에 선거캠프 자원봉사자가 찍어준 사진. 웃는 모습이 너무 선해 보인다. ⓒ 이원영


내가 알고 있던 이원영의 과거가 이렇게 화려(?)할 줄은 미처 몰랐다. 선거에 세 번 나간 건 알고 있었지만, 전교조에서 상근활동을 하고 국회의원 보좌관을 한 건 잘 몰랐다.

용산시민연대는 지역의 여러 가지 문제에 열심히 연대하는 단체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화상경마장 반대 싸움에서 이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 싸움이 얼마나 힘든 싸움인 줄 아니까. 그곳에 용산시민연대가 있었고, 이원영이 있었다. 솔직히 감격했다. 마음 속에는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도 있었다.

"화상경마장 반대 싸움에서 이긴 건 지역의 여러 시민단체와 학부모, 종교시설, 성직자들이 함께 이루어 낸 결과야. 매주 주말 경마장 앞에서 시위했거든. 사계절 중에서 봄하고 가을은 그나마 괜찮았는데 여름하고 겨울은 덥고 추워서 정말 힘들었어. 겨울에는 칼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었거든. 2015년부터는 아예 농성장을 꾸려서 싸웠어. 말이 5년이지 정말 엄청나게 힘들었던 기억이 나.

용산시민연대에서 활동한 것 중에 또 하나 의미 있었던 게 뭐냐면,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한 거야. 박근혜 정부 시절에 국정교과서 만든다고 할 때, 역사 왜곡을 막기 위해 전국적으로 평화의 소녀상 건립운동을 많이 했어. 용산에서도 이걸 한번 해보자고 해서 시민들에게 홍보하고 캠페인하고 모금운동을 했어. 소녀상 건립에 5천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 데 1천 명 정도가 모금에 참여했어.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을 동판에 넣었지. 정말 감동이었어."


실로 스펙타클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아웃이 괜히 온 게 아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가을부터 왔다던 번아웃이 최근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했지만 쉬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여전히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고민이 많아. '시민단체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고맙게도 친환경무상급식본부에서 '반상근을 할 수 있냐'는 요청이 왔어. 지금 일주일에 세 번 그곳에서 반상근을 하고 있어. 용산시민연대에서는 후원회원이 많지 않아 활동비를 50만 원밖에 못 받거든.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들도 밥 먹듯이 아르바이트를 해.

얼마 전에 처가로 들어갔어. 전세 만기가 되어 연장해야 하는데 재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시골집이라 비싸지 않은)을 상속받았어. 그것 때문에 무주택 전세대출이 안 된다는 거야. 할 수 없이 염치 불고하고 장모님 댁으로 들어갔지. 주변 사람들이 '겉보리 서말만 있으면 처가살이는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처가댁으로 들어가는 걸 말렸어. 하지만 나는 좋아. 일단 빚을 다 갚아서 홀가분해. 장모님께도 감사하고. 이제 가족들하고 보내는 시간을 좀 늘리면 되는데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야."


모든 활동가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이원영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시간적 여유 없음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것 말이다. 그러면서도 활동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들어보았다.

갑자기 닥친 지구적인 재난
 

▲ 2014년 화상경마장 설립 반대 싸움에서 캠페인 하고 있는 이원영. ⓒ 이원영


"내가 활동가로 살지 않는다 해도 누군가는 이 길을 가겠지. 누군가 활동을 해야만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변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 너도 알잖아. 이 길을 선택한 걸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쓸모 있다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지 갈 거야. 활동하면서 만난 사람 중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 많거든. 그게 나한테는 엄청난 힘이 돼.

이제 내 나이 오십줄에 들었어. 남은 생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특별히 없어. 왜냐면 욕심을 다 내려놨거든. '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 있잖아. 그 말대로라면 통일이 꼭 되었으면 좋겠어. 통일될 수 있도록 내가 무슨 활동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봤는데 나는 죽기 전까지 노동하고 운동(활동)할 거야. 젊은 활동가가 생긴다면 지원을 많이 해주고 싶어.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우리 사회가 지금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어. 그때가 되어도 내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사람이 힘들어하고 있지.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나도 그렇지만 모두가 당황스러울 거야. 아이들이 학교에 안 가니까 아내와 내가 교대로 아이들 식사를 챙기고 있어. 그게 너무 힘들어. 애들이 한 번 해준 건 안 먹거든.

코로나19의 원인은 산업화 이후의 환경파괴 때문인 것 같아. 앞으로 의학이나 과학이 엄청나게 발달해도 해결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과학과 문명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하겠지. 무엇보다 관계에 대해 성찰을 해야 한다고 봐.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이 떨어져서 지내고 학교도 못 가고 극장도 못 가고, 심지어 병원도 못 가잖아.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관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어려움이 생기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돈 많고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노동자, 알바생들, 쪽방 주민들, 장애인 등이야. 코로나19가 오기 전에는 복지관 등에서 이런저런 서비스를 했지만 위기가 오니까 다 문을 닫았잖아. 우리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체계를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봐. 특히 시민운동가는 환경을 염두에 두고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아.

코로나19 때문에 공장이 멈추니까 미세먼지 배출이 줄었고, 관광객이 없으니까 히말라야산맥이 보인대. 북극의 해빙기로 얼음이 녹았는데 그 현상도 조금씩 둔화되고 있고. 이런 것처럼 우리가 활동하더라도 환경을 중심에 두고 해야 한다는 것,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 지역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취약계층에게 어떤 지원을 할 수 있는지, 체계는 무엇이 있는지 봐야 하고. 만약에 없다면 어떻게 만들 것인지, 예산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감시하는 활동도 해야겠지.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엄청 많네. 휴..."


자나 깨나 무슨 활동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그는 천상 시민운동가다.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지를 물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말했다.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어. 요즘 나의 화두야.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살았어. 제때 쉬지도 못하고 나를 너무 학대한 것 같아서 앞으로는 나를 더 사랑하기로 했어.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심한 게 있어. 내 나이가 벌써 (만으로) 오십이야. 앞으로 계속 활동하려면 일단 체력을 좀 갖춰야 할 것 같아서 작년부터 운동을 시작했어. 달리기랑 역기를 하고 있지. 사무실에서도 틈틈이 해. 저쪽에 역기 있는데 보여줄까?"

그가 운동하는 걸 보고 싶었지만 나는 배가 고팠다. 얼른 나가서 맛있는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다. 이원영은 술을 잘 못 마시지만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에게 술 먹자는 청은 부담이 될 법도 한데 그는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사무실 근처에 용문시장 있잖아. 용문시장 상인회장님도 우리 회원이야. 시장에 맛있는 메밀국수 파는 데 있어. 국수랑 막걸리 한 잔 하자. 인터뷰하느라 고생 많았어."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끊임없이 활동에 대한 얘기를 했다. 막걸리 두 잔에 얼굴이 붉어진 이원영을 보니 최근에 그가 SNS에 쓴 글이 떠올랐다.
 
"나는 술이 약한데 왜 술을 좋아할까? 내 주량은 소주 서너 잔이다. 맥주는 1천cc 정도 마시면 취한다. 요즘은 막걸리에 맛을 들려서 술을 고르라고 하면 막걸리를 선택한다. 내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시골 친구들과 읍내 술집에서 몇 번 술을 마셨고 동네 계곡에서 밤새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술이 약해 과음을 하면 토하기도 했고 금방 쓰러져 잔다.

'날씨야, 네가 아무리 추워 봐라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이런 말은 진짜 술꾼에게 어울리는 풍류이다. 나는 술이 약해 누구와 술 마시자고 하기가 겁이 난다. 보통 천천히 마신다. 첫 잔이 제일 맛이 있다. 그래도 지인들에게 술 마시자고 자주 이야기한다. 술자리가 반갑고 술친구가 좋다. 낮술도 좋고 어디 여행 가서 마시는 술도 좋고 농사일을 하다 마시는 술도 좋고 바다에서 마시는 술도 좋다. 비가 오거나 바람 불면 술 생각이 나고 한밤중에 잠이 안 오면 술이 당긴다. 그러고 보니 난 거의 매일 술을 조금씩 마신다. 술을 자주 먹는데 주량이 약하니 좋은 점은 술값이 조금 든다는 점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11시가 지났다. 오늘은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떤 술을 마시게 될까?" -  2020년 5월 2일, 이원영의 페이스북에서 발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활동가 이야기주간'(www.activistweek.net) 프로젝트의 활동가 인터뷰 공모를 통해 진행했습니다. 프로젝트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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