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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대작에 올려놓은 여자

[사연 있는 클래식] 자클린 뒤 프레 2편

등록|2020.06.07 12:01 수정|2020.06.07 12:01
[이전 기사 : 돈 걱정 없이 연주만... 첼리스트로 급성장했으나 잃은 것]
 

▲ 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자클린. ⓒ 위키피디아


1962년, 자클린은 루돌프 슈바르트가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성인 무대'를 치른다. 이때 그녀가 들고나온 곡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다. 긴 금발에 키가 175㎝인 자클린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에 등장, 치아가 훤히 드러나는 미소를 지으면 관객은 마법에 걸리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아 지휘자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첫 음부터 엄청난 에너지로 보잉을 시작한다(연주 중간에 줄이 끊어지는 일은 외려 그만의 퍼포먼스처럼 보일 정도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감수성을 내뿜으며 몸을 좌우 앞뒤로 흔들다가 허공을 향해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지으면, 혼이 빠진 쪽은 관중이었다. 자클린은 잠들어 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단숨에 대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실 엘가가 1919년 이 곡을 만들고 초연했을 당시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재밌는 사실은 첼리스트인 바비롤리는 엘가의 초연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평단원으로 객석에서 관람했다. 다음 해에 솔리스트로 이 곡을 연주했으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1965년, 거물 지휘자가 된 바비롤리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자클린과 함께 EMI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자클린을 '라이징 스타'에서 '어메이징 스타'로 번쩍 올려놓았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진짜 주인을 만난 것이다.

오스트리아에는 모차르트, 독일의 베토벤, 이탈리아의 비발디, 프랑스의 드뷔시 등등 유명 작곡가들이 쟁쟁한 데 반해, 영국은 음악에 있어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었다. 하지만, 자클린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영국에도 엘가라는 위대한 작곡가가 탄생한 셈이 되었다. 이러니 자클린이 전 영국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1965년, 미국 카네기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클린은 역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미국인들까지 단숨에 사로잡았다. 다음해 자클린은 모스크바로 가서 당대 최고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레슨을 받는다.

그에게 배우기 위해 세계 유수의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음악원에서 마지막 날, 참가자들이 장장 4시간 반에 달하는 공개 연주회를 열었는데, 자클린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이든 C장조 첼로 협주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자클린의 자서전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내가 만난 이 시대의 첼리스트 중에서 자네가 가장 관심이 가. 자네는 아주 멀리, 나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어"라고 말했다. 이후, 로스트로포비치는 자클린이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자신의 연주 목록에서 이 곡을 제외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자클린은 당시 음악가들의 아지트였던 푸 쑤옹의 집에서 열린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참석한다. 이곳에서 자클린은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는데, 그 상대가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놀라운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하지만 당시 자클린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지명도는 낮았다. 자클린의 자서전에는 그와 만난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 언급된다.
 
"나는 덩치가 아주 컸어요. 러시아에서 다섯 달 동안 빵하고 감자만 먹고 지내온 터라 81㎏이나 나갔고 거구가 된 기분이었지요. 내 큰 체격이 아주 신경이 쓰였어요. 그런데 작고 까무스레한 피부의 나긋나긋한 이 사람이 불쑥 들어오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당신은 연주가로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시에 부끄럼을 많이 타고 다소 불안정했던 나는 '오, 하느님,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하고 생각했지요. 다행히 내겐 첼로가 있었고 나는 그걸 꺼내서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도 나와 함께 연주했고 그때 분명 무언가 일어났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평생 함께 연주해온 느낌이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이 정도로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바렌보임은 부모님 모두 피아노 레슨했던 음악가로 뱃속에서부터 피아노 소리를 듣고 태어난 천재 음악가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의 유대교였다. 그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자클린은 망설임 없이 청교도에서 유대교로 개종한다.

1967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자클린과 바렌보임은 바렌보임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날아갔다. 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 국민에게 응원과 연대의 의미로 연주회를 열었고, 전쟁은 6일 만에 승리로 끝이 났다. 둘은 통곡의 벽 인근에서 갑작스레 결혼식을 치른다.

이 결혼은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에 비견되며 세기의 결혼으로 떠들썩했다. 예식장에는 급하게 날아온 자클린의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이스라엘 수상인 데이비드 벤구리온, 예루살렘 시장, 국방부 장관 등 유명인사들이 출동했다. 이 기습적인 결혼에 대해 영국에서 유일하게 소식을 전한 건 <데일리 메일>이다.
 
"신동이었던 재클린느 뒤 프레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9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발표했었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클린이 첼로, 피아노는 바렌보임, 주빈 메타가 더블베이스, 이츠하크 펄먼이 바이올린, 핑커스 주커만이 비올라를 들고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인 숭어를 연주한다. 믿을 수 없는 별들의 조합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하다.
 

▲ 슈베르트 숭어를 연주하는 자클린과 친구들. ⓒ 위키피디아.


팀을 리드하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띠며 자신감에 가득 찬 자클린의 모습을 보면 그의 젊음이, 연주가 영원할 것만 같다. 바렌보임과 여러 차례 협연한 자클린은 어딜 가나 숭배에 가까운 찬사를 받았다. 바렌보임도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지휘자로서도 승승장구했다.

언론에서 떠들던 '영국의 장미와 이스라엘의 선인장'의 결합은 놀라운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베토벤 첼로 소나타,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 등, 이들이 만들어 낸 음반은 지금도 최고의 명반으로 남아 있다.

허락된 행복은 너무나 짧았다. 연주하다가 활을 떨어뜨리고, 현을 짚는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그저 정신적인 문제라고만 진단이 내려진 터라 진정제와 보드카로 세월을 보내는 사이 바렌보임은 멀찌감치 자클린을 앞서갔다.

그는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실망해 그녀의 나약함과 나태함을 끊임없이 지적했다. 견딜 수 없어진 자클린은 남편에게서 도망쳐 불현듯 언니인 힐러리에게 도망쳤다. 힐러리는 동생을 껴안았다.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눈을 뜨니 재키가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는 재키를 빨리 찾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재키를 언덕 뒤편에서 찾아냈다. 그녀는 발가벗은 채 올리브 나무 덤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멍하니 눈을 뜬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생은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재키가 자신의 삶에 걸린 무거운 부담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녀는 정말 미쳐버릴 게 틀림없었다." -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151p.

16개월 언니 집에서 요양하고 무대로 돌아온 자클린은 1973년 2월, 영국 최대 연주회장인 로열 앨버트 홀에 다시 섰다. 주빈 메타가 지휘를 맡고 그녀의 대표곡인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첫 소절이 시작되고 자클린의 연주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주빈 메타는 오케스트라의 템포를 늦추려 애썼다. 연주자도,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연주가 끝이 나고, 모두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무대는 자클린의 고별무대가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혜성과 같이 등장한 자클린은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그녀의 나이 고작 28살, 17세에 성인 무대를 치르고 10년을 하늘의 별로 살다가 갑자기 유성이 되어 뚝 떨어져 버렸다. 짧은 연주 인생이었지만, 그녀는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 자클린과 바렌보임 ⓒ 위키피디아


자클린의 병명은 다발성 경화증. 병명을 들은 자클린은 자신이 정신병이 아님에 놀랍고 반가웠다. 여기저기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는 희소식(?)을 전했다. 그렇게 간단한 병이 아닌 걸 그때는 몰랐다.

회복에의 기대가 있었다. 온몸이 마비되기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을 듣고 찾아온 학생들에게 첼로를 가르쳤다. 여기에는 요요마와 린 하렐도 있었고, 이런 인연으로 자클린의 사후에 그녀의 악기인 스트라디바리를 요요마가 받게 된다.

찾아오는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바렌보임은 전 세계로 연주를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적었다. 게다가 그는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헬레나 바쉬키로바와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았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 바라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산이 되었다. 지독한 외로움이 그리움을 넘어선 어느 날, 자신의 굳어진 몸을 풀어주기 위해 방문한 물리치료사에게 말했다. '나를 좀 안아주세요.' 누군가의 체온이 간절히 그리웠을 그녀의 절박한 외로움이 내 폐부를 뚫고 들어와 나는 끝내 울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신의 음반을 듣는 것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상상하면 그녀의 엘가 협주곡이 어찌나 비극적인지. 그래서 누군가는 이 곡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곡이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삶을 견디죠?"라고 울먹이던 자클린은 1987년 10월, 바람이 무척 세게 불던 날, 눈을 감았다. 그의 옆에는 언니와 동생, 그리고 그녀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바렌보임이 있었다.

자클린이 떠나고 사람들은 바렌보임을 향해 분노를 쏟아냈다. 아픈 부인을 버리고 바람피우다 아내가 죽자마자 보란 듯이 재혼해 버린 비정한 남자라고. 생각해 보면 그라고 행복했을까?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스스로 느꼈을 죄책감까지. 나이 겨우 31살의 인간이 감당하기엔… 그로서도 충분을 넘어서는 지옥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자클린에게도 그에게도 가혹했던 시간, 죄는 모두 빌어먹을 운명에게 있다.

참고서적

<자크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캐럴 이스턴/윤미경. 마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박종호. 시공사)
<더 클래식 셋>(문학수, 돌베개)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전원경, 시공아트)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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