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전 해군 자유게시판 게시글, 삭제할 '특별한 사정' 있다?
[주장] 표현의 자유 시계를 되돌린 대법원 파기환송 판단
▲ 박아무개씨가 해군 누리집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글. 해군은 당일 이 글을 삭제했다. ⓒ 천주교인권위원회 제공
"국민들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만 크게 나오지 않았을 뿐, 문화계, 정치계 그리고 일반 사람들도 이 공사가 적법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공사임을 전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양해군 정책은 사실상 폐지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보상 북한과 싸워야 할 기지가 제주도에 건설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건 초등학생도 압니다. 그리고 미군이 쓰기 위한 무기를 정박시키기 위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런 곳에 세금 1조 원을 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지 않습니까. 그 월급을 주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요구합니다. 당장 공사를 중지해주십시오. 아무도 원치 않는 공사를 당장 중지 시켜 주십시오. 지금 중지하는 편이 훨씬 현명할 겁니다. 그리고 공사는 중지될 겁니다."
삭제 이유는 "제주기지 건설에 관한 막연하고 일방적인 주장과 비난 글들은 국가적 차원이나 제주 강정마을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해군의 게시글 삭제 조치에 대해 윗글을 올린 사람을 포함한 3명이 대한민국(해군)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해군의 일방적인 게시글 삭제 조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므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이었다.
법원의 판결은 어땠을까. 1심은 원고 패소, 2심은 원고들에게 30만 원씩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났다. 피고 대한민국은 2심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장을 냈다. 대법원(주심 권순일 대법관)은 지난 6월 4일, 상고장이 제출된 지 무려 4년 9개월 만에 2심 판결이 잘못되었으니 '파기 환송'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대법원이 판단한 '특별한 사정'
바둑 속담 중에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라는 말이 있다. 대법원판결 후 관련 보도를 보고 떠오른 생각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1, 2심 판결문과 대법원 판결문 모두를 살펴본 뒤 생각이 달라졌다.
이번 대법원판결은 한 마디로 '장고'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장고 끝에 악수'는 바둑 고수들의 '실수'에 의한 패착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해군 자유게시판 담당자가 게시글을 삭제 조치한 것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위법한 직무 집행인가"였다.
대법원은 "국가기관이 자신이 관리·운영하는 홈페이지에 게시된 글에 대하여 정부의 정책에 찬성하는 내용인지, 반대하는 내용인지에 따라 선별적으로 삭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배치되므로 허용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이번 사건의 경우는 '삭제 조치'가 위법하지 않다고 했다.
해군 담당자가 게시글을 삭제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이 지적하고 있는 '특별한 사정'이란 무엇일까.
대법원은 "해군 홈페이지 게시판이 정치적 논쟁의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비록 인터넷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해군본부에서 관리·운영하는 공간에서 정치적 찬반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헌법이 강조한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 요청에 배치된다"라는 것이다.
해군 홈페이지 운영 규정이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게시글을 삭제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은 '국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한 것이니, 게시글 삭제는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어떤가? 대법원의 논리에 동의가 되는가? 판단이 어렵다면 2심 판결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2심 판결은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의 내용에는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나 견제 또는 지지 등의 의견을 당연히 포함하고, 위와 같은 표현들이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을 가진다는 이유로 제한된다면 헌법과 법률이 정한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 사회윤리에 의한 제한을 넘어서 과도하게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게 된다.
(중략)이 사건 게시글의 내용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야당 및 시민단체 등의 입장과 유사하다는 사유만으로 정치적 목적이나 성향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삭제한 조치는 원고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여 결국 위법하다."
2심 판결은 해군 운영 규정이 "정치적인 목적이나 성향이 있는" 게시글을 삭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더라도, 게시글이 그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려면 "특정 정당을 직접적으로 지지하거나 선거와 관련하여 특정 후보자에 대한 찬반의 의사를 표시하는 경우"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2심 판결은 "정부의 정책이나 국가기관의 직무수행을 비판하는 취지의 표현물은 인터넷 규제 대상에서도 제외된다"라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결정까지 인용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항소심을 진행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판부야말로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과 그 한계에 대하여 진지하고도 치밀한 '장고' 끝에 판결문을 쓴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판결,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터넷 게시판 관리자들이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의 삭제 여부를 판단할 때 고민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혐오와 배제, 근거 없는 비방의 글들을 그대로 둘 것인가, 삭제해야 하는가는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의 한계와 관련한 난제이다.
그러나 이번 대법원판결의 논리를 내세워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정치적 목적이나 근거 없는 정부 비방"이라는 이유로 삭제하는 사태가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대법원판결은 아무리 잘 보아주려 해도 표현의 자유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파기환송심을 담당하게 될 재판부가 파기 환송판결의 기속력이라는 법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거꾸로 돌아간 시곗바늘을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대전충남인권연대 뉴스레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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