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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한용운-윤봉길, 6월엔 이 코스를 추천합니다

호국보훈의 달, 김좌진 장군 생가지부터 만해 한용운 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까지

등록|2020.06.16 09:10 수정|2020.06.16 10:14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라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걸려있다. 그리고 올해는 '청산리 대첩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서해로 무작정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가다 보니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100주년 기념 음악회를 알리는 깃발이 곳곳에 날리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힘쓴 사람들의 공훈에 보답하는 달이어서 더 눈이 갔던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독립 투쟁을 따라가는 거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  

김좌진 장군 생가김좌진 장군 기념관 내 생가 ⓒ 장순심



충남 내포는 홍주 의병의 활동지이며 한용운, 김좌진, 윤봉길 등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곳이라고 했다. 홍성에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산으로 빙 둘러싸인 그 중심에 포근하게 안긴 듯한 백야 기념관이 그의 독립을 향한 냉철한 이성만큼이나 빈틈없어 보였고 정갈했다.

김좌진 장군은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젊은 나이에 가노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토지와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이후, 본격적인 독립 투쟁에 뛰어들었고 군자군 모금, 항일 비밀 단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계속해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해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순국하기까지의 행적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독립투쟁 당시 태극기김좌진 장군 기념관 내 독립투쟁 당시 맹세를 적은 태극기 ⓒ 장순심



기념관 내에 광복군 병사들의 조국독립과 항일 무장투쟁에 대한 맹세가 적힌 당시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반듯한 필체로 저마다의 각오를 적은 글귀들이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생가는 대지주 가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출해 보였다. 생가를 통해서도 노비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신분을 해방시키고 토지와 재산을 나눌 수 있었던 그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
 

만해 한용운 생가만해 한용운 기념관 내 생가 ⓒ 장순심



차로 15분 가량 떨어진 곳에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가 있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문학계에서는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불교계에는 큰 족적을 남긴 스님이다. 각각의 행적에 위대한 자취를 남긴 분이다.

일찍부터 항일 의병운동을 시작으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대한민국 독립의 정당성을 외쳤고, 시인으로는 우리 근대문학사의 획을 그은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셨다. 또한 한국 불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군말 -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이다.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그의 시는 다양한 해석으로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시험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이제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자동으로 한용운의 '님'에 대한 해석을 입에서 줄줄 왼다. 그렇게 즉답이 나오는 것이, 그의 시심의 작은 부분이라도 알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펼친 시의 범위를 좁히고 형식적 절차로만 새겨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까. 그의 자취를 만나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만해 한용운의 옥중투쟁 3원칙만해 한용운 기념관 내 옥중투쟁 3원칙 ⓒ 장순심


1919년 독립선언서를 외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1921년 가출옥, 1926년 6.10 만세운동으로 다시 구속되고 이후 생애 동안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옥중투쟁 3원칙(변호사를 대지 말라. 사식을 취하지 말라. 보석을 요구하지 말라)을 세워 실천하며 일제에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저항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본 검사의 취조를 받으며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다. 계속하여 언제까지든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며, 일본에 중 월조가 있다면 조선에는 중 한용운이 있을 것이다."

형을 확정하는 판사의 심문에도 그의 태도는 변함 없었다.

"언제까지고 그(조선 독립운동)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그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부드러운 얼굴에 강인한 눈빛, 단호한 결의를 마주하는 듯했다. 문학기행으로 갔던 심우장에서는 학생들과 시를 짓는 활동을 했었는데, 이곳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마침 유치원 아이들이 병아리 같은 노란 옷을 입고 선생님을 따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시가 아니면 어떠랴. 이곳에서 그냥 뛰어놀아도 그분의 마음에 동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윤봉길 의사 기념관 전경 ⓒ 장순심



홍성에서 예산 쪽으로 조금 넘어오다 보면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주차장에서 기념관 앞까지 이르는 동안 양 옆의 태극기가 흐트러진 마음을 정돈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같았다. 25세의 짧은 생애, 홍커우공원에서 의거를 결행하고 그해 순국하기까지의 그의 삶이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봉길 의사는 부인에게 청해 물 한 사발 마신 뒤 죽음을 각오하고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로 가족을 떠났다. 중국으로 망명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의거를 결행한다. 이후 일본으로 압송되어 안타깝게 순국, 해방 이후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발자취가 기념관 곳곳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당신의 심장은 무엇을 위해 뛰고 있습니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관람을 시작하는 부분에 쓰여진 글귀다. 나의 심장은 무엇을 위해 뛰고 있는지 묻는 것 같았다. 의거를 결행하기 전 백범 김구 선생과 회중시계를 바꿀 때, 수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안고 홍커우공원에 섰을 때, 외적을 향해 폭탄을 투척할 때의 윤봉길 의사의 심장의 박동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보도 신문윤봉길 의사의 홍커우공원 의거 보도 신문 기사 ⓒ 장순심



사형이 선고되고 사형 틀에 묶여 있을 때의 차가운 심장의 울림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한 젊은 청춘이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기로 마음을 먹고 행동으로 옮기는 위대한 결단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달리 없는 것 같았다. 올라오는 길, 라디오 방송에서 진행자와 패널이 묻고 답한다.

"충청도 출신이군요. 충청도에 인물이 많죠?"
"그렇죠."
"누가 있을까요?"
"어... 최양락 씨가 있죠, 이영자 씨도 있고요."
"예... 아주 유명한 개그맨이죠. 충청도의 인물이고요."

방송은 웃음으로 마무리했지만, 듣는 순간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충청도에는 김좌진 장군도 있고요. 만해 한용운과 윤봉길 의사를 배출한 고장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면 듣는 사람도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충남에서는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기념하는 다양한 기획 전시와 문화 행사가 계획되었던 것 같았다. 학생이나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다양한 체험 행사도 기획되어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모두 취소된 상태였다.

한용운 생가지에서 유치원 학생들을 마주한 것을 제외하곤 다른 관람객은 전혀 없었다. 모든 전시관은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손소독제도 준비하고 방역에 신경 쓴 모습이었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찾아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김좌진 장군의 인간에 대한 믿음이, 한용운 선생님의 단호하고 강인한 의지가, 윤봉길 의사의 뛰는 심장이, 역사를 부인하고 친일을 옹호하며 우리 민족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이들의 정신까지 바로 잡을 수 있는 큰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득 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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