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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신' 원조 아이돌의 기절초풍 무대 매너

[사연 있는 클래식] 피아노 리사이틀 시대를 연 프란츠 리스트

등록|2020.06.20 18:34 수정|2020.06.21 17:51
키가 훤칠하고 조각처럼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무대에 올라선다. 그는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애타게 그를 기다리던 귀부인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있다.

무대에 선 그가 손수건과 장갑을 객석에 던지면, 그의 물건을 쟁취하고자 한바탕 소란이 인다. 마침내, 조각조각 잘린 손수건과 장갑 한 조각씩을 나눠 갖고 사태는 수습되고 한껏 흥분된 분위기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 프란츠 리스트 ⓒ 위키피디아


피아노를 치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숙였다가를 반복하며,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피아노를 때려 부술 듯 강한 터치로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건 예사다. 허공에 팔을 휘젓다가 연주의 마지막 광란에 가까운 속주를 보여주고 벌떡 일어나 극적인 마무리를 하는 그의 연주에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

그의 현란한 무대를 본 동시대 피아니스트들은 자괴감에 빠졌다. 쇼팽조차도 무대에서는 그의 경쟁자가 되지 못했을 정도다. 이런 쇼맨십을 불편해 하는 순수 예술가들조차도 막상 그의 무대를 보고 나면 할 말을 잃었다.

음악계 신동으로 전 유럽을 강타했던 클라라 슈만도 그의 연주를 보고 "우리가 고통스럽게 연습하다가 결국 포기한 부분을 그는 초견으로 연주했다(책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에서 인용)"라며 경탄했다.

그의 연주를 듣다가 기절하는 여성은 일상이었고, 어떤 날에는 연주하던 그마저 쇼인지, 진짠지 모르게 연주 도중 기절해 버려 악보를 넘겨주는 이의 품으로 쓰러진 적도 있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한 루이 14세를 벤치마킹해서 '내가 곧 콘서트다'라고 자신을 선전한 그는 바로 피아노의 신 '프란츠 리스트'다. 어딜 가나 리스토매니아(Lisztomania)라는 열광적인 팬덤을 끌고 다니는 원조 아이돌.

"내가 곧 콘서트다" 리스트의 자신감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헝가리 라이딩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자였고, 어머니 안나 라거는 청소부였다. 에스테르하지 궁에는 궁 소속의 관현악단이 있었는데, 아담은 이곳에서 한동안 제2 첼리스트로 연주했다.

이 관현악단은 불과 몇십 년 전 하이든이 악장으로 일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담은 첼로뿐 아니라 피아노도 다룰 수 있었다. 아담은 리스트가 여섯 살 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가르쳤고, 리스트는 빠르게 발전했다.

리스트가 세상을 놀라게 할 신동이라 확신한 아담은 리스트의 손을 잡고 빈에 있는 당대 가장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체르니를 찾아갔다. 열성적인 아버지 덕에 리스트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리스트와의 첫 만남에 대해 체르니는 이렇게 회상했다.
 
"1819년 어느 날, 한 남자가 여덟 살배기 소년을 데리고 와서 연주를 들어달라고 청했다. 아이는 얼굴이 창백하고 건강도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피아노 의자에 쏜살같이 달려간 다음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움직였고 저러다가 피아노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게 아닌가 가끔씩 걱정도 되었다. 아이의 연주는 체계가 없었고 손가락을 건반 위에서 되는 대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은 놀라웠으며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아이에게 초견 연주(처음 본 악보로 연습 없이 바로 연주하는 것)를 시키고 보니 하늘이 내린 피아니스트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 <리스트 삶과 음악 >  23p

아담은 열 살의 리스트를 알리기 위해 프레스부르크에서 공개 독주회를 열었다. 영리한 아담은 공연 날짜를 헝가리 국회 의사 일정이 시작되는 날짜에 맞췄고, 이 공연에는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로 가득 찼다.

어린 리스트는 헝가리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해 현란한 기교를 선보이며 무대를 쓸어버린다. 리스트의 무대에 압도당한 귀족들이 리스트의 향후 6년의 학비를 대겠다고 나섰고, 덕분에 리스트 가족은 빈으로 이사해 리스트는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학비를 지원했다고 해도 워낙 가난했기에 빈에서 생활은 궁핍했다. 체르니는 리스트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무료로 그를 지도했다. 실기지도는 체르니가 맡았고, 화성, 대위, 관현악 편곡 등 음악 이론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맡았다. 영화 <아마데우스> 속 나쁜 이미지와 달리 그도 무료로 리스트를 지도했다. 이런 영향으로 리스트도 훗날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많은 이가 그에게 무료로 배우는 혜택을 받는다.

체르니가 베토벤의 제자였기 때문에 체르니의 주선으로 리스트는 베토벤을 만날 행운도 잡는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신동의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던 베토벤이지만, 12살의 어린 리스트의 연주를 보고 감명을 받아 리스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리스트는 이 사실을 평생 자랑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베토벤의 후계자라 칭하기도 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의 고전 시대에서 리스트가 이끄는 낭만시대로 옮겨가는 하나의 징표로 읽기도 한다.

아담은 리스트를 모차르트처럼 만들고 싶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모차르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전 유럽을 돌면서 공연으로 막대한 돈을 벌 것을 기대했다. 기대는 적중했다. 8살에 작곡도 시작한 그는 12살에 파리, 런던까지 휩쓸며 승승장구했다.

영국의 모닝포스트지는 "거장 리스트의 연주를 제대로 다루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무력해지고 말았다"라고 평했다. 탄탄대로를 걷던 리스트에게 제동이 걸린다. 그의 매니저였던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돌연 사망한 것이다. 리스트 나이 16세였다.

피아노 리사이틀 처음으로 마련한 리스트
 

▲ 13세의 프란츠 리스트(프랑수아 르 빌랑, 석판화) ⓒ 위키피디아


리스트는 이제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연일 달려온 무대 생활에 지쳐 있던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상류층 자제를 상대로 피아노 교습을 했다.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제들은 넘쳐났고, 리스트는 그중 한 명과 사랑에 빠진다.

혈기 왕성한 사춘기 소년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 상대는 프랑스 무역부 장관의 딸인 카롤린 드 생크리크였다. 카롤린의 아버지 반대에 부딪혀 그녀와 헤어진 리스트는 절망했고, 이로 인해 한때 수도사의 길을 깊이 고민한다.

1827년경 파리에 정착한 리스트는 전 유럽에서 몰려든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평을 넓혀갔다. 특히 그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친 음악가가 셋 있었으니 파가니니, 쇼팽, 베를리오즈였다.

1831년, 파가니니의 파리 데뷔 무대를 본 리스트는 충격에 휩싸인다. 당시 파가니니의 무대를 보고 충격받지 않은 음악가는 거의 없었다. 리스트는 그 자리에서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리라' 결심한다.

파가니니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루머가 돌 정도로 귀신같은 연주 실력을 뽐내며 전 유럽을 파가니니 열풍에 빠트렸던 인물이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카프리치오를 피아노로 편곡했고, 파가니니 대연습곡도 만들었다. 파가니니 대연습곡 3번이 우리가 잘 아는 '라 캄파넬라'다.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의 주제 선율로 만든 작품으로 '라 캄파넬라'는 종이라는 뜻이다. 마치 종소리가 귓가에 울리듯 듣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곡이지만 높은 난도로 연주하기 어려운 곡이다. 리스트는 자기가 만든, 오로지 자기만 연주할 수 있는 까다롭고 화려한 곡을 선보여 관객을 흥분시켰다.

그전까지 피아니스트들은 다른 예술가들과 합동 무대를 보여주는 형식이었다면, 야심만만 우주 대스타 리스트는 오로지 혼자 그 무대를 다 채울 생각을 한다. 1840년, 6월 9일, 리스트는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에서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다. '리사이틀'은 원래 시나 성서를 낭송한다는 뜻인데 피아노를 낭송한다니. 리스트는 피아노 리사이틀을 역사상 처음으로 연 연주자다.

이렇게 잘생기고 피아노를 매력적으로 치는 남자에게 사랑은 늘 대기 중이었다. 리스트의 아버지가 리스트에게 '넌 여자만 조심하면 모든 일이 잘될 것이다'라고 한 유언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었다. 베토벤도 유독 남자가 있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리스트도 번번이 유부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

1833년, 리스트에게 운명의 번개가 내리쳤다.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을 만난 것이다. 마리 다구는 15살 연상의 남편과 어린 자녀가 둘 있었다. 마리 다구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 글을 썼는데, 예술적으로 이야기가 통했는지, 다음 해에 둘은 연인이 되었다.

마리는 이혼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한 둘은 스위스 제네바로 떠난다. 12월에는 둘 사이 첫째 딸 블랑딘이 태어났다. 이곳에서 리스트는 작곡에 몰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리가 그리워졌다. 게다가 파리에서는 지기스문트 탈베르크가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고, 이 소식을 들은 리스트는 자극받았다.

한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는 법. 리스트는 파리로 돌아온다. 리스트와 탈베르크는 크리스티나 벨지오조 소트리불지오 공주의 살롱에서 언론의 떠들썩한 기대감 아래 양보할 수 없는 경연을 치르게 되는데...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리스트, 그 삶과 음악>(말콤 헤이스 지음/ 김형수 옮김. 포노)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헤럴드 C. 손버그 지음/ 김원일 옮김. 출판사 클)
<피아노의 역사>(스튜어트 아이자코프 지음/ 임선근 옮김. 포노)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이채훈. 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인천 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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