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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시간 인도 기차 꼬리칸에서 살아남기

[스물셋의 인도] 기차 안 메뚜기 신세도 모자라 물갈이까지

등록|2020.06.21 15:21 수정|2020.06.21 15:31
19세에 처음 인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여행기는 지난해 2019년 8월, 인도에 두 번째 방문했을 때의 내용으로 작성되었습니다.[기자말]

▲ 스무 시간 기차여행의 시작점인 뉴 알리푸어다르역 ⓒ 이원재


그러니까 내가 가진 티켓은 좌석이 확정된 티켓이 아닌 대기표였다. 인터넷을 통한 기차표 예약은 오직 인도인만 할 수 있다는 얘기에 호스텔에서 만난 인도인 스태프의 손을 거친 게 화근이었다. 어쩐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싶더니, 좌석번호가 나오지도 않은 티켓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전에 좌석번호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다.

기차역 직원과 옆에 있던 인도인 남자의 말에 의하면, 내가 가진 티켓은 열차에 탑승한 후 차장이 검사한 후에도 좌석이 없으면 자동으로 환불되는 티켓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환불이 되면 푯값은 인도인 스태프의 지갑으로 들어가고, 나는 웃돈을 더 주고 다른 등급의 객실로 가야 한다는 거였다.

에어컨이 나오고 담요도 주는 한 단계 상위등급인 3AC는 갈 형편이 안 되고, 남은 건 무조건 제네럴 뿐이었다. 제대로 된 좌석도 없이 입석으로 가야 해서 사람이 많으면 선반 위라도 올라가야 하거나, 그마저도 화장실이라도 한 번 갔다 오면 고스란히 뺏겨버리는 그런 제네럴. 그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으며 웬만하면 피하고 싶었다.
   

▲ 침대가 있는 객실 중 등급이 가장 낮은 SL칸, 여행자들은 보통 이 칸에 몸을 싣는다. ⓒ 이원재


우선 여행자들이 일반적으로 타는 SL칸에 들어간 다음, 사람이 그나마 없어 보이는 한적한 칸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너른 곳으로 가 간단한 상황설명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 내가 앉을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아있거나 누워있던 이들은 대부분 대기표를 가진 이들이었다는 것을. 지정된 좌석이 있을 땐 그런 이들을 보고 화도 내고 정색도 하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 처지가 되었다.

다음 정차역은 좀 큰 역이었는지 하얀 옷을 입은 무슬림 일행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다. 여느 인도인처럼 내가 먼저 앉았으니 내 자리다 할까 하다가도, 그랬다간 쪽수에 밀릴 게 빤해 조용히 일어나기로 했다.

실제로 인도인들은 자신의 자리에 누군가 먼저 앉아있으면 비어 있는 다른 자리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런 '국룰' 탓에 지정된 좌석이 적힌 티켓을 가진 외국인 여행자와 그렇지 않은 인도인 간의 실랑이가 일어났던 거였고.

하지만 저들은 세 명이고 나는 한 명이다. 조용히 일어나 사람들이 다 앉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빈 자리에 조용히 앉음이 맞다. 그래 봤자 처음 앉았던 자리에서 멀지 않은 자리였지만.

급행으로 가는 열차였는지 다음 정차역은 여기서 세 시간 거리였다. 지금이 오후 10시를 넘겼으니 다음 역에는 새벽 1시에 설 거다. 부탄으로 가던 지난 밤에도 기차에서 보낸 탓인지 피곤함이 쏟아지는 건 당연한 일, 염치 불고하지만 배낭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기로 했다.

세 시간 뒤에 내 자리에 앉을 이가 온다면 나를 깨울 것이다. 아무리 비어 있는 자리로 가는 게 일반적이라 해도, 모두가 자리를 깔고 누운 상황이라면 당연히 깨우는 게 맞다.
 

▲ 기차는 이름 모를 간이역에 하염없이 멈춰섰다. ⓒ 이원재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뜰 무렵인 오전 6시쯤, 불안한 마음에 중간중간 몇 번 깨긴 했지만, 군에서 불침번을 자주 섰던 경험 탓인지 깨어남과 다시 잠듦은 익숙했다. 자리엔 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젊은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이제 자리를 비워야 할 때가 왔나 싶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리지 않음에도 또 다른 남자가 와서 앉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내가 있던 자리는 그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돌보기 위한 공간이었던가.

기차는 속도를 늦추다 서길 반복한다. 기차가 시속 100km/h 이상으로 달릴 땐 행복하다가도, 다시 속도를 늦추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 마주 오는 기차를 비켜줄 때면 다시 우울해졌다.

언제 쫓겨나 다른 자리로 이동하거나 아예 다른 칸으로 갈 수 있다는 불안감, 기차에서 밤을 보내고 해가 중천에 뜨도록 나타나지 않는 차장. 하지만 그보다도 나를 지치게 만드는 건 모든 기차는 정해진 정차 시각이 있다는 거였다.
  

▲ 기차에서 바라본 인도인들의 일상 ⓒ 이원재


당연한 이야기지만, 모든 기차는 정해진 정차 시각이 있다. 그 말인즉슨 기차가 역에 일찍 도착하면 정해진 출발 시각을 맞출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거였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 인도는 항상 늦게 오고, 기차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거였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지금 있는 곳에서 200km 떨어진 목적지 바라나시역까지 6시간 정도 걸린다고 나와 있는 걸 보면, 애초에 시간 조정을 길게 설정한 것 같았다. 그렇다 보니 큰 역에는 한 시간씩 정차하고, 교행할 수 있는 간이역에서는 하염없이 대기해야 했다.

그래 여긴 인도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한국 사회와 다르게 여긴 모든 것들에 관대해 흐르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두는 곳.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건 순전히 물갈이 때문일 거다.

인도 여행을 하면 한 번쯤은 찾아오고, 한 번쯤은 예상했어야 할 물갈이를 기차에서 맞이할 줄이야. 보통 장거리 기차에 오를 때면 전날 저녁을 먹지 않거나, 큰일을 유발하는 음식은 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피하지 못한 걸 보면, 기차에서 파는 밀크티나 물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쓰는 것도 잠시. 정해진 목표지점이 다가올수록 인내의 끈은 점점 짧아지는 법, 게다가 이제 곧 정차하는 역은 바라나시가 서울역이라 치면 영등포쯤 되는 역이었다. 릭샤와 같은 웬만한 교통수단으로도 충분히 숙소까지 닿을 수 있는 곳, 하지만 기차로는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는 말에 바로 내리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합승 지프를 탈 수 있는 등 가는 방법은 많아 보였다. 역 밖으로 나오니 합승 지프는 아니지만, 바라나시 시내까지 가겠다는 합승 릭샤가 보였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바라나시, 열아홉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라나시. 과연 스물셋의 나는 이곳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 무갈 샤라이역. 바라나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 이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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