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아이와 함께 죽여달라" 죽음 예감한 젊은 부부의 마지막 소원

[인터뷰]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펴낸 신기철 소장

등록|2020.06.21 18:50 수정|2020.06.21 18:54

▲ 신기철 ⓒ 신기철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80년대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당시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일컫는 'SKY' 졸업자는 대기업에 지원만 하면 '무조건' 입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구로, 영등포 지역 공장에 노동자로 취업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경기도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이때 한국전쟁기 고양 금정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민간인학살 사건을 만나면서 그는 국가범죄, 전쟁범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인연으로 그는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조사관과 조사팀장으로 일했다. 필자는 당시 그를 소중한 '직장동료'로 만났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그는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학살희생자 유해안치와 학살현장의 보전 등 평화공원조성, 진실위의 후속조치를 이행하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신기철은 특히 한국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의해 "적"으로 취급당했다는 사실과 민간인학살 사건을 전투 중 승리로 미화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신기철은 지난 2010년 진실위가 이명박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후에도 지속적으로 민간인학살에 관한 연구를 하며 아래와 같은 책을 펴냈다.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시간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등. 그리고 지난 2018년 그는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으로 '임종국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 그는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를 펴냈다. 이 책은 인천부근 '옹진군'에서 자행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일주일간 저자와 이 책과 관련해 인터뷰한 내용을 싣는다.

"옹진군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안 된 이유? 그들의 단결력 때문"

- 왜 수많은 지역사 중에 북방한계선에서 가까운 인천 부근 옹진 7개면과 각 도서 지역사에 대한 연구하게 된 것인가?
"지난 2010년 진실위 종료 이후 나름대로 조사를 계속해왔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민간인학살 사건을 종합한 뒤 한국전쟁사를 다시 검토하던 중 2018년 여름 이 책 출판사로부터 옹진 도서지역 한국전쟁 전후사 구술조사를 제안받았다. 이 출판사는 30여 년간 지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곳으로 옹진군으로부터 군지기획을 의뢰받았고 그 중 현대사 일부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지역에는 지난 진실위가 조사했던 영흥도와 덕적도가 포함되어 있어서 나로서는 적절한 시기에 꼭 해보고 싶었던 작업이었다. 비록 70년이 다 지나 얼마나 기억이 남아 있을지 염려되었지만 그래도 섬의 특성상 원래의 기억이 잘 보전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했다. 또 백령도는 천안함 사건 발생지역이기도 했잖은가. 바다여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분단선 같지도 않은 분단선 때문에 고통을 많이 겪은 곳이어서 궁금한 것이 많았다."
   

▲ 책표지 ⓒ 신기철


- 해방 이후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옹진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도 그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편의상 옹진군은 백령, 대청, 연평, 신도 등 이북에 근접한 도서지역과 덕적, 이작, 영흥 등 인천 남부지역으로 구분하게 되는데, 북쪽 도서지역은 동키(Donkey)부대가 상징하듯이 전선지역이 갖는 억압이 심한 곳이고 남쪽 도서지역은 인천상륙작전의 허세가 주민피해를 가리고 있었다. (동키부대는 1951년 초 미 태평양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황해도 등 이북 피란민 출신으로 구성되어 1954년까지 활동한 첩보부대다). 반공주의의 진짜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가 알려지면 안 된다는 그들만의 단결력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사실 그래서 이 책 원고 초안이 옹진군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 책이 출간된 배경이기도 해서 뭐라 비난하긴 곤란하지만, 지금도 전쟁 시기 지역주민들이 겪은 피해를 반공주의나 국가주의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계자들이나 반대자분들을 보면 많이 안타깝다."

- 이 책을 쓰기 위해 지역주민과 면담한 기간은? 또 면담한 지역 주민들은 전부 몇 명이고 어떤 분들인지?
"기초조사를 시작한 때는 2018년 8월이었다. 그해 11월, 다리가 놓여 쉽게 방문할 수 있었던 영흥도부터 조사하기 시작해서 2019년 1월 말까지 3개월 동안 105명의 주민을 면담할 수 있었다. 주로 노인회장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를 겪으신 고령자를 탐문해서 만났다.

이전에 이미 조사연구자나 인터뷰를 요청한 방송국 직원들이 많았었는지 만난 노인회장님들이나 소개해 주신 노인들께서 시원스럽게 잘 대응해 주셨다. 노인들께서 예상하셨던 질문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는데도 별로 당황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무작정 경로당을 찾아간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말씀을 해주셨다. 사실 전방지역이라 소극적이지 않을까, 경계를 많이 하지 않으실까 염려했었는데 그건 내 편견에 불과했다."

'아기와 함께 죽여 달라'던 부부

- 지역주민들과 면담을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우를 몇 가지 소개하면?
"백령도 당개를 조사하면서 겪었던 일인데, 교원으로 계시다가 퇴직하신 뒤 역사해설사를 하신다는 60대 중반의 주민께서는 당개에서 주민들이 많이 학살당해 땅에서 핏물이 흘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가해자는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그랬다면서. 그런데 그 마을에 살던 주민들의 증언은 전혀 달랐다.

불과 두 달 인민군 점령기에 활동했다는 이유로 수복한 군인들에게 당개에서 총살당한 주민들은 20명 정도였다. 희생자 중 젊은 부부가 있었다고 한다. 부부슬하에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남편은 부모가 없는 어린 아기 혼자 살 수 없을 것이니 함께 죽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부역한 사람들이 그렇게 독한 사람들이었다면서 하신 말씀이었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앞두고 자식의 미래를 생각하는 젊은 부부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다. 구술인께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몸소 내게 학살 장소까지 알려주셨다. 꼭 기록에 남겨달라고 하시면서.

경로당에서 만난 또 다른 구술인은 당개에서 나온 유골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했다. 약에 쓴다고 당개에서 유골을 캐서 집으로 가져온 한 주민이 있었단다. 그런데 그날 밤 온 집안에 서늘한 기운이 퍼져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단다. 너무 무서워서 바로 내다 버렸다는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다고.

여기에서 대략 300미터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서 두 청년이 후퇴하던 좌익인사들에게 총살당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한 사건은 감히 말하지 못하고 또 다른 사건만 지역 주류사회의 집단기억에 남은 것으로 보였다."

'범죄행위 합리화하고 전공으로 미화'한 해군
  

▲ 영흥도 사진 - 이작전이 끝난 뒤 클라크 첩보부대가 상륙했다. 이들이 팔미도 등대와 인천 해안가를 정찰했다지만 그 옆에서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있었다. 기념비 옆에 있는 휴게시설이 바로 그 장소이다. ⓒ 신기철


- 이 책을 쓰는 작업을 하면서 "공식적인 국방부 사료에 기재된 (한국전쟁) 당시의 전황이 (피해자) 구술 증언들로 파악된 전황과는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했는데, 특별히 주로 어떤 점들이 달랐는지? 그리고 달랐던 이유는 뭘까?
"대표적 사례로 국방부 공식 역사서인 <한국전쟁사>에는 해군의 이(李) 작전을 통해 영흥도와 덕적도의 인민군을 소탕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주민들은 당시 섬에 주둔하던 인민군은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소총을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없었다고 했다. 상륙 해군에 대한 무력 저항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해군의 입장에서 이렇게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자신들의 주장에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합리화함과 동시에 이를 전공으로 미화시키려는 사악한 의도가 숨어있었겠다. 이런 의도는 그들이 죽고 없어진 지금도 여전히 그 후배들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 인천상륙작전시 옹진 남부에 상륙한 해군들 때문에 인민군이 아니라 주민들이 죽었다고 했는데 왜 우리 해군에게 인민군이 아니라 주민들이 희생된 것인지?
"이(李) 작전이 시작되던 1950년 8월 16일 문갑도, 덕적도, 이작도, 영흥도에는 주둔하던 인민군이 없었다. 인민군이 없었다는 사실은 주민들의 증언뿐 아니라 작전을 지휘했던 이희정 사령관 스스로도 증언을 통해 확인된다.

한편 <한국전쟁사>는 모두 '적'을 사살했다고 적고 있다. 덕적도에서는 26명, 대이작에서 7명, 영흥도에서 6명의 '적'을 상륙하면서 사살했다는 것이다. 지난 진실위의 조사와 이번 조사결과를 종합하면 문갑도에서 교사 김종철, 덕적도에서 임산부 등 26명, 대이작도에서 8명, 영흥도에서 100여 명이 당시 목숨을 잃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란민 등 민간인에 대한 미군의 공식적인 입장이 드러난 때는 1950년 7월 말과 1951년 1월 초였다. 앞의 시기는 낙동강 전선이 구체화되기 시작하던 때였고 뒤의 시기 역시 경기 남부, 강원 남부에서 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극심한 미 공군의 폭격피해가 발생한 때다.

1950년 7월 25일 대구에서 모인 미군지휘부와 이승만 등은 '피란민들은 전선을 통과할 수 없다'라는 결정을 내린다. 작전지역 내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을 합리화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미 그 전부터 작전지역 내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잘 보여주지만 이 회의 직후 발생한 피해가 바로 '영동 노근리사건'이었다.

옹진에서 1950년 8월 16일부터 시작되었던 이(李) 작전 민간인학살 피해는 바로 그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1950년 8월 17일 경남 통영에서 있었던 국군 해병대의 상륙작전피해, 같은 시기 완도 등 전남 도서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공격에서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민간인학살, 정말 오발이었을까?

- 해군의 옹진 북부 상륙과 학살에 대한 내용 중에 "정말 오발이었을까?"라고 묻는 질문이 있다. 해군이 그럼 오발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민간인학살범죄가 사실로 드러났을 때 가해자 집단이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다. 오발 즉 실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살해당해 더 말을 하지 못하는 반면, 가해 사실을 입증할 목격자나 증거가 없었을 때 어느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살해했다고 할까? 온갖 상상을 통해 변명할 것이다.

북도면 장봉도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부역 혐의로 잡혀 온 한 청년의 모친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등불이 넘어졌고 해군은 얼떨결에 총을 당겼다고 했다. 그래서 청년과 모친, 두 분 모두 사살당했다. 등불이 꺼진 어두운 창고에서. 또 다른 사건에서는 실탄이 장전 된지 모르고 배를 찌르다가 총알이 나갔다는 건데, 학살사건에 대한 전형적인 사후합리화라고 할 수 있다."

- 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 시기에 옹진군 대부분의 섬에 인민군이 주둔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해군의 섬 상륙 이후 인민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덕적군도와 영흥도의 주민들이 공격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왜 해군은 이 지역주민들을 공격했다고 보나?
"미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다며 먼저 첩보부대를 투입하려 했다. 해군은 이들 미군 첩보부대의 안전을 위해 작전지역 내 주민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나는 덕적군도 등 섬 주민에 대한 해군의 시각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나 미군 지휘부의 시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군과 이승만은 1950년 8월부터 수복 후 부역자 처리를 준비했고 9월에는 구체적인 지침을 공문으로 지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1950년 9월 16일과 18일 '부역자를 단호히 처단하겠다, 공개총살 하겠다.'는 협박성 기자회견을 열었다. 9월 22일에는 '공산당이었다면 부모형제 간이라도 처단하라'고 했다. 수복지역을 바라보는 해군의 태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이들은 자신들이 방위하지 못해 국민들이 적의 손에 넘어간 것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
  

▲ 기념비 - 뒤로 보이는 소나무 숲에서 임산부 한상열이 출산의 고통을 겪던 중 학살당했다. ⓒ 신기철


- 책에서 "덕적도 밧지름 해안에 세워진 '해병대 상륙장소' 기념비는 참으로 역설적인 표지가 아닐 수 없다"라고 탄식했는데 왜 그 기념비가 역설적이라고 생각하나?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 바로 주민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기 때문이라서 그렇다. 화강암으로 전쟁을 영원히 찬양하겠다며 세운 기념비지만 결국 상륙해군의 민간인학살 행위를 영원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리에서 학살당한 임산부 한상열 등 5명의 죽음이 더 기억될 것이고 전쟁의 허구성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 전쟁이 끝난 뒤 이 지역주민들이 겪은 주요 갈등과 후유증을 몇 가지 소개하면?
"옹진군은 이북과 맞닿은 곳이다. 분단 초기부터 여기가 남인지 북인지 구분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던 곳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에는 바로 앞바다 건너 이웃의 땅이 이제는 갈 수 없는 적의 땅이 되어버렸다.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과 북의 경계가 없었지만 조기든 꽃게든 더 잡으려 했다가는 납북어민이 되어버렸다. 태풍을 잘못 만나도 그랬고. 조작간첩사건도 많이 벌어졌다. 그 후유증은 오늘도 벌어지는 탈북단체의 삐라소동이 잘 보여준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행위에도 생존을 위협받는 큰 상처를 당하는 분들이다."

- "인민군 점령기의 가장 큰 부역죄는 좌익사상과는 무관하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에 동원된 청년들"이라고 했는데, 왜 이 청년들이 가장 큰 부역죄를 범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인지?
"우리는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사회의 보수를 지지한다는 사람들이 참교육을 이루자던, 아주 소박하기만 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지켜보았다. 심지어는 대법원까지 동원해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전락시켰고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공격은 사실 한국전쟁 당시에 가장 심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체포해 보복 학살하기가 가장 쉬운 상대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전쟁행위 자체가 가장 비열한 행위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저질러지는 교육자들에 대한 공격 역시 정말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 이 책을 다 쓰고 나서 드는 아쉬움이나 앞으로 과제가 있다면?
"사실 이 책의 원고는 옹진군에 납품하기 위해 쓰였으므로 처음부터 발간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난 진실위의 조사결과를 옹진군의 지역사에 반영함과 동시에 한 지역 모두를 살펴볼 수 있는 첫 기회였으므로 적극 참여했다. 2년 전 당시로서 이제 더 이상의 기회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니 옹진 도서의 이방인이었던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미련은 남는다. 조금이라도 더 자료들을 섭렵했으면 더 세밀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얼마 전까지 전남 화순군을 조사했다. 그때 옹진군의 조사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코로나19로 힘들게 작업했지만 그래도 초기였기 때문인지 염려했던 것보다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내가 옹진을 조사하면서 얻은 결론은 화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군인들의 것이지만 전쟁의 피해는 민간인들, 지역주민들의 것이었다는 결론이다. 군인들의 죽음 역시 시민사회에 속해있던 민간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