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만 했을 뿐인데, 9시 뉴스에 나왔습니다
[서평] 어느 레즈비언 커플의 지극히 평범한 결혼기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너무 잘 맞는 사람을 만났다.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결혼 전 사계절을 겪어본다'는 '국룰'도 깨고 몇 달 만에 프러포즈를 했다. 둘은 뉴욕에서 먼저 결혼했다. 서약식에서 반지를 나눠 끼고, 혼인증명서를 받았다. 브루클린 다리에서 스냅 사진을 찍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몇 달 뒤 서울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식장은 새 부부의 탄생을 축하하는 친구와 친지들로 가득 찼지만, 서울에선 '정식' 부부가 아니다. 구청이 이들의 혼인신고를 불수리했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수리할 수 없는 동성간의 혼인임.' 그게 혼인신고가 불수리된 이유였다.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겉표지 ⓒ 위즈덤하우스
6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평등법 또는 차별금지법)' 제정 의견을 제시했지만, 아직 한국 사회가 갈 길은 멀다.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에 '성적 지향'을 포함하는 것조차 13년째 제자리걸음인 사회에서 '동성혼 법제화'는 넘을 수 없는 큰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하는 김규진씨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사회는 변한다"고 말한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는 제목 그대로 그가 그의 배우자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상견례 자리를 위해 홍삼을 준비하는 등 여느 커플과 다름없는 결혼 준비였지만, 동성 결혼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순간들도 찾아왔다. 하지만 사람들의 의식은 법보다 앞서 있었다.
어느 업체에서도 우리에게 무례하거나 불쾌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동성 결혼은 처음이지만 드레스가 둘이니 도전정신이 든다는 웨딩드레스숍 직원도 있었고, 그냥 월급 받는 직원인데 뭐하러 손님을 거절하고 막겠냐는 웨딩홀 지배인도 있었다. 서비스 제공자로서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모두 따뜻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99쪽
그렇게 남의 결혼식에 갈 때마다 선망했던 '공장형 결혼식'을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마쳤다.
가족과 회사도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신혼여행 휴가와 경조금 신청에 조심스러웠던 그에게 부장님은 '규진씨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청첩장만 첨부하면 된다'며 승인할 테니 기안을 올리라고 말했다. 동성애자라고 해서 '다른 증명'은 필요 없었다.
몇 시간 후 인사팀 담당자의 '결혼 축하' 메시지와 함께 기안은 결재됐다. 6일의 휴가와 경조금 50만 원을 받고 울던 규진씨를 오히려 회사 동료들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혜택'이라며 달랬다.
SNS에 관련 소식을 올리자 8000여 명의 사람들이 공유하며 축하해줬다. 언론사 인터뷰도 여러 건 했다. 그의 말마따나 "결혼 좀 했을 뿐인데 9시 뉴스에 나왔다". 규진씨의 결혼 기사 이후 또 다른 레즈비언 커플이 자신의 회사로부터 신혼여행 휴가를 받기도 했고, 그처럼 결혼을 하기 위해 프러포즈 반지를 산 커플도 있었다.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 freeimgaes
물론 그의 결혼이 꽃길만 걸은 건 아니다. 아직 부모님과 풀어야 할 숙제도 남아있다. 하지만, 결혼 전 상견례 때 그의 아버지가 건넨 말에서 관계의 희망을 본다.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104쪽
한편, 6월 29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발의했다. 정의당 의원 6명과 더불어민주당 의원 2명, 기본소득당과 열린민주당 의원 각각 1명이 동참해 발의에 필요한 의원수 10명을 채웠다. 지난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 입법으로 발의된 이후 13년 동안 6번 발의와 폐기를 거듭한 차별금지법은 21대 국회에서 제정될 수 있을까. 차별금지법은 문재인 대통령이 2012년 18대 대선 때 내건 공약이기도 했다.
규진씨는 앞서 6월 14일 정의당이 국회에서 연 '21대 국회 차별금지법 제정 추진 기자회견'에 참여해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차별금지법은 우리 모두를 차별로부터 보호하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한 채 누군가를 차별하는 걸 막아주는 법안"이라며 법 제정을 호소했다.
'하루하루 작은 차별과 혐오와 싸워나갈' 거라고 다짐하는 규진씨의 마지막 꿈이 이뤄지길 바란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레즈비언 할머니 부부는 드디어 건강보험료를 같이 낼 수 있게 됐다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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