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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만의 인사 "우리 엄마한테 밥을 주셔서 감사해요"

[책이 나왔습니다] 한국전쟁 피란민에 관한 그래픽 노블 '건너온 사람들'

등록|2020.07.10 16:39 수정|2020.07.10 16:39
"흥남까지 가는데요."

버스에 올라타며 내 입으로 밝힌 행선지가 어색해 흠칫 놀란다. 일 년 남짓 흥남부두를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한국전쟁 피란민에 관한 만화를 그렸고, 지난해 12월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단행본으로 직접 출간했다.

[관련기사 : 여자들만 아는 전쟁의 또다른 모습]

토대가 된 이야기를 전해준 엄마의 고향도 같은 흥남이다. 하지만 이렇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갈 수 있는 장소'로서 말해 본 것은 처음이다.

70년 전, 피란민 공간 속으로 들어가다
 

▲ 한국전쟁과 피란민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노블 <건너온 사람들> ⓒ 홍지흔


부산 시내에서 출발한 버스는 바다를 건너 거제 땅으로 들어섰고 함경남도가 아닌, 경상남도 거제시 흥남마을 입구에 멈춰 섰다. 정류장 위쪽 가파른 언덕에 목적지인 서점이 보였다. 출간 준비가 끝날 즈음 책을 거래할 만한 곳을 살펴보다 인터넷에서 거제도의 독립서점 겸 카페 하나를 알게 됐다.

이북의 흥남과는 아무 상관없지만 같은 이름의 동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큰 창과 단정한 서가. 메일이나 전화로 입고 문의를 해도 되지만 왠지 직접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곳이다. 갑작스레 부산에 방문할 일이 생겨 주저없이 이곳을 일정에 넣었다.

서점이 문을 열기까지 시간이 꽤 남아 있어 해변가를 천천히 걷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햇살이 뜨거웠고 구비진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차 때문에 걷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칠십 년 전에도 이 길로 많은 사람들이 다녔다. 외가 식구를 포함한 수만 명의 피란민이 거제도 남단 항구에서부터 며칠씩을 걸어 각 곳의 수용지에 도착했다. 열 살이 조금 넘은 나의 엄마와 또래 이웃 아이가 배급 쌀이 떨어져 어느 부잣집에 보리쌀을 얻으러 간 것도 이 산간도로를 통해서였다.
 

▲ <건너온 사람들 / 홍지흔 > 본문 중에서 ⓒ 홍지흔


내가 지금 향하는 곳이 그 집이 있던 자리다. 당시 지내고 있던 북서쪽 장목에서 흥남을 거쳐 약 10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다고 한다. 내 발걸음 위에 두 아이의 허기진 배와 검정 고무신의 불편함을 올려 상상해 본다.

정확한 비교는 아닌 것 같다. 나는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과거의 발자취를 따를 뿐이고, 그들은 마을에 다다른 후 이장님이 적어준 쪽지 한 장에 의지해 낯선 이들에게 양식을 빌어야 했으니까.

"우리 엄마한테 밥을 주셔서 감사해요"

멀리 '대통령의 마을'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길을 가로지르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는 외포리다. 코로나19 때문에 휴관 상태여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뒷골목 계단으로 올라가 기와지붕 아래 널찍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당시 거제에서 이름난 부자이자 김 전 대통령의 부모님이 살고 있던 이 집, 이 툇마루 어딘가에 엄마와 이웃 아이가 앉았을 것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군말 없이 쌀자루를 내주었고, 하인을 시켜 밥상도 차리게 했다.

큰 기와집과 푸짐한 밥상을 두고 기뻤을지, 기가 죽어 부끄러웠을지 칠십 년 전 두 아이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주인아주머니의 영정이 걸려 있는 처마를 향해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리 엄마한테 밥을 주셔서 감사해요.'

<건너온 사람들>의 주인공들은 기적의 배로 불리는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해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는 결말을 맞이한다. 엄마의 가족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거제도에 정착했고, 삼 개월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고단한 이방인의 생활은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이어졌다.

어릴 적부터 들어온 외가의 피란사는 만화를 그리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작품 소재인 동시에 어려운 숙제였다. 한동안 망설이다 지난해야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책이 나온 후 어른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열렬했다.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았다.

앞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두 분의 삼촌들, 사흘 전 부산에서 장례를 치른 큰 사촌 언니에게도 이 책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능력은 빠르게 흩어져가는 그들의 세월을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다시 흥남마을로 되돌아가기 위해 기념관 앞에서 버스를 탔다. 이십 분도 안 되어 내가 아침부터 걸어온, 칠십 년 전 두 아이가 걸었던 길이 끝났다.

한 권의 책이 된 '엄마와 가족들의 삶'

서점은 예상보다 많은 손님들로 밝게 북적였다. 음료를 주문하고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첫 정착지인 거제도에서 내 책이 소개된다면 외가 어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서점 사정에 따라 책은 이곳에 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책을 알리는 일은 만들 때 만큼이나 쉽지가 않아 고민이지만 정작 엄마나 삼촌, 이모들에겐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읽어주지 않아도 그들의 모든 것이 이야기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면 최선을 다해 살았던 매 순간의 흔적이 펼쳐진다. 전쟁의 바다를 건너온 아이들과 그 아이들 - 나의 형제와 사촌들, 먼저 세상을 달리한 사촌 언니, 그리고 지금 막 새로운 흥남의 서점에 도착한 나 역시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갈피마다 담겨 있을 것이다.
 

▲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흥남의 독립서점 ⓒ 홍지흔

  

▲ 책방에서 바라다 보이는 흥남마을의 풍경과 드로잉 ⓒ 홍지흔


나는 서점 주인에게 일과 관련해 묻는 것을 잠시 미뤄두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활짝 열린 통유리 문으로 바닷바람이 깊숙이 들어온다. 먼 옛날 크리스마스 오후, 푸른 물길 위로 만 사천 명을 태우고 왔던 화물선처럼 아득하게 배 한 척이 보이는 듯했다. 북쪽의 흥남을 출발해 칠십 년을 항해하던 엄마와 가족들의 삶이 책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 남은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미처 제 책을 전하지 못한 사촌 언니 E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추후 작가 개인 sns에 게재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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