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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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5캡 안에 들어가는 순위라고 해서 학교폭력이 나를 피해간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매일 맞으면서 나는 선생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봐야 돌아오는 말은 '친구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그 덩치에 쪽팔리게 맞고 다니냐?' 라는 말뿐이었을 테니까.
그때의 분위기가 그랬던 것 같다. 맞은 걸 어른들한테 이야기하면 어른들은 그 정도도 해결 못하고 일러 받치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은 고자질쟁이라면 손가락질하던 시절 이었다.
결국 그 어린 시절 철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딘가 분풀이를 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나보다 약한 아이들 중 까불거리는 아이 하나를 잡아서 학교 뒤로 끌고 갔다. 그 아이는 웃으면서 나한테 왜 이러냐고 이야기하며 어떻게든 피해가려 했지만 난 내가 당한 것처럼 그 아이의 배를 주먹으로 힘껏 쳤다. 웃던 그 아이는 배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 주저앉은 후에도 내가 더 때릴까 두려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웃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내가 그 녀석에게 맞아서 아팠던 기억보다 그 아이의 배를 때렸을 때, 뭐라 말할 수 없는 나쁜 느낌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누군가를 때렸다는 그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내 주먹에 닿았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각나서 나를 힘들게 한다.
그 다음 날, 나는 그 아이에게 사과를 한답시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쭈쭈바를 하나 사줬다. 하지만 아직도 후회가 되는 건 결국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가 1987년이었다. 지금은 2020년, 과연 학교는 변했을까?
내 딸이 다니는 학교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는 그런 작은 학교다. 그래서 방과후와 돌봄교실은 두 학년씩 묶어서 진행한다. 그곳에서 우리 딸이 한 학년 위의 오빠한테 배를 몇 번이나 걷어차이고 왔다.
동네가 작다 보니 딸을 때린 그 오빠도 잘 아는 집의 아들이다.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딸을 때리긴 했지만 그 아이가 밉다거나 혼내주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냥 폭력은 어떤 경우에라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 아이 엄마는 당연히 우리에게 미안해했고 사과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대처가 오히려 나를 화나게 하고 있었다.
딸이 맞은 걸 보고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 어른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고 그 어른은 자기가 지켜줄 테니 오빠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다고 한다. 딸은 무서워서 싫다고 했지만 그 어른이 잘 설득해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 맞는 걸 본 것도 아니고 딸이 얼마나 무서워했을지도 몰랐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어른은 그 일을 다른 책임 있는 선생님이나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딸과 대화가 없는 아빠였다면 내 딸이 그렇게 맞았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 어른의 생각은 그랬겠지.
'아이들이니깐 서로 싸울 수도 있고, 때릴 수도 있지~ 우리 때도 그랬잖아 그래도 지금 잘 살잖아~'
우리 때도 그랬으니 지금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무지한 생각인가. 내가 그 녀석에게 맞았던 건 국민학교 6학년인 1987년이었다. 그때는 군사독재가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6월민주항쟁을 통해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 시대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어떤 군인이 탱크를 몰고 서울을 점령하면 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할까?
이 세상에 그 어떤 이유로도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거나 신체를 구속하는 일은 벌어져선 안된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발전하는 인간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1987년의 우리처럼 살게 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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