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의 고향, 도로 위에 성한 차가 없는 이유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기 10] 마지막회, 이탈리아에서 귀감 삼을 만한 것들
이 기사는 지난 겨울,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럽을 덮치기 직전 한 달 동안 이탈리아에서 지낸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기자말]
뭘 쓸까.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들여다보면서 의미 없는 글자만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글을 쓰는 데는 시작이 반이고, 어떻게든 첫 문장만 써지면 그다음부터는 일도 아니라는 말을 실감한다. 이륙한 지 서너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채 한 시간도 안 됐다.
메모장의 도움으로 기억을 꺼내기는 틀렸다. 차라리 새로 메모하는 기분으로 그냥 쓰기로 했다. 빤한 주제이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여행을 다니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자문자답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에서의 한 달 살이를 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광장과 에스프레소의 나라 이탈리아
▲ 로마 포폴로 광장'민중'이라는 의미의 포폴로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자 각종 집회가 벌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 서부원
머리를 쥐어짜듯 고민해야 한다면 그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아닐 것이다. 질문하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놀랍게도 기다렸다는 듯 몇 가지가 떠올랐다. 지워질세라 부리나케 메모하는데, 정작 어느 곳엘 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선, 이탈리아 하면 광장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도시를 가든 광장이 있고, 그곳의 경관이 도시의 첫인상을 규정한다. 도시의 모든 기능은 광장으로 수렴되고, 광장의 수가 곧 도시의 규모다. 광장은 명실공히 도시의 중심이고, 이방인 관광객에게는 여행의 시작점이 된다.
이탈리아 여행은 광장에서 시작해 광장에서 끝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모든 볼거리가 광장 주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가 모든 길을 일러줄 테지만, 혹여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안내판과 건물 벽에 적힌 광장(Piazza)이라는 단어만 찾아가면 된다.
광장은 자유다.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모두 최대한 편한 자세로 공간을 만끽하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하릴없이 산책하는 사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있는 사람, 심지어 맨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까지. 특별히 제지하지도 않고, 서로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청년들, 비눗방울과 코스프레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그 와중에 시위를 벌이는 단체도 보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과 행위들이 뒤엉키는 곳인데도 나름의 공존의 법칙이 있다. 자리다툼을 하거나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에겐 애초 그런 광장이 없다. 대개 도시의 미관을 위한 관제 공간일 뿐, 사람들의 체취를 느끼기 어렵다. 광장이라는 명사와 만끽하다는 동사는 함께 사용할 수 없는 단어다. 외려 우리나라에서 광장이라고 하면, 행사와 동원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린다. 여튼 많이 부러웠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출근길 '시크한' 아침식사 모습도 강렬하게 남았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먹지 않으면 하루 일과가 힘든 내게 이탈리아의 아침 길거리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구경거리였다. 그들의 아침식사는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과 크루아상 한 조각이 전부였다.
가냘픈 몸매의 젊은 여성도, 덩치 큰 배불뚝이 중년 아저씨도 다들 그렇게 아침을 때웠다. 차분히 앉아서 먹는 이도 드물었다. 손님도 주인도 모두 익숙하다는 듯, 주문하고, 음식을 받고, 먹고, 계산하고 나가는 데 채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셋 중 한 명은 커피만 주문했다. 과연 아이들 소꿉장난 컵 크기의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허기가 달래질까. 고개를 젖혀 한입에 털어 넣은 뒤, 이어 입을 헹구듯 물 한 잔을 단숨에 들이키는 그들의 모습이 따라 해보고 싶을 만큼 근사해 보였다.
한편으론 조만간 이런 아침 풍경이 사라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개 남자고 여자고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고, 젊은이들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들은 에스프레소 대신 콜라를 마시고, 크루아상 대신 햄버거가 훨씬 익숙한 듯 보였다.
'바르(Bar)'의 이름을 내건 노포가 시나브로 맥도날드와 버거킹에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주인이 화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음식에 대한 자존심이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이탈리아라지만, 막강한 자본의 힘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새 차일수록 작은 차가 많은 나라
▲ 그라피티의 천국, 이탈리아공공건물의 벽, 기차의 외부, 광장의 바닥의 낙서는 기본이고, 도로변 잘린 가로수의 밑둥에다가도 조각을 해두었다. ⓒ 서부원
도시 곳곳을 마치 도화지 삼은 그라피티(Graffiti)도 인상적이었다. 우리 같으면 재물 손괴 혐의로 법적 처벌을 받거나, 최소 경범죄로 벌금을 물어야 할 낙서들이 지천이다. 건물 벽과 공공 게시판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중교통수단인 버스나 기차에도 버젓이 그려져 있다.
개중에는 정성을 들인 듯 세련된 작품도 있고, 정치적인 구호를 적은 것도 있지만, 그야말로 벽에 화풀이하듯 칠해놓은 게 대부분이다. 지방정부가 나서 지울 법도 하건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색이 바래 그린 지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라피티 아래에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설마 자수하듯 자신의 이름을 적었을 리는 없을 테고, 누구의 이름인지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신기한 듯 그라피티를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도 적지 않아, 지방정부가 묵인하는 게 아니라 권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라피티라는 이름이 '긁어서 새기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그라피또(graffito)'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억측은 아닐 듯하다. 하긴 비어 있고 버려진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감성은 분명 남다른 데가 있다. 밑동만 남은 가로수에까지 조각을 새긴 그들의 '예술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또, 빠뜨릴 수 없는 게 도로 위를 달리는 작고 낡은 자동차다. 주지하다시피, 이탈리아는 110여 년 역사의 피아트로 대표되는 자동차의 나라다. 자동차를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찬사를 받는 세계적인 명차, 페라리와 람보르기니의 고향이 바로 이탈리아다.
그런데, 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명차는커녕 새뜻한 차조차 구경하기 힘들다. 대부분이 우리나라 경차 크기의 작은 차이고, 그나마 족히 수십 년은 됐을 법한 낡은 차들이 거리낌 없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범퍼는 하나같이 긁혀 있고, 문짝도 성한 게 없을 정도다.
▲ 명차들의 고향? 소형차의 천국!람보르기니와 페라리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명차의 나라지만, 도로 위엔 온통 소형차뿐이다. 2인승 미니카가 유독 눈에 많이 띄는데, 크기가 워낙 작다보니 주차 방식도 가로 세로 자유자재다. ⓒ 서부원
도로가 비좁고 주차 공간이 제한된 탓인지, 새 차일수록 작은 차가 많다. 도로 위엔 흡사 성냥갑처럼 생긴 2인용 차량이 더 자주 눈에 띈다. 이탈리아엔 이면 도로마다 파란 색 실선으로 주차 공간 표시를 해놓았는데, 우리 같으면 한 대도 세울 수 없는 곳에 두 대는 기본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 이탈리아 사람은 대당 수억 원을 호가하는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대부분 '수출용'이라고 귀띔했다. 굳이 보려면 본사와 박물관이 있는 토리노와 모데나로 가야 한다는 거다. 하긴 구찌와 프라다도 정작 이탈리아보다 중국이나 한국에 가야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도심의 자동차 판매장에 전시된 차들도 대부분 소형차뿐이다. 큰 차는 수요가 많지 않다는 뜻일 게다. 과연 굴러갈까 싶은 낡고 오래된 차들이 많다는 건, 달리 생각해보면, 그만큼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다. 이탈리아에선 작고 낡고 오래된 차가 바로 명차다.
그런 차가 오가는 도로 위에서도 낯선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우선 건널목마다 신호등이 없는 곳이 많고, 신호등이 설치된 곳도 사실상 있으나 마나다. 사람도, 차도 신호를 지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녹색 신호를 기다리며 쭈뼛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중팔구 관광객이다.
신호등이 유명무실할 만큼 위험하냐면 절대 그렇진 않다. 비록 신호를 따르진 않아도, 건널목에 일단 보행자가 들어서면 무조건 차가 멈추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행인이 막 건널목에 들어섰는데, 반대편 차선을 달리던 차가 그 자리에 급정거하는 모습도 여럿 봤다. 이탈리아에서 도로에서의 서열을 매긴다면, 사람이 첫 번째고, 둘째가 자전거, 자동차는 맨 뒤다.
▲ 유명무실한 신호등?이탈리아에서 신호등을 지키는 차도 사람도 드물다. 하지만, 건널목에 사람이 들어서는 순간, 반대쪽 차선의 차일지라도 사람이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그대로 멈춰선다. 신호등이 굳이 필요 없을 듯도 하다. ⓒ 서부원
이탈리아에선 마시는 물도 놀라움을 주었다. 어느 나라엘 가든 해외여행 중 첫 번째 유의사항은 물은 반드시 사서 마시라는 것이다. 상수도 시설이 열악한 아프리카나 남미, 동남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건 위험하다고 강조한다.
안전성이 입증됐다는 우리나라에서도 식수는 사서 먹는 게 보편적인데, 하물며 외국에 나가선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수돗물을 그냥 받아 마셨다. 심심산골 약수터도 아닌, 도심의 한복판 수돗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식수통에 물을 받았다.
그들을 볼 때마다 부러 다가가 물어보았다. 마셔도 되는 물인지를. 그때마다 그들은 시답잖은 질문이라는 듯 '씨(Si, 영어로 Yes)'라는 외마디 대답만 던지고 돌아섰다. 산중턱에 자리한 아시시나 산마리노 같은 소도시뿐만 아니라, 심지어 로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일부 식당에서조차 수돗물을 받아다 손님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도시와 식당마다 천차만별이었지만, 1리터에 2~3유로의 금액이 영수증에 찍혔다. 밀봉된 PET병에 든 물을 달라고 요구하면, 되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꺼림칙해 숙소에 들어갈 때마다 마트에 들러 생수를 한 병씩 샀지만, 식당에서는 그들이 주는 대로 마셨다. 그렇게 한 달을 살면서도 다행히 배앓이는 하지 않았다. 원체 장이 약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수돗물에 별 문제가 없었다는 뜻이다. 괜히 우리나라 수돗물도 그냥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곳곳에 놓인 기념물... '기억'하는 이탈리아
▲ 도시 곳곳에 세워진 역사 기념물어느 도시를 가든 발에 치이는 게 역사 기념물이다. 아픈 역사에 대한 기억을 중시하는 그들의 심성을 잘 보여준다. 사진은 극우파의 테러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볼로냐 시내 작은 광장의 기념물이다. ⓒ 서부원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에서 한 달을 살며 가장 뚜렷하게 기억되는 건, 발에 치이는 기념물이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레지스탕스와 근래 발생한 테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물이 정말 많다. 하나같이 작고 아담하지만, 참혹했던 역사를 기억하려는 그들의 세심한 노력을 잘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한 정확한 시간과 역사적 의미 등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부터가 남다르다. 그 아래로 당시 희생자의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고, 이름만 새겨 기리는 것도 있다. 두루뭉술하지 않고 언뜻 시시콜콜하게 느껴질 만큼 상세한 건, 공동체에 또렷이 각인시키려는 뜻일 테다.
명색이 국가 기념물이라지만 결코 거대하거나 권위적이지 않다. 대도시의 광장에도 있고, 고작 수십 가구가 사는 동네 어귀에도 세워져 있다. 마치니와 가리발디 등 건국 영웅을 기리는 것도 있지만, 해당 지역 출신의 레지스탕스와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을씨년스럽지도 않다. 기념물마다 꾸준히 찾는 이들의 흔적이 있다. 방문한 단체의 이름을 적은 작은 화환이 세워져 있는 곳도 있고, 개인적으로 찾은 듯 작은 꽃다발을 놓고 간 경우도 있다. 극우세력이 활개 치는 현실에서 꿋꿋하게 견뎌내는 이탈리아 민중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인천국제공항에 착륙한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의 한 달 살이가 끝나간다. 비리가 만연한 곳이라거나 동양인을 대놓고 무시한다는 둥, 눈 뜨고 코 베일 만큼 소매치기 범죄가 일상이라는 식의 편견이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들로부터 정면교사 삼을 만한 게 적지 않다는 걸 느낀 시간이었다.
요컨대, 지금껏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너무 '띄엄띄엄' 봐왔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이탈리아는 기꺼이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한 번쯤 겪어볼 만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이탈리아가 그저 '조상 잘 만나 호강하는 나라'인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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