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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 보수학자와 진보스님의 '세기의' 대결

[김종성의 히,스토리 : 라이벌 열전 ①] 김부식-묘청의 '서경천도론'

등록|2020.08.04 08:41 수정|2020.08.04 08:41

▲ 세종특별자치시 정부세종청사. ⓒ 권우성


다른 나라 역사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라이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후대 역사에 천년 가까이 영향을 끼치는 두 라이벌이 있었다. 고려 전기에 살았던 묘청과 김부식이 바로 그들이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란 명제로 유명한 <조선상고사>의 저자 신채호는 1929년 논문집인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으로 불리는 묘청-김부식 대결을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서술했다. 최근 1천 년간 이것보다 더 중요한 대결은 없었다고 본 것이다. '세기의 대결' 정도가 아니라 '세기X10의 대결'로나 표현할 수 있는 거대한 의의가 '묘청의 난'에 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옮길 것인가 개경에 그냥 둘 것인가를 놓고 벌어진 이 대결은 단순히 도읍 소재지에만 영향을 주지 않고 오랫동안 정치·외교·종교·문화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채호는 "민족의 성쇠는 항상 사상의 추세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며, 사상의 추세가 좌가 되고 우가 되는 것은 항상 모종의 사건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며 이 대결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전쟁은 화랑·불교 대 유교의 싸움이고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고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이고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다.

옛날 한국의 승려들 중에는 선녀나 신선이 되는 수행을 하는 신선교(신선도·국선도)를 함께 믿는 이들이 있었다. 이 전통이 고구려 조의선인, 신라 화랑, 고려 재가화상에도 있었다. 불교 승려인 묘청이 여덟 신선을 모시는 팔성당을 건립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신채호가 묘청의 사상을 '화랑·불교'로 요약한 것은 석가의 가르침을 신봉하면서도 신선교를 버리지 않은 묘청의 '이중생활' 때문이었다.

신채호는 묘청을 화랑·불교·국풍파·독립당·진보세력의 대표로, 김부식을 유교·한학파·사대당·보수파의 대표로 규정했다. 신채호가 여기에 넣지 않은 게 하나 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덜 중요하겠지만, 묘청과 김부식의 시대에는 매우 중요했던 점이다.

포털 사이트에서 두 사람을 검색하면 묘청의 생몰 연도는 '? ~1135', 김부식의 연도는 '1075~1151'로 나온다. 가문이 혈연공동체뿐 아니라 기업·학교·정치집단까지 겸했던 이 당시에는, 규모가 있는 가문들일수록 출생 연도 같은 인적 사항이 기록으로 잘 보존됐다.

<고려사> 묘청열전에는 묘청의 인적 사항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출생 연도 같은 것을 적어둘 만한 가문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묘청이 서민층 출신이었음을 보여준다. 승려라는 점에서는 사회 지도층이었지만,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는 지위가 낮았던 것이다.

반면, 김부식은 신라가 망한 지 약 140년 뒤인 1075년에 출생한 신라 왕족의 후예다. 신라는 패전이 아닌 항복을 통해 고려에 편입됐다. 그래서 신라 왕족들은 고려왕조에서도 대우를 받았다. 그런 대우를 받은 김부식이 묘청과 대결했으니, 이 대결은 '귀족 대 하층민'이라는 의의도 띠었다.

두 사람이 서경 천도론을 놓고 맞붙게 된 근본 배경은 태조 왕건이 서경을 중시하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서경은 만대 왕업의 기지'라며 후대 군주들이 연간 100일 이상 서경에 체류할 것을 권고했다. 묘청은 이 유언의 실현을 추진하는 쪽이고, 김부식은 무시하는 쪽이었다. 두 사람이 대립하게 된 데는 이 유언 외에 또 다른 2가지의 배경이 작용했다.
 

▲ 고려 궁궐의 중심 공간인 회경전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2014.12.2 ⓒ 김종성


우선, 당시 군주인 인종(재위 1122~1146)이 개경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인종은 13세 나이로 왕이 된 데다 섭정을 해줄 어머니마저 없었다. 그래서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간섭에 시달리며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십팔자(十八子=李)가 왕이 된다'는 참언의 유행 속에, 인종은 이자겸한테 왕위를 빼앗길 뻔도 했다.

결국 인종은 1126년에 친위 쿠데타를 벌여 이자겸을 제거했다.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이런 경험은 인종이 개경이란 도시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구세력이 포진한 개경에서는 자기 뜻을 마음대로 펼 수도 없었기 때문에, 1128년부터 인종은 "개경의 왕업은 이미 쇠했습니다"라는 묘청의 외침에 급격히 빨려 들어가게 됐다.

인종의 심리에 더해 동아시아 국제정세도 한몫을 했다. 여진족의 급부상이 바로 그 원인이었다. 말갈족이란 이름으로 고구려·발해의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고려왕조에 사대하던 여진족은 예종(인종 아버지) 때인 1117년에 고려를 신하국으로 전락시킨 데 이어, 요나라와 송나라(북송)를 연달아 멸망시키고 1127년에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등극했다.

오리엔트권(북아프리카·중동·남동유럽)이 가장 강하고 동아시아가 그다음일 때였으므로, 여진족이 동아시아 최강이 됐다는 것은 이들이 세계 2위권 강대국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고려인들을 자극했다. 여진족에 대한 복수심과 경쟁심이 고려 사회에 번진 것이다. 이는 평양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서경 천도론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서경 천도론은 대논쟁을 유발했다. 묘청 진영은 '서경에 천도하면 36개국이 신첩을 자처할 것'이라고 외쳤다. 36국으로 상징되는 전 세계가 고려의 신하국이 될 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서경으로 천도해야 고구려 땅을 되찾고 금나라를 정벌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금나라와의 치욕적인 사대관계를 끊고 국제적 권위를 높일 수 있다고 선전한 것이다.

이에 맞서 김부식 진영에 포진한 유교 지식인들은 불가론을 개진했다. 묘청열전은 "지식인들은 다들 불가능하다고들 말했다"고 전한다. 기득권 세력인 개경파를 지지하는 김부식과 유교 지식인들은 고구려 고토의 회복보다는 금나라 패권의 인정을 주장했다. 금나라의 권위를 받아들이고 한반도 내에서 안정적인 국가를 유지할 것을 희망한 것이다.

하지만 군주인 인종은 서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는 묘청의 주장에 깊이 매료됐다. 그 주장도 주장이지만 묘청의 술법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묘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묘청열전은 묘청의 모든 술법을 허위라고 말하지 않고 '어떤 술법은 허위였다'고 말한다. 상당수의 술법에 대해서는 허위 입증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과 인종이 묘청한테 쉽게 빠진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

인종의 마음이 묘청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가운데, 서경 천도를 위한 작업들이 착착 진행됐다. 1129년에는 서경에 대화궁이 건설되고 인종이 준공식에 참석했다. 묘청은 궁궐 내부에 팔성당을 건립했다. 유학자들이 불교보다도 더 싫어하는 신선교 건물을 궁에 지었으니, 종교는 불교를 따를지라도 정치철학은 유교를 따르는 김부식과 개경파를 한껏 자극하고도 남았다.

혹평 받은 김부식의 정치와 묘청의 '혁명'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종이 천도 단행에 필요한 최종 결정을 유보했던 것이다. 사회 분위기는 서경파에 유리하지만, 기득권은 개경파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종이 개경파의 눈치를 봤던 것이다. 이 때문에 대화궁 준공으로부터 6년이 지나도록 인종은 최종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김부식과 개경파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인종을 흔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서경 천도론 자체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왕건의 유언도 있고 시대 분위기도 있고 해서 서경 천도 자체를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것은 곁가지를 흔드는 방편이었다.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묘청의 논리는 터무니없다'거나 '묘청의 초능력은 가짜다'라면서 인종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려댔다.

이에 대해 묘청은 전혀 다른 대처법을 내놓았다. 김부식 진영이 한 것이 '정치'라면, 묘청 진영이 한 것은 '혁명'이었다. 묘청은 김부식 진영의 입지를 끊기보다는 애초의 목표를 밀어붙이는 방향을 택했다.

인종이 시간을 질질 끌자 묘청은 인종의 결단을 촉구할 목적으로 서경에서 대위라는 국가의 수립을 선포했다. 그런 뒤 인종에게 대위국 황제의 제위에 오르라는, 협박장 같은 상소를 올렸다. 이 같은 국가 선포로 인해 황해도 중간쯤인 자비령 이북은 묘청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나쁘게 말하면, 조급증의 소치로도 볼 수 있는 묘청의 국가 선포는 결과적으로 재앙이 됐다. 이는 인종을 김부식 편으로 확실하게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종은 김부식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임명하고 진압책임을 맡겼다.

개경 북쪽인 평양을 공격하는 일을 평북(平北)이라 하지 않고 평서라 한 것은 이 시대 사람들이 함경도와 강원도 중간인 철령을 기준으로 방위를 정했기 때문이다. 철령 관문을 기점으로, 그 동쪽은 관동(關東), 북동쪽은 관북, 북서쪽은 관서로 불렀다. 이에 따르면 철령 북서쪽인 평안도는 관서가 되고 평양은 서경이 됐다.

진압군 사령관 김부식은 묘청 진영의 내부 분열을 유도했다. 본격 전투에 앞서 투항을 권유하는 선전전부터 펼쳤다. 이것이 주효해 정부군에 투항하는 성들이 늘어났고, 묘청 진영의 실무 책임자인 조광이 묘청을 암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개경파가 대가를 주지 않자 조광은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묘청이 없는 상태에서 1년 넘게 항전을 벌였다. 이 내전은 1136년에 서경파의 패배로 종결됐다.

이로써 김부식과 개경파가 수도 개경을 지키고 기득권을 유지하게 됐지만, 신채호는 이들의 승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김부식의 승리를 계기로 한반도 중심의 사대주의자들이 대대로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이 대륙의 기상을 포기하고 진취성을 잃게 됐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심대하다 하여 '조선 역사상 1천년 이래의 최대 사건'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묘청을 꺾은 뒤인 1145년에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한반도 중심주의를 확산시켰다. 흔히들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주의적 역사서라고들 하지만, 이 책에서 신라 중심주의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한반도 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태왕이란 칭호를 쓰고 황제국 면모를 과시하며 만주를 지배했던 대제국 고구려를 '왕' 칭호를 쓰는 일개 왕국으로 전락시켰다. 또 중국 역사서인 <송서>·<양서>·<남사>에서도 인정되는 백제의 요서(만주와 중국내륙 중간) 점령도 소개하지 않았다.

또 청나라 정부가 발행한 <만주원류고>에서도 인정되는 신라의 만주 길림 지배 사실을 누락시켰다. <만주원류고>는 '길림(중국 발음 지린)'은 신라를 가리키는 계림(중국 발음 '지린')에서 나왔다며 대조영의 건국 이전에 신라가 길림성을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신채호는 진흥왕의 정복 활동으로 길림 지배가 가능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렇지만 김부식은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 신라를 중심에 두는 것 같으면서도 신라의 만주 진출을 소개하지 않은 것은 삼국사기가 신라 중심주의보다 한반도 중심주의를 보다 더 상위에 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주장하고 한반도 중심주의를 선전하며 묘청을 제압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 문화재청


묘청이 국가를 선포하기 직전만 해도, 묘청에게는 일말의 기회가 있었다. 지식인들을 제외한 사회 여론은 묘청 쪽에 유리했다. 또 군주인 인종이 서경 천도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기득권층의 압력 때문에 최종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 인종은 서경에 궁궐까지 지어놓은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묘청이 조금만 더 준비를 했다면 서경 천도가 실현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랬다면 설령 천도가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묘청과 서경파가 그렇게 처참히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자주외교를 주장하는 세력이 1136년 이후의 근 1천 년간 그렇게 힘없이 숨을 죽이며 지내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김부식은 우리 민족이 고구려의 기상을 회복하게 될 가능성을 창검으로 짓밟은 장본인이고, 묘청은 조급함 때문에 그 기회를 날린 장본인이다. 역사학자 신채호가 이들의 대결을 못내 아쉬워하는 것은 이로 인해 우리 역사가 나약하고 소심한 방향으로 굳어져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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