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의사 기념관을 둘러보고 김원봉이 떠오른 까닭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명의 독립운동가... 우리는 왜 김원봉을 제대로 기리지 못할까
▲ 박열의사 기념관박열의사 기념관 표지 ⓒ 장순심
박열 의사는 문경에서 태어나 자랐고, 18세인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추적을 피해 그해 10월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1925년에 천황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대역죄'로 기소되어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여 년을 감옥에 있는 동안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1945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박열 의사 기념관에는 박열 의사의 행적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1922년 의열단과 연계하여 폭탄을 반입하고 히로히토를 폭살하고자 했던 것과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와의 이야기도 전시장의 상당 부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념공원 내에는 가네코 후미코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그를 위한 추도식도 매년 열리고 있다고 했다. 그를 기억하려는 후손들의 노력이 고마웠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약산 김원봉이 떠올랐다. 그는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1918년에 난징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며 망명 생활을 시작했고, 3.1 운동 이후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하고 의열단을 창단, 단장에 오르며 일제 요인을 암살하는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시작했다.
1926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했다가 1932년 대일 혁명세력을 결집하여 연합 항일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 194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기까지 그의 행적은 대한민국의 무장독립투쟁사에서 단연 두드러진다.
▲ 의열기념관의열기념관 내 전시실 ⓒ 장순심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투쟁을 주도하며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원봉 열사의 기록은 의열단의 부록으로 존재하고 있다. 지난 광복절 기념식에서 그의 공적에 대해 언급된 것이 크게 논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은 진행 중이다. 명백한 독립운동의 이력이 있어도 그의 서훈에는 반대하는 현실이, 때마침 친일 이력이 있어도 칭송받으며 죽은 자와 극명하게 대비되어 안타까웠다.
김원봉은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임시정부 제2진으로 귀국해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1948년 남북협상 때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월북한 뒤 북한에 남았다.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진력하다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1948년경 북으로 갔고, 언제 생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그의 월북에는 남쪽에서 친일파가 득세한 것과 친일의 잔재가 뿌리를 내리려는 당시의 현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직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했고, 영화 <암살>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 의열기념관해방 이후의 의열단원들(기념관 내 전시) ⓒ 장순심
남과 북의 분단의 시간만큼 골이 깊듯이, 한 체제 내에서도 이념의 분쟁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한 사안을 가지고 서로 다른 기준으로 비판하고 대립한다. 이러한 이념 분쟁의 끝이 오기는 할까.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의 땅인 한반도가 과거를 거슬러 화합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이념 대립은 끝이 날까. 그때가 되면 우리의 굴절된 역사가 바로 세워질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친일 행적을 가진 사람들,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밖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면면을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역으로 반드시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의 이름자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기념관이 있어 그들의 노고를 기록하고 모아 두지 않으면 미래세대들은 더 알 수가 없다. 그런 면에서 박열 의사 기념관은 보는 내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약산 김원봉의 이름을 가진 기념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에는 유공자로 추서되는 사람들의 명단을 마주한다. 나라가 일제로부터 벗어나고 70년이 지나서야 그 이름이 독립운동가로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다. 진작 알려졌던 독립운동가에게나 뒤늦게 알려지게 된 독립운동가에게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큰 빚을 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 빚을 진 것은 아닐까. 박열 의사는 물론이고 약산 김원봉에게도, 이름도 없이 잊힌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들에게 진 빚을 조금씩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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