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들이 초등생들에게 돌로 사람 죽이라고 시켰어"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⑬] 4.3 학살 현장에서 살아야 하는 오경대
제주에는 국가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으로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 4.3 이후 또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살고 있었던 친인척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을 다녀왔다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받은 월급이 공작금이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고문당했던 터, 공간과 마주하고 주변의 사물을 탁본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파괴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이들의 용기에 수상한집과 평화박물관이 함께 응원합니다.[편집자말]
오늘은 서귀포시 중문에 살고 있는 오경대의 기억을 따라 탁본을 하는 날이다. 여름의 시작이라 한낮의 햇볕이 따가웠다. 그는 감귤 농사를 짓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집 마당에도 다양한 귤나무가 가득했다.
그가 일행을 데리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집에서 가까운 한 초등학교였다.
오경대는 어릴 적 고통스러운 4.3의 기억이 있다. 아버지 오종흠이 기성회장으로 5개 교실로 지은 예래국민학교에 불이 났다. 소위 산사람들이 방화를 한 것이라고 했다.
상상할 수 없는 만행
▲ 예래초등학교 표지석을 탁본하는 오경대 ⓒ 한톨
"저 예래국민학교가 지어질 때 아버지가 크게 기여하셨어. 1948년 10월 12일 아버지가 기부하시고 마을 사람들 돈을 모아서 5개 교실로 지었거든. 나도 어릴 적에 그곳에서 공부하는데 49년 2월 12일쯤에 산사람들이 불을 질러 버렸다는 거야. 며칠 후에 군인들이 폭도를 잡았다며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라고 했지. 커다란 공터 가운데 폭도라는 청년을 포승줄로 묶어서 앉혀 놨어."
그때부터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학살이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는 돌멩이를, 6학년은 죽창을 들게 했다. 그러고는 돌아가면서 모두 그 청년에게 돌을 던지게 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죽창으로 그 청년을 찌르게 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돌을 던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군인들이 총으로 위협했다.
"폭도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 놈들은 모두 폭도로 위협해 총으로 쏴 죽이겠다."
덜덜 떨던 아이들 중 누군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연달아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 죽음과 삶의 장소는 구분되지 않는다. 70년 전 학살의 그 장소를 오경대는 여전히 지나고 있다. ⓒ 한톨
"우리 부락 아이들이 모이니까 한 100여 명 되었어. 총을 든 군인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을 던지라고 하니 어떻게 안 던질 수 있어. 하나 둘씩 던지기 시작하니 모두 던졌지. 얼굴이고, 가슴이고, 다리고 막 돌을 맞아버리니 사람이 엉망이 되지. 마지막에 6학년 아이들이 죽창으로 찌르니 피가 콸콸 쏟아져. 커다란 청년 몸에서 피가 쏙 빠지니 요만하게 쪼그라들더라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기가 막혀. 그 청년 돌로 죽이라며 어린아이들에게 적개심이나 유발하고. 그게 뭐하는 짓이야."
7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매일 청년에게 돌을 던졌던 그 길을 지나간다. 자주 그 길을 지나갈 텐데 괴롭지 않으냐고 물었다.
"괴롭지. 하지만 잊고 살아야지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 매일 이 길을 지나가지만 살려면 잊어야지 어떻게 매일 기억하고 살아."
뒤돌아서는 길에 술 한 잔 붓지 못하고 돌아섰다는 마음에 무겁고 불편한 발걸음이었다.
학교 터 입구에는 그의 부친 '오종흠'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나자 갑자기 예비검속으로 끌려가셨어. 서귀포절간공장이라는 곳에 유치되셨는데 며칠 후 면회를 가보니 아버지가 없는 거야. 아버지와 같이 끌려갔던 마을 사람 한 명이 그곳을 빠져나왔더라고. 그래서 그분을 찾아가 아버지 소식을 물었더니 그분 말로 50년 6월 16일(음력)에 육지로 나갔다는 거야.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해 육지로 나갔다는 그날을 제삿날로 정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어. 아버지가 예비검속에 걸려 사라지니 우리 집안은 빨갱이 집안이 된 거야. 나중에 세월이 좋아져서 아버지 재판을 다시 했어. 마을 사람들이 '삼면유족회'(서귀, 중문, 남원면의 유족을 일컫는 말)라는 것을 만들어서 27명 정도가 재판을 했는데 2015년도에 아버지 예비검속 한 것에 대해 무죄가 났어."
그런데도 그의 아버지가 아직도 빨갱이로 왜곡되어 있다며 오경대는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제주4.3진실도민보고서'(제주4.3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 발행)를 펼쳐보였다. 그 보고서에는 부친 '오종흠'이 '좌익 활동하다 월북해 아들을 간첩으로 보'낸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끌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것을 한국 법원에서 인정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우리 가족을 빨갱이로 몰고가니 이 얼마나 억울한 거야. 아무리 내가 진실하다 해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다니면서 우리는 아니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다닐 수 없잖아."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했다. 지금 살고 있는 그의 집과 창고 곳곳에는 귤 농사에 쓰는 많은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해방되고 나서 아버지도 안 계시지,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어. 그래도 농사라도 열심히 지어서 성실하게 살아보자고 정말 열심히 살았지. 그러다 1966년 어느 날 밤에 이복형이 찾아왔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복형이라 나는 모르는데, 어머니는 단박에 알아보시더라고. 어머니가 이복형이 어릴 때 연자방아에 다친 손가락을 보더니 딱 경지 형이라고 하더라고."
갑작스레 나타난 이복형
▲ 남한을 선택해 저항하며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고문과 폭력이었다. ⓒ 한톨
너무 먹고 살기 힘든 그 시절이라 돈만 있으면 너도 나도 목숨 걸고 밀항을 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이복형은 당시 일본으로 밀항해서 밀무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 등록증과 거류 민단증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무역업을 시키면서 돈을 벌게 하겠다는 거야.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설렜지. 일부러 밀항을 가려고 애써도 못 가는데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나도 어머니도 다들 좋아했지. 아무런 의심 없이 형을 따라 배를 탔어."
그러나 그 배는 일본으로 가는 배가 아니라 북한 해주로 가는 배였다.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해주에 도착한 그는 형으로부터 한 달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꾀를 생각해 냈다. 사실은 자신이 폐디스토마가 걸려 빨리 돌아가 치료받지 않으면 죽어버린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자고 하는 것에 대해 계속 저항하고 반항하자 결국 그를 데려간 지 4일 만에 돌려보내주었다. 새벽 5시경 예래동 앞 논짓물 포구에 내린 그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누가 보는 것만 같고 감시받는 것 같아 등이 따갑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라고. 그래도 집에 오자마자 신고하자고 어머니한테 말했지."
같이 제주에 살던 이복형의 생모가 신고하는 것을 반대하자 어머니는 나더러 참으라며 만류했다.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것이 결국 화가 되었고, 1년 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논짓물 바닷가 앞에 서서 탁본을 하던 그에게 물었다. 매일 보고 다니는 이 바닷가가 불편하진 않으냐고.
"잊어야 살지.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 살려면 잊어야지. 그래도 바닷가는 잘 안 내려와. 그 일이 있는 영향도 있겠지만 마음이 오지 않게 돼. 그래도 간첩이 되고서 다시 고향으로 온 건 내가 간첩이 아니니까 다시 온 거야. 내가 간첩이라고 수군대겠지만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것은 없잖아. 고향에 뭐라도 이바지하자.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살았어. 만약에 지금 이 사실이 방송이나 언론에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오경대는 누구더라고 수군대면서 잊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오겠지. 그래도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걱정하는 것보다 세상에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게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이복형에게 속아서 북한에 끌려갔던 것이라고 말해봤지만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갖은 고문과 폭행으로 그를 남파 간첩으로 만들었고, 결국 그는 1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출소할 당시 나이는 45살. 감옥에서 출소했지만 감옥생활 그대로였다.
"서귀포경찰서 경찰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조사를 해. 어딜 갔나, 육지를 갔나, 다 조사해. 어딜 가건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두 보고해야 살 수 있어. 김대중 대통령이 되고서야 사라졌지. 한 번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형사가 와서는 대통령이 이 마을 앞을 지나간다면서 종일 나를 감시하는 거야. 당하는 사람은 삶의 의욕이 없어져."
그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이틀간 제주시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남산으로 연행될 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알뜨르에서 비행기로 압송된 것이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서울 남산으로 호송
▲ 누군가에게는 멈춰버린 유물이지만, 그에게는 살아있는 기억으로 존재한다. ⓒ 한톨
"제주시에서 이틀 밤인가 자고 수갑을 채우더니 모슬포로 오더라고.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여기 알뜨르에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어. 수갑 차고 와 보니 군용기가 대기하고 있었어. 그때는 알뜨르가 군용 비행장이라. 프로펠러 비행기였는데 작았어. 4명 타는 비행기였는데 정말 작더라고. 그 작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가는 내내 수갑을 찼어. 오후 2시 정도였는데 남산에 도착하니 캄캄한 밤이 되었더라고."
그는 알뜨르 비행장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신호수가 올랐다는 관제탑에 올랐다. 그곳에 오르니 멀리 예래 군산과 산방산, 모슬포, 가파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 혼자이기보다 함께여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고통의 장소와 시간 역시 다르지 않다. ⓒ 한톨
"55년이 흘렀지만 지금 다시 알뜨르에 와보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등에 식은땀이 흐르네. 지금도 그때처럼 생생하게 무섭고 떨리는 걸 보니 얼마나 내가 당했나 싶네. 그래도 강광보, 김평강씨 같이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사람들과 함께 오니 이 자리에 설 용기가 생긴 것 같아. 여전히 무섭고 떨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함께 서니 덜 무섭고 떨리네. 같이 와줘서 고마워."
오경대는 납치되었다 돌아왔을 뿐인데도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의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며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을 신청(2019재고합2)했고, 현재 1심 재판을 모두 마친 후 선고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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