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사가 준다는 10만 원, 미친듯이 달렸다
현금 지원 이벤트 때문에 카드 가입까지... 나는 나만의 '개미집'을 파고 있다
▲ 내 지갑에 꽂힌 카드들체크카드 생활자를 지향하다, 결국 이벤트에 신용카드가 늘고 말았다. ⓒ 김나라
며칠 전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었다. 수입이 없어서 갖고 있던 카드도 전부 없앴는데 새로 카드를 만든 것은 순전히 이벤트 때문이었다. 신규발급 후 열흘 안에 10만 원을 쓰면 그 10만 원을 현금으로 돌려준다는 것.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이벤트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니, 이 큰 돈을 그냥 준다는데 왜 안 받아? 나는 곧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모르고 있었다. 일정한 소득도 재산도 없는 사람이 신용카드를 발급 받는 일은, 인터넷 창에서 신청 버튼을 누르고 주소를 입력하는 간단한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다음날 카드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 그게, 아르바이트인데요."
"소득이 100만 원 이상이신가요?"
"(예기치 않은 부끄러움) 아니요…."
"아, 고객님 그러면 300만 원 이상의 적금 혹시 가지고 계세요?"
"네, 그건 있어요."
"어느 은행이세요?"
"농협이요."
"지역농협이신가요, 농협은행이신가요?"
"농협은행은 농협중앙회 말씀하시는 거죠? 지역농협이에요."
"아, 그러세요. 지역농협은 안 되세요… 그러시면 임차인 자격으로 발급받는 방법도 있으신데요, 살고 계신 자택 보증금이 천만 원 넘으신다면 가능합니다."
"네, 그렇긴 한데 공동명의로 천만 원 넘는 경우도 가능한 건가요…?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음. 그 부분은 제가 팀장님께 여쭤보고 잠시 후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냥 연락 안 왔으면 좋겠다.)"
잠시 후.
"고객님, 공동명의도 가능하십니다. 임대차계약서를 사진 찍어서 전송해 주시면 검토 후에 발급 가능 여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날.
"고객님, 첨부하신 파일이 확인되지 않는데요, 파일 크기가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조정하셔서 다시 한 번..."
그날 오후.
"고객님, 파일이 아직도 확인되지 않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몇 번이나 취소할까 싶어 어물어물 넘기려 했다. 그런데 나보다는 카드사가 끈기가 있었다. 결국 나도 '이왕 이렇게 됐으니 끝까지 해 보자' 하며 귀찮음과 찜찜함을 이겨내고야 말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카드는 이틀 후 배송되었다. 이제 열흘 안에 10만 원을 긁는 게 관건이었다. 안 그래도 허리가 다시 안 좋아졌던 차라, 일 년 전까지 다녔던 재활의학과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급하게 예약을 잡으려니 치료사 분과 시간이 잘 맞지 않아 그것도 여러 번 통화가 필요했지만 무사히 예약이 잡혔다. 치료 받는 날, 병원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이사 전에 다니던 곳이라 버스로 왕복 두 시간 걸리고 중간에 한 번 갈아타기도 해야 했지만, 그게 뭐 대수랴. 버스 안에서 오디오북도 듣고 읽다 말았던 책도 읽으면 되지.
병원 근처에 내렸을 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제야 지갑을 뒤져 보았다. 헉. 설마. 카드가 없었다. 작은 카드지갑 안에 여러 장의 체크카드며 신분증을 꽂아둔 탓에 카드 색깔을 착각한 것이다. 아, 이런 망. 귀찮아서 그깟 십만 원 포기할까 하다가 또, '이렇게까지 했는데' 싶었다.
10만 원을 채우자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사기도 싫었던 나는 곧바로 반대 방향으로 건너가 버스를 기다렸다. 다시 한 시간 버스를 타고 내렸다. 환승 제한시간 30분 안이라는 단기 목표와 10만 원이라는 장기 목표를 가슴에 품고 집까지 뛰었다. 그리고 카드를 찾아서 정류장까지 다시 런런런. 후들거리는 다리로 찌질함의 극을 달리는 나를 불쌍히 여겼는지 때 맞춰 버스가 왔다. 병원에는 십 분쯤 늦는다고 연락하고, 정확히 그만큼 늦게 도착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 후 반짝거리는 새 카드가 무사히 첫 결제를 마쳤다. 영수증에 찍힌 10만 3000원. 이제 됐구나. 한 달 후면 십 만원은 내 계좌로 환급될 것이다. 그렇다. 늘 자본주의며 시장경제의 원리가 문제라며 투덜거리던 나는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마침내 신용카드를 착오 없이 사용하게 됐다는 뿌듯함에 피곤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단순한 개미.
쉽게 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조 안에서 나는 나만의 작은 개미집을 파고 있다. 금융계의 관점에서는 신용이 보장되지 않고, 사회적으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길에서 독립근로자로 살아가자고 한 삽 한 삽을 떠낸다. 이번 일은 그 '삽질' 중의 하나다.
어디에 써야 이 고생이 아깝지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돈이 될 때까지, 뭘 하면서 벌어야 잘 버틸 수 있을까? 사실 이런 고민은 끝이 없다. 평소 좋아했던 패션한복을 직접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얼마 전에는 한복기능사 국비교육 과정도 신청했었다. 그러나 점점 더 나빠지는 목과 허리의 상태를 지켜보다가 네 달 간 하루종일 앉아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과정을 신청한 것이 객기임을 깨달았다.
직업학교에 전화해 신청을 취소하고, 투잡사이트를 이용해 첨삭과 윤문을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봤다. 논술이나 대입수험생의 자기소개서를 첨삭하는 일도 오래 해 왔지만, 직접 홍보해서 꾸려가려니 역시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하루에 문서작업을 하고 글을 쳐다볼 수 있는 에너지는 한정돼 있는데, 그런 체력과 시간은 내 글을 쓰는 데만 사용하기에도 부족한 게 사실이다. 며칠 전 본, 다른 국비교육 면접에 붙는다면 다음 달부터 한동안은 영상편집을 포함한 미디어콘텐츠 교육을 듣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목표에 해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전처럼 주와 부가 전도된 채 세월만 보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선택할 때 참 조심스러워진다. 그리고 이벤트나 중고 판매처럼 생활비에 보탬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일단은 솔깃하게 된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싶지는 않다. 앞길을 알 수 없어 막막한 것은 인생의 어느 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십 대에는 앞에 보이는 것 하나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일단 해 보며 나아왔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큰 막막함을 젊음 특유의 패기와 배짱으로 헤쳐 나왔다. 그리고 삼십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은 좌절감이나 상실감이 더해질 수 있어도, 그걸 이길 만큼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도 갖고 있다.
사람은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을 갖고 나아가면 상황도 나를 돕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다. 지금까지 버티기도 하고 잠시 숨기도 하면서 잘 살아온 내 모습을 내가 다 지켜봤으니까. 정 안되면, 바퀴벌레라도 잡겠지. (살펴본바, 심부름앱 의뢰 건의 3분의 2가 자취방에 나타난 바퀴벌레를 잡아달라는 얘기였다. 운 좋게도 나는 벌레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요즘은 한 달 후 돈이 환급되면 어디에 써야 이 고생이 아깝지 않을까 생각해 보고 있다. 맘먹고, 평소의 빠듯한 생활비 안에서는 쓸 수 없는 데에 써야지. 사치스럽게 파마를 해 볼까 싶다. 코로나의 기세가 심각할 때 반값 이벤트로 했던 파마가 거의 풀려가고 있다. 중단발이었을 때 했었는데 머리가 적당히 더 길었으니 이번에는 '히피펌'을 할 것이다. 두피부터 최대한 부글부글하고 꼬불꼬불하게.
히피펌을 한 독립근로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짱짱한 웨이브가 낭창낭창해질 때까지 또다시 자발적 백수로, 작가지망생과 번역가지망생으로 제 흥에 겨운 하루하루를 살아봐야지. 환경에 대해 그리고 틈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시를 쓰다 보면, 내가 속해 살아가는 거대한 개미굴에도 어쩌면 조금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작은 길들이 더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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