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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고기와 함께 배달된 쪽지... 모녀를 살리다

[탁본에 남긴 잔혹한 기억 ⑭] 4.3을 자꾸 말해야 한다는 김인근

등록|2020.08.29 11:12 수정|2020.08.29 11:12
제주에는 국가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으로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 4.3 이후 또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살고 있었던 친인척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을 다녀왔다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받은 월급이 공작금이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고문당했던 터, 공간과 마주하고 주변의 사물을 탁본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파괴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이들의 용기에 수상한집과 평화박물관이 함께 응원합니다.[편집자말]
 

▲ 김인근. 방문한 사람들을 더 잘 대접하지 못한다며 미안해 하고 있다. ⓒ 한톨


"아, 왔습니까. 누워서 인사해 미안합니다."

일어나지도 못하는 남편 김용담이 누운 채로 인사했다. 아내 김인근은 옆에 서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리 때문에 또 이렇게 오셔서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운지. 아이고. 정말 고맙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앉으세요. 뭐 시원한 거라도 마셔야죠. 커피 드릴까?"

80대 노인은 귀한 손님이라며 가만있질 못한다. 그러자 강광보는 그녀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힌다.

"가만 계십서. 마실 것 안 내와도 되니. 금방 나갈 건데 뭘 내온다고 합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형님은 이제 아예 누워 버리셨네."

"나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몸이 이래서 같이 가지 못해 미안합니다. 날도 더운데 조심해서 잘 다녀들 와요."

뇌경색으로 누워있는 남편을 두고 나오는 아내 김인근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강광보, 김평강과 함께 가는 그곳도 마음 편할 리 없는 곳이었다. 지금은 청소년문화의집이라고 되어 있는 이곳. 이곳이 바로 화북 학살의 시작점이었다.

"여기가 예전에 화북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예요. 49년 1월에 군인들이 빨갱이 잡는다며 마을 사람들 전부 여기로 모이게 했던 곳입니다. 어머니와 언니, 만삭이었던 새언니와 조카 둘 이렇게 우리 집 사람들이 끌려왔죠. 4학년 교실에 갇혀 있는데 먼저 끌려갔던 아버지가 쓰러져 있는 거예요. 아버지 하고 가서 보니 한 쪽 눈알이 툭 빠져 있고, 숨을 쉴 때마다 입과 코에서 피가 푸걱푸걱 하고 나오는 거예요."

세상이 좋아져서 이런 말을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 전에는 4.3 이야기만 꺼내도 잡혀갈까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일렬로 사람들을 세워놓고 총으로 죽이다가 중지시키더니 남자, 여자 분리해서는 차에 태우더라고요. 나랑 언니랑 어머니, 만삭의 새언니가 같은 트럭에 탔는데 아무래도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아서 트럭에서 몰래 뛰어내렸어요. 처음에는 실패해서 다시 잡혀 왔는데 두 번째는 성공했어요. 군인 한 명이 도망가는 나를 잡지 않고 살려주었는데 그 군인 지금도 고마워요. 바위 뒤에 몰래 숨어서 마을 입구 저 외소낭(소나무)으로 트럭 돌아가는 걸 보고만 있었죠."

그 길로 그녀는 집으로 도망갔다. 공포와 서러움에 울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돌아왔다.

김인근을 살린 쪽지
  

▲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는데도 4.3평화공원을 방문한 피해자들 ⓒ 변상철


"자다가 설핏 깼는데 피범벅이 된 소복에 머리는 풀어 헤쳐진, 턱은 반쯤 없어진 피가 줄줄 흐르는 귀신이 서 있는 거야. 귀신인 줄 알고 살려달라고 하면서 보니 귀신이 아니라 엄마야. 총을 일곱 방이나 맞고 용케 살아 돌아오신 거라."

학살의 현장에서 조카들과 새언니는 총에 맞아 죽고, 겨우 살아 나온 어머니는 배에 총을 맞고 앉아 있던 언니를 업고 나왔다고 한다. 힘에 부쳐 언니는 오는 길에 친척 집에 맡기고 어머니만 왔다고 한다. 배에 총을 맞은 언니는 결국 다음 날 숨을 거뒀다. 한참 뒤에 친척들이 언니를 묻었다는 무덤에 가서 언니의 시신을 찾으려 하니 몇 점의 뼈와 함께 작은 총알 하나가 나왔다고 한다. 그 총알을 잡고 서럽게 울었다. 그 작은 총알이 언니의 생명을 앗아갔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어머니가 살아오시기는 했는데 총을 일곱방이나 맞아서 온몸에서 피가 콸콸 샘솟는 거야. 천으로 피가 나는 구멍을 막아도 막아도 피가 끝이 없이 나넨, 아이고 아래턱도 총알로 으스러져 버리난, 죽이나 미음을 넣어드려도 턱으로 전부 줄줄 새서 나오고 삼키지를 못하니, 뭘 어떻게 할지도 모르고 그냥 발만 동동거리고 울기만 울기만."

절망 속에서 어머니의 치료가 난망할 그때, 어머니 옆에서 간호하다 잠들었던 김인근씨가 새벽녘 화장실을 가려고 마당에 나와 보니 호박, 종이에 싸인 소고기, 그리고 쪽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쪽지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 가족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령비 앞에서 간절히 기도 올리는 김인근 ⓒ 한톨

 
인근아,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호박은 죽을 쑤어 어머니 드리고, 소고기는 얇게 포를 떠서 상처에 덮어두어라. 힘들더라도 살암시민 살아진다.

그녀는 그 종이에 적힌 대로 어머니에게 호박죽을 만들어 드리고, 소고기는 상처에 싸매는 데 사용했다. 소고기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면 새 소고기를 저며 다시 덮어두기를 반복하자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다. 그런 쪽지와 음식이 한동안 계속 왔다.

"그 쪽지가 어머니와 나를 살렸지. 안 그랬으면 우린 벌써 저 자살 절벽에 올라가 죽었을 거라. 지금도 그 쪽지와 음식을 주신 분들이 누군지 알고 싶지. 그때는 우리 집만 얼씬거려도 몰려서 죽을 판인데 목숨을 걸고 도와주신 거잖아요. 참 고마운 분들인데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그냥 고마운 사람인 것만 알지."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어머니 몸이 조금씩 나아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산사람들에게 납치되었던 오빠가 도망쳐 내려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오빠는 폭도로 몰려 제주항 근처 주정 공장에 갇혀 있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엄마도 오빠 일로 제주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고 오난 또 피투성이. 주정 공장에 오빠가 있다는 말을 듣고 도시락을 싸들고 주정 공장 근처 우물로 가는 길에서 매일 오빠를 기다렸어요. 오빠가 물 길으러 나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그런데 정말 오빠가 리어카를 끌고 물을 길러 나오더라고. 그래서 군인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간 도시락을 먹였어. 가족 이야기를 듣더니 오빠도 울고, 나도 울고... 오빠는 자기가 나올 때까지만 어머니 모시고 고생하라면서 나를 위로했어. 그렇게 며칠을 계속 오빠를 만났는데 어느 날 오빠가 우물로 나오질 않는 거. 그래서 주정 공장으로 찾아가서 여기 갇혀 있던 사람들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육지로 데리고 갔다는 거라. 그걸로 끝. 다시는 오빠를 보지 못했어."


오빠의 마지막 기록은 지금의 마포 공덕에 있던 마포형무소에서였다. 전쟁 전후 그는 행방불명 되었거나 처형되었을 것이라 추정될 뿐이다. 오빠 김호근은 결국 4.3 행불자 묘역에 이름을 올렸다.

"그게 다 기록이고 역사였는데 내가 바보라"
  

▲ 홀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살아남은 것이 먼저 간 조카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 한톨


평생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고 마음 먹었던 그녀지만 어머니의 설득으로 결혼을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이자 마을에서 존경받는 어른의 집안에서 자란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그녀는 결혼식 전날 자신이 가지고 있던 4.3의 기억을 모두 지우려 했다. 매일 적었던 일기, 사진, 그리고 그녀와 어머니를 살렸던 쪽지도 모두 태웠다. 그것을 태우면 4.3의 악령이 떠날 줄 믿었다.

"바보였지, 내가. 그러면 4.3이 떠나는 줄 알았지. 지금 생각해보면 일기고, 쪽지고 가지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게 다 기록이고 역사였는데 내가 바보라. 바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일본에 취업하러 간다며 밀항을 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밀항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밀항 후 남편 역시 간첩으로 몰려 수사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광주교도소에 영치되었다.

"남편 잡혀가고 나서 또 고생 시작. 시댁에서 남편 잡혀간 건 '나' 때문이라고 수군대넨 아이고, 힘들고 말고. 나도 내가 4.3 빨갱이 집안이라서 남편이 잡혀간 것 같아 매일 괴로웠어요. 어디 가서 마음 놓고 울 데도 없으니 집 뒤 아궁이에 가서 울었지. 기름보일러로 바꾸고 나서는 쓰지 않지만 유일하게 울 수 있던 곳이야."

그녀가 마음 놓고 울었던 아궁이 자리는 나무로 덮여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녀의 감정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었던 곳. 자신의 잘못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죄책으로 가지고 살아야 했던 4.3의 그림자, 그리고 빨갱이...

4.3평화공원 행불자 묘역에서 오빠의 묘비를 쓰다듬던 그녀는 탁본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4.3에 지는 거라. 내가 4.3 잊자고 다 태우고 없애고 하니까 4.3이 점점 커지기만 해. 4.3을 이야기하고 떠들고 해야 4.3을 이기는 거라. 나도 우리 오빠도 4.3을 이기려면 자꾸 말을 해야 하는 거라. 침묵하면 지는 거라."
 

▲ 생사조차 모르는 오빠를 오늘도 기다린다.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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