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청요 본채 ⓒ 민영인
민영기(閔泳麒)선생은 1973년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기 기술 환원이라는 목표로 일본에 국가장학생으로 떠났다가 5년 후 귀국한 이듬해 이곳에다 터를 잡았다. 지금의 수산다리는 1983년에 가설되었기에 그 당시는 나룻배로 강을 건너다녀야 했던 오지다. 그는 왜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단지 산청이 고향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 인터뷰하는 민영기 선생 ⓒ 민영인
어느덧 10년이 지나고, 1990년 동경의 주일한국대사관 문화원의 합동전시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동경국립박물관 도예실장이던 하야시아 세이조 선생이 "더욱 더 열심히 해라. 만약 민영기가 일본인이 못 만드는 찻사발을 만들면 도쿄에서 전시회를 열어주겠다"는 격려의 말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일본의 도예가들이 만들지 못하는 사발을 기필코 만들어서 일본사람들의 기를 꺾고 '역시 한국 사람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비록 우리 분청의 맥이 끊겨 일본으로 배우러 갔지만 우리의 사발과 분청에는 우리의 혼과 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갈 때 힘들게 여권을 만들고 떠나는 날은 3월 1일로 잡았고, 귀국은 8월15일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가 50년 가까운 시간을 온전히 분청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정신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분청에 혼을 쏟아 부은 23년 만에 일본에서 첫 사발전시회를 열었는데, '일본에서는 이렇게 만들 사람이 없다'는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동안 힘들었던 과정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 전시된 분청사기 ⓒ 민영인
흙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을 문양, 형태, 질감으로 표현하는데, 만약 내면의 미가 없다면 쉽게 싫증이 난다. 피카소의 그림이 관념의 파괴라면 분청은 탈속으로 신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17년 전 아버지를 스승으로 삼은 아들 범식씨가 분청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큰 다행이다. 민영기 선생을 작품 전시실에서 인터뷰를 한 다음 범식씨는 곁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3개월 전에 문을 열었다는 카페는 평일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카페를 개업하기까지 아버지를 설득하는 데 고생이 많았다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 카페 산청요, ⓒ 민영인
이러한 고민으로 범식씨는 작품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하게 가닿기 위해 카페를 열고, 전시실을 상시 개방하고, 전시실 2층에는 체험관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선생은 작품 활동에 매진하기를 바라지만 좀 더 넓은 시야로 봤을 때는 범식씨의 방향이 옳다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산청요는 산청의 정신이자, 시대의 정신이다. 지금과 같은 혼란의 시기에는 고집스런 장인 정신과 그것을 이어가는 계승의 정신, 열정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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