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탄생한, 최고의 금지곡은 '이것'
여순 사건이 낳은 금지곡, '여수 야화'
▲ 여수 자산공원 산책로에 세워져 있는 '애기섬 학살지' 안내판. 보도연맹 사건 때 이 섬에서 약 120명이 희생되었다. ⓒ 정만진
자산공원 정상부에 올라 '이순신 장군상'을 본 뒤, 동상 앞에 세워져 있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성금 기념비'를 뒤로 하고 걸으면 이내 '임진란 호국 수군 위령탑'이 나타난다. 이곳부터 산책로까지는 좁은 샛길이 이어진다. 나무 사이로 고불고불 내려오면 바다와 케이블카를 등지고 서 있는 안내판 하나가 나타난다.
여수의 경우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들을 여수 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가 총살, 수장하였으며, 남면, 화정면, 심산면의 섬 지역은 주변의 무인도나 바다에서 처형 후 수장하였다. 당시 특무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애기섬 희생자는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
안내판을 읽으면 보도연맹을 만든 주체, 조직 목적, 경과, 시기 등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여순 사건'이 무엇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다. 여순 사건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관광객은 '여수를 여순으로 오기한 것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여순은 '여'수와 '순'천의 첫 글자 둘의 조합이다.
▲ 보도연맹 사건 때 해안 지역에서는 무인도로 끌려가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수 자산공원의 '애기섬 학살지' 안내판에서 돌산도 방향으로 보이는 이 섬도 보도연맹 희생자가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다. ⓒ 정만진
이들은 금세 전라남도 동부 6개 군을 점거했다. 정부는 대규모 진압군을 보냈고, 6개 군을 약 일주일 만에 수복했다. 그 과정에서 2000~5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각계 각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무제한적인 탄압을 제도화시켰다.(주1)"
여순 사건이 낳은 금지곡 〈여수 야화〉
여순 사건을 계기로 해방 이후 최초의 금지곡이 탄생했다. 김건 작사, 이봉룡 작곡, 남인수 노래의 〈여수 야화(夜話)〉가 바로 그것이다. 이 노래는 "가사에 있어 불순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서" 서울시 경찰국에서 "판매 금지시키기로 되었다.(경향신문 1949년 9월 3일 보도)" 아래는 노래 전체 중 일부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가사는 "왜놈들 물러갈 때 왜 고이 보내주었느냐?"고 물음으로써 집권 세력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있다. "그래놓고 지금 동족끼리는 왜 싸우느냐? 의견이 맞지 않으면 토론을 해가며 살아야지!" 하고 꾸짖는다. 또, 당시 민간 주택이 2000호가량 소실되었는데(주2) "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고 요구하기도 한다.
▲ 왼쪽에 돌산대교, 오른쪽에 장군도가 보이는 여수의 풍경 ⓒ 정만진
1990년 가수 정태춘은 정부의 음반 제작 전 사전 심의, 곧 금지곡 정책에 저항하여 심의를 받지 않고 〈아, 대한민국〉을 발매했다. 정태춘은 현행범이 되었지만 헌법재판소는 1996년 10월 31일 사전 심의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아, 대한민국〉 중 한 부분을 읽어본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양심과 정의가 넘쳐흐르는 이 땅
식민 독재와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바보 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대한민국 아~우리의 공화국
정태춘은 사전 심의를 규정한 법을 어김으로써 마침내 '악법'을 철폐시켰다. 그가 사전 심의에 순순히 응했더라면 〈아, 대한민국〉은 틀림없이 금지곡이 되었을 터이고, 대중은 이 노래를 즐길 자유를 박탈당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저항의 노래인 포크송과 록 음악이 별로 저항성을 띠지 않았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저항의 노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주3)." 독재 세력은 금지곡을 생산함으로써 정권을 공고히 하거나 유지하는 데 이익을 보려 했지만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시민들은 〈아침 이슬〉 등의 금지곡을 부르면서 박정희, 전두환 독재를 분쇄했다.
금지곡을 부르면서 독재에 맞선 시민들
김수영 시인은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이면 알지 / 노고지리가 / 무엇을 보고 / 노래하는가를 / 어째서 자유에는 /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 혁명은 / 왜 고독한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했다. 문화적·사상적 독재인 금지곡 정책을 폐지시키는 데도, 정치적·경제적 독재를 무너뜨리는 데에도 '고독한' 희생이 뒤따른다는 노래였다.
▲ 여수 흥국사 입구의 커다란 자연석에 붉게 새겨진 '남북 통일 기원' ⓒ 정만진
일제 강점기 때 악법에 맞서 싸운 사람들을 우리는 독립운동가라 부른다. 독재 정권 때 악법에 맞서 싸운 사람들을 우리는 민주화운동가라 부른다. 이는 "악법은 어겨서 고쳐야 한다"는 논리가 타당하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언해준다.
지금은 정치적 측면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된 사회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금지곡이 탄생한 1949년 9월 1일 이래 7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악법은 어겨서 고쳐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문제가 불거지고 누군가가 피해를 입기 이전에 악법이 폐기되고 수정되는 대한민국을 보고 싶다.
(주1) 다음 백과 〈여수·순천 10·19사건〉
(주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순 사건〉
(주3) 민경찬,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양악편)>(두리미디어, 2007), 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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