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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학과 '중용철학' 수용한 큰 그릇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10회] 종교로서의 천주교 아닌 학문으로서 서학을 인식하게 되다

등록|2020.09.09 17:42 수정|2020.09.09 17:42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 다산연구소


정약용이 이벽을 통해 서학에 접했다고 했으나 곧바로 천주교를 신앙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매형인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천주교 서적을 가져오고 남인계열의 학우들과 돌려 읽으면서 종교로서의 천주교 아닌 학문으로서 서학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한자로 펴낸 서학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성세추요』를 비롯하여 십자가와 성화(聖畵) 그리고 각종 과학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1784년의 일이다. 조선 천주교의 주춧돌이 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영세명을 받았다. 이로써 그는 세계 천주교선교사상 선교사가 파견되기 전에 스스로 영세를 자청한 최초의 인물이 된 것이다.

이승훈은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에게 서학을 전하고 마침내 이벽을 통해 정약용의 가(家)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당을 찾아가 영세를 요청한 것은, 그 이전에 조선에는 이미 자생적인 천주교 조직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조직의 지도자가 이벽이었다.

"자생적인 이벽 덕분에 조선은 이승훈이 영세를 받기 전 이미 천주교 조직이 있었는데,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귀국한 후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정약용 형제들도 있었다." (주석 6)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약용과 그 집안에 큰 풍파를 일으키게 되는 천주교(학)를 전파한 이벽에 관해 좀 더 소개한다.

이벽의 집안은 본래 문관이었으나 증조부 때부터 무관으로 전환해 조부, 부친 그리고 형과 동생이 모두 무과를 역임했다. 이벽은 키가 8척이고 한 손으로 무쇠 백근을 드는 장사였던 데다가 성호 이익으로부터 '장차 반드시 큰 그릇이 되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머리도 총명했다. 그의 부친 이부만 (李溥萬:1727~1817)이 이벽의 입신출세를 바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벽은 벼슬에는 별 뜻을 두지 않은 채 명산대찰을 찾아 다니거나 뜻 맞는 선비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러던 이벽이 천주교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고조부 이경상 때문이었다. 이경상은 선양에 인질로 잡혀간 소현세자을 모셨는데,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가 베이징에서 아담 샬에게 받은 천주교 서적 일부가 집안에 전해져 왔던 것이다. 이벽은 이런 서적들을 통해 스스로 천주교를 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학 서적은 금기가 아니었고, 이벽 또한 천주교가 유교의 충효 개념과 배치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주석 7)


정약용은 아직 태학(성균관)생의 신분이었다. 태학에 나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관생들에게 『중용』에 관한 질문 70조목을 내리고 각기 해답을 올리도록 하였다. 그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중용강의』를 지어 올렸다.

당시 조선 선비들 사이에는 이기이발론(理氣理發論)이 성리학의 쟁점이 되고 있었다. 요약하면 "기(氣)가 먼저냐 이(理)가 먼저냐"의 논쟁이었다. 그는 율곡 이이의 주장에 논거하여 "기질에서 발동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것이 정조의 마음에 쏙 들었던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정약용은 이벽과 만나면서 천주교 교리에 심취하였고, 천주교 교리의 새로운 세계관에 영향을 받으면서 '중용'을 새로운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중용』이라는 경전에 신선한 새 생명을 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석 8)

유교 덕목의 하나인 '중용'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으며, 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떳떳하며, 알맞은 상태가 그 정도를 뜻하는 도덕규범을 말한다. 놀라운 것은 정약용이 같은 시기에 서학의 천주사상과 동양의 중용사상을 함께 받아들여 체화시킨 큰 그릇이었다는 점이다. 서학은 뒷날 죽음의 길로 몰아간 빌미가 되었고, 중용사상은 '다산경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중용강의』는 정약용이 경전을 해석한 최초의 저술이다. 이 저술은 정약용의 경학이 주자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그 후 정약용이 평생을 통해 저술한 방대한 경전 해석의 출발점이요 원류가 된다. 또한 그가 경전해석을 통해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주자의 정밀한 체계를 허물고 새로운 세계관의 경전해석 체계를 제시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건이기도 하다.

『중용강의』는 '주자학의 경학'에서 벗어나서 '실학의 경학'으로 큰 산마루를 넘어가는 사상사의 일대 전환이요, '다산경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천명하는 징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용강의』는 정약용 사상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전환계기를 확립하는 것이요, 한국사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주석 9)


서울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아직 태학(성균관)생의 신분이라 조정에서 급료가 나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퇴임하면서 본가의 실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이고 관직에 나아갔을 때도 이를 본보기하였다.

스물세 살이던 해 긴 장마로 열흘 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식량이 떨어진지 오래였다. 아내가 데려온 어린 여종이 이웃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몰래 따다가 죽을 끓였다가 아내에게 꾸중을 듣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굶고 있는 주인이 안스러워 저지른 일이었을 것이다.

정약용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남과탄(南瓜嘆)」이란 시를 지었다. 과거에 급제하고 서학에 접하여 폭넓은 식견을 가진 청년 선비의 고뇌와 야망을 보여주고 있다.

 아아 죄 없는 아이 꾸짖지 마오
 내 호박죽 먹을 것이니 두말 마시오
 옆집 주인 노인께 사실대로 말하리니
 오릉증자 작은 청렴 달갑지 않다
 이 몸도 때 만나면 출세길 열리리라
 안되면 산에 가서 금광이나 파야지
 만 권 서적 읽었으나 어찌 아내가 배부르리
 밭 두어 이랑 있었던들 여종은 깨끗했을 텐데. (주석 10)


주석
6>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1)』, 69쪽, 김영사, 2004.
7> 앞의 책, 64쪽.
8> 금장태, 앞의 책, 46쪽.
9> 앞의 책, 46~47쪽.
10> 박석무 옮김, 『다산시정선(상)』, 57쪽, 현대철학사, 2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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