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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노무현의 마지막 말... "운명이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71)]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⑦ 마지막 회

등록|2020.09.11 18:17 수정|2020.10.06 11:58

▲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은 2003년 2월 27일 오후 춘추관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신임각료들이 배석한 가운데 조각 배경과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 청와대 제공

'참여정부' 출범

2003년 2월 25일, 마침내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다. '참여정부'라고 명명했다.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큰 난관에 부딪혔다. 대북송금 특검법 수용, 이라크 파병 등으로 곤욕을 치렀다. 언론과도 매끄럽지 못했다.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언어를 집중보도하면서 마냥 즐기는 모양새였다. 검찰과의 공개토론에서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라든지, "미국 좀 안 갔다고 반미냐? 반미면 어떠냐?"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군대 가서 몇 년씩 썩지 말고" 등의 말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결정적인 말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노 대통령이 2003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 입장하려 했으나 한총련 학생들이 시위를 벌여 우회로를 통해 식장에 들어간 데서 비롯됐다. 그 뒤 청와대에서 5.18기념재단 간부들이 사과를 하자 "이러다가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주류 언로은 이 말을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식으로 보도하면서 큰 파장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오랫동안 노무현을 곁에서 지켜본 염동연 전 의원의 견해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이나 행동에 거침이 없는 사람이다. 영혼이 자유로운 분이다.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무척이나 조심하고 또 조심했지만, 몸에 배인 그런 성격을 감추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다."

재야 시절이나 의원 시절에는 노무현의 그런 거침 없는 말들은 국민들에게 시원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대통령이 된 이후 그런 언어들은 보수 세력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결국 탄핵의 빌미로도 활용됐다.

개혁 입법 표류
 

▲ 노무현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통과되자, 김근태 원내대표와 임종석 의원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옆에있던 정동영 의장과 김희선 의원도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종호


2003년 11월 친노 세력은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노 대통령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그러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 등 논란에 휩싸였다. 이를 빌미로 민주당, 한나라당, 자민련 등이 연합해 2004년 3월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해 이를 통과시켰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1년 만에 대통령 직무를 정지당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오히려 노무현에게 우호적이었다. 그해(2004년) 4월 15일 대통령 직무 정지 중에 실시된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수가 넘는 152석을 얻어 16년 만에 여대야소 국회가 탄생했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함으로써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7대 국회가 개원되자 열린우리당은 다수로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관계법 개정, 사립학교법 개혁, 과거사 청산법안 등 4대 개혁 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여기다가 수도이전법안까지 상정했다. 그러자 보수단체와 기독교단체 회원 등은 국가보안법 반대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사립학교법 개정을 종교 탄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는 집권 당의 전략 부재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개혁 법안을 드민 감이 없지 않았다.

4개 개혁 입법 문제를 둘러싸고 보수-진보간 치열한 논쟁을 첨예하게 벌이는 가운데 그해 10월 21일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2005년 4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은 23곳 선거구 가운데 단 한 석도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노무현은 특유의 승부수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했다. 하지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이를 거절하면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말했다.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은 완전히 참패했다. 그와 동시에 노무현의 지지도는 10%대로 추락했다.

17대 대선 두 달을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세상의 눈은 온통 대선에 쏠렸고, 그 뒤로는 새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목이 쏠렸다. 노무현은 그가 바라던 정치 개혁도, 정권 재창출도, 두터운 보수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 못한 채 임기를 마쳤다. 2008년 2월 25일 새 대통령이 취임하자 노무현은 그날 청와대를 떠나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갔다.
  

▲ 손녀와 함께 봉하마을에서 ⓒ 자료사진

    

▲ 봉하마릉에 찾아온 지지자들에게 인사하는 노무현 ⓒ 자료사진


운명이다

2009년 5월 23일, 봉하마을 집에서 노무현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깼다. 컴퓨터를 켰다. 간밤에 늦도록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자판으로 두들긴 뒤 저장해 둔 글을 불러오기 하여 다시 가다듬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여기까지 글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바탕화면에 저장했다. 그리고는 컴퓨터를 끈 뒤 겉옷을 걸치고 현관으로 나와 캐주얼 단화를 신었다. 경호관과 같이 이따금 아침 산책했던 봉화산 등산로로 걸어갔다. 동녘에서 해가 솟고 있었다.
 

▲ 봉하마을의 부엉이바위 ⓒ 박도

 
삶과 죽음

이승에서 마지막 순간을 경호관이 지켜보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또한 그에게는 이 문제로 문책도 따를 것이라 봤나 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호관이 그 자리에 없도록 일부러 심부름을 보냈다.

"정토원에 가서 법사님이 계신지 보고 오시게."
"네."


경호관은 즉시 정토원 쪽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그뒤 이야기는 독자들이 아는 그대로다.
 

▲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앞두고 노제가 열릴 예정인 서울광장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노란색 모자에 노란색 풍선을 든 시민들로 가득 차 있는 모습.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

  

▲ 경남 김해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 ⓒ 이희훈


노무현,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뛰어난 전술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고 난 뒤 당신의 정치적 포부를 이루고자 하는 전략 부재, 곧 통치술은 부족해 보였다.

아마도 이 땅의 시민들은 나라와 민족의 평화,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세상을 위하여, 더 강하고, 더 치밀하고, 저돌적 추진력을 가진 제2의 노무현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노무현 대통령 편을 마칩니다. 다음 회는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편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노무현 자서전>,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들>, 박영규 지음 <대한민국 대통령 실록> 외 염동연의 증언, 그리고 여러 문헌과 당시의 신문보도 등을 종합 참고하여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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