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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성범죄에도... 가해자 '스포츠 인생' 걱정한 재판부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⑥] 양형 사유에 '국가대표 경력'이 왜 나오지?

등록|2020.09.28 11:04 수정|2020.09.28 11:04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올해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거치며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20년 동안의 스포츠 폭력·성폭력 판결문 163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판결문에 담긴 사건의 심각성·특수성,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양형사유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할 예정이다. 이 기사는 여섯 번째 기사다. [편집자말]
"피고인 A는 청소년 국가대표를 지냈고 피고인 B는 10여 개의 사이클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했으므로 피고인이 장래 유망한 사이클 선수로 성장할 것이 기대되는 점..."  

2016년 7월 1일 선고된 대구지법 형사 12부(재판장 한재봉)의 판결문. 가해자 A와 B는 대구 지역의 한 체육고등학교 사이클부 소속 3학년이었다. 학교 후배 선수를 대상으로 강제추행과 공동폭행을 저지른 두 사람이 받은 처벌은 각각 2500만 원, 2000만 원 벌금형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실형을 피했다.

두 가해자에게 모두 반영된 양형 참작 사유엔 국가대표 경력 또는 우수한 성적이 들어가 있고, 가해자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대목도 이어진다.

"우리나라 사이클 종목 현실에 비추어 피고인들이 대학교 또는 지방자치단체 소속 선수로 활동하지 않으면 선수로서의 생명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윗 단락에는 사건 피해자의 근황이 나와 있었다.

"피해자 G는 이 사건으로 장래 사이클 선수로서의 꿈을 접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기까지 하였다."

"가벼운 형벌이 합당한지 의문"이라더니
 

▲ 2016년 7월 1일 선고된 대구지법 형사 12부는 학교 후배 선수를 대상으로 강제추행과 공동폭행을 저지른 사이클 선수들에게 각각 2500만 원, 2000만 원 벌금형과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내렸다. ⓒ 픽사베이


사건을 들여다봤다.

피해자 G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기까지 가해자 A와 B로부터 당한 고통은 2015년 1학기 내내 이어졌다. 주로 404호, 402호, 103호 등 호실로 이름 붙여진 학교 기숙사 방이 범행 장소였다. 특히 피해자 G는 밤마다 가해자 A의 전담 마사지사가 돼야 했다. 그해 6월 1일부터 오후 10시마다 1시간 이상 등과 허벅지 전신을 총 16회 마사지하도록 강요받았다.

운동 후 상처를 치료하는 파스는 폭행 도구가 됐다. 끔찍한 성추행을 위한 목적으로도 사용됐다. 가해자 A는 또 다른 피해자 F가 가위바위보에서 졌다는 이유로 항문에 스프레이 파스를 뿌렸고, 피해자 G의 성기엔 스프레이 알코올 소독약을 분사했다. 또 다른 가해자 B는 청소기로 피해자 G의 성기를 빨아들여 강제 추행했다.

폭행은 일상처럼 이뤄졌다. 그 방식도 기괴했다. 약과 식재료는 고문의 재료로 둔갑했다. 가해자 A는 "그냥 한 번 맛 봐라"며 피해자 G의 입을 벌려 지사제를 억지로 먹게 했고, 얼굴에 난 여드름을 짜 식초를 강제로 발랐다.

함께 폭행을 당한 F는 초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머리채를 잡힌 채 왼쪽 뺨을 맞아 달팽이관이 터져 난청이 왔다. 밥도 편히 먹지 못했다. 가해자들은 대회 참가를 위해 방문한 지역의 한 식당에서 상추에 청양고추, 마늘, 쌈장, 소금 등을 넣어 쌈을 싸 피해자 F와 G의 입에 밀어 넣었다.

"과연 피고인들에게 벌금형과 같은 가벼운 처벌이 합당한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항소심 재판부(재판장 이범균)는 이듬해 판결에서 이들의 1심 양형에 물음표를 띄웠다. "피고인들은 장난 또는 가벼운 제재의 명목이었다고 항변하지만, 수단과 방법이 잔인하고 가학적일 뿐 아니라, 지속적, 반복적이었다"는 해설도 달아뒀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도 1심 재판부처럼 가해자들의 장래를 걱정했다. 결국 기각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더 나아가 "피해자들이 별다른 신체적, 정신적 후유증 없이 생활하고 있고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 간 피해자 G 역시 잘 적응해 원만히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고도 판시했다. '정신적 후유증 없이 원만히' 생활한다는 근거는 따로 제시되지 않았다.

항소심 판결문에선 피고인들의 근황도 함께 드러났다. "피고인들은 퇴학 처분을 받았는데, 이후 제기된 행정 소송에서 퇴학 처분을 취소한다는 판결이 확정됐다"는 것. 그들은 스포츠계로 돌아갔다.

앞서 1심 재판부는 가해자들 각각이 대학에 다니며 여전히 사이클 훈련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참작해야 한다고 봤다. 2심 재판부 역시 아래와 같이 가해자들의 '사이클 인생'을 걱정한다.

"피고인들에게는 사이클이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삶의 일부인데, 집행유예 이상의 처벌을 받을 경우 향후 선수 생활을 함에 있어 큰 지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의 기량을 판결문에 언급한 사례는 또 있었다. 2018년 수원지법 평택지원 1심 재판부(재판장 정도성)는 중학교 야구부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서 3학년 선배였던 가해자를 언급하며 "중학교 내 우수한 야구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사정은 인정된다"고 했다.

다만, 성폭력의 정도가 심해 소년부 송치 대신 장기 징역 2년, 단기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 선고를 내렸다. 이 판단엔 "운동부 내 위계질서에 익숙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가해자의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환경도 고려됐다.

성적만 좋으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스포츠 심리 전문가나 현장에서 선수를 가르치는 지도자들은 스포츠 폭력·성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로 '성적 지상주의'를 꼽았다. ⓒ unsplash


스포츠 심리 전문가나 현장에서 선수를 가르치는 지도자들은 스포츠 폭력·성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를 성적 지상주의로 꼽았다. '성적만 나오면 폭력도 용인된다'는 명제가 여전히 현장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것.

사설 빙상 스포츠 코치 경력이 있는 한 지도자는 <오마이뉴스>와 만나 "(스포츠계에서) 절대적인 것은 성적과 경기력이다. 성적이 좋은 지도자와 선수는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면서 "(잘못을 저질러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이다. 결국 돌아갈 곳은 많다"고 토로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구멍은 현장 밖인 법정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법조계 전문가들이 폭력·성폭력 처벌에 가해자의 성적과 기량이 '유리한 양형'으로 적용되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유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2019년 10월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스포츠 분야 성폭력·폭력 사건 판례 분석 및 구제 방안 연구' 보고서에서 "법원은 스포츠 폭력 발생 시 피고인의 스포츠 분야에서의 지위, 가능성을 유리한 양형사유로 고려하고 있다"면서 "폭력 가해자가 스포츠 분야에서 이룩한 기존의 업적에 따라 그 양형이 달리 정해지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납득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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