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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피면 모이고 - 죽란시사의 모임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 / 20회] 정약용은 낭만과 풍류를 아는 지식인이었다

등록|2020.09.19 14:46 수정|2020.09.19 14:46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 다산연구소


정약용은 낭만과 풍류를 아는 지식인이었다.

'백과전서파형'의 학식과 정부 관리를  지내면서 다정한 벗들과 어울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즐길 줄 아는 풍류아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에 뒷날 18년의 유배생활을 감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지금의 명동 부근인 명례방에서 살았다. 금정에서 서울로 돌아와 다시 관직에 나갈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큰 벼슬자리가 아니어서 한가한 때가 많았다. 일찍 퇴근하면 정원을 가꾸어 각종 꽃을 심었다. 집의 당호를 죽란사(竹欄爛舍)라 지은 「죽란화목기(竹欄化木記)」에서 '당호의 변'을 소개한다.

나의 집은 명례방에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구경할 만한 연못이나 정원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 뜰을 반 정도 할애하여 경계를 정해서 여러 꽃과 과일나무 가운데 좋은 것을 구하여 화분에 심어 그곳을 채웠다. 애류(倭榴)는 4본이 있다. 줄기가 위로 뻗어 1장(丈)쯤 되고, 곁에 가지가 없으며 위가 쟁반같이 둥글게 생긴 것이 두 그루가 있다. 석류 가운데 꽃도 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화석류라 하는데 1본이 있다.

매화는 2본이 있고 치자나무도 2본이 있다. 산다(山茶)가 1본 있고, 금잔화와 은대화가 4본 있다. 파초는 크기가 반석만 한 것이 1본 있고, 벽오동은 2년생이 1본 있고, 만향(蔓香)이 1본, 국화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모두 18분이고 부용이 1본이다.

그리고 대나무 중에서 서까래처럼 굵은 것을 구하여 화단의 동북쪽으로 가로질러 울타리를 세웠다. 이는 이곳을 지나다니는 남녀종들이 옷으로 꽃을 스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것이 이른바 대나무 울타리(竹欄)이다.

언제나 공무에서 물러 나와 건(巾)을 젖혀 쓰고 울타리를 따라 걷기도 하고, 달 아래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고요한 산림과 과수원, 채소밭의 정취가 있어서 수레바퀴의 시끄러운 소음을 거의 잊어버렸다. 여러 시 벗들이 날마다 이곳에 들려 취하도록 마셨는데, 이것이 이른바 '죽란의 시모임(竹欄社)이다.
 

다산 정약용의 시 탐진촌요와 상징그림다산 정약용의 시 탐진촌요와 상징그림 ⓒ 이승철


'죽란시사'는 정약용이 이웃에 사는 남인계 선비들과 조직한 친목모임이다. 참가자는 이유수ㆍ홍시제ㆍ이석하ㆍ이치훈ㆍ이주석ㆍ한치응ㆍ유원명ㆍ심규로ㆍ윤지눌ㆍ신성모ㆍ한백원ㆍ이중련ㆍ채흥원ㆍ정약전ㆍ정약용 등 15인이다.

모임의 '시첩(詩帖)'에서 정약용은 "15인은 서로 비슷한 나이로 서로 바라보이는 가까운 곳에 살면서 태평한 시대에 출세하여 모두 문과 급제로 벼슬길에 올랐고, 그 지향하는 취향도 서로 같으니 모임을 만들어 즐기면서 태평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은가."라고 의미를 담았다. '죽란시사'의 규약이다.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한 번 모이고, 국화가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번 모이는데,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모임은 나이 어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나이 많은 사람에 이르고, 한 차례 돌면 다시 이어 간다. 아들을 낳은 사람이 있으면 모임을 주선하고, 수령으로 나가면 또 주선하고, 벼슬이 승진되면 그 사람이 주선하고, 자제 중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면 또 그 사람도 주선한다. 이에 이름과 규약을 적고 제목을 '죽란시사첩'이라 했는데 '죽란'이 있는 우리 집에서 열리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그동안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만 전해왔는데 2012년 성균관대 안대희 교수가 「익찬공서치계첩(翊贊公序齒稽帖)」을 발굴하여 이듬해 7월 『문헌과 해석』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익찬공서치계첩>은 다산을 포함한 남인 관료 15명의 명단을 태어난 순서대로 기록한 '서치(序齒)'와 모임의 규약인 '사약(社約)'을 담아 첩으로 묶은 필사본이다. 서치에는 회원들의 이름, 자(字), 생년 월일이 정확히 기록돼 있으며 다산이 서문에 쓴 순서와 일치한다.

또 서문에는 회원끼리 나이 차가 많이 나면 거북하다는 이유로 회원의 연배를 다산의 위아래 네 살 이내로 제한했다고 써있는데 서치의 명단은 그 기준에도 들어맞는다.

8개 조항으로 된 사약의 내용도 서문의 내용과 부합하되 좀 더 자세하다.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들 본인이 잔치를 마련한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편지를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구경한다."

사약에는 서문에는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준다."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주석 6)


안 교수는 "사실 죽란시사는 창작 서클의 차원을 넘어 남인 정치세력을 결집하는 모임이었는데, 외부에 정치적 결사로만 보여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규약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주석 7) 고 설명했다. 이 모임은 1796년부터 정약용이 1797년 윤 6월 곡산부사로 나갈 때까지 15개월 동안 활발히 활동하고, 그 뒤로도 가끔 모였다.


주석
6> 『동아일보』, 2013년 7월 29일.
7>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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