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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에 매달린 어린 아들, 아무도 엄마를 못 지켰다

[교제살인 ⑤] 공권력도 알았던 '살인의 전조'.... 최소한, 19명은 살릴 수 있었다

등록|2020.11.16 07:14 수정|2020.11.16 07:14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다섯 번째 기사다.[편집자말]
 

▲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끔찍한 소리가 섞이고 또 섞였다. (한 주차장의 외부 모습. 사진 촬영 장소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이주연


엄마는 "살려달라"고 했다.

너무도 무서웠을 것이다.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에서 아들이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다섯 살 작은 손으로 살인자의 뒤춤을 붙잡았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세 사람말고는 아무도 없는 주차장에서 끔찍한 소리가 섞이고 또 섞였다. 그렇게 칼에 찔리면서도 엄마는 애원했다. "살려달라"고 했다. 아들만은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도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

불과 5분전쯤 만 해도 아들과 엄마는 갈 곳이 있었다. 차에 타려는 두 사람을 막아선 그 남자는 막무가내였다. "아들과 병원에 가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도 그는 승용차 운전석 문을 놓지 않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며 자신의 차에 엄마를 태우려고 했다. 그의 차에는 휘발유로 추정되는 액체가 실려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무 말이 없는 엄마를 그 남자는 자신의 차로 옮겼다.

아들만 주차장에 남았다.

20년 후 아들은 스물 다섯 살이 된다. 그 해, 그 남자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보다 더 빨리 감옥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 남자에게 판사는 징역 20년형을 선고하면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피고인의 행위를 직접 목격한 피해자의 자녀는 한평생 감내하기 어려운 정신적 충격과 고통 속에 살아갈 것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사람의 생명은 국가와 사회가 보호하여야 할 최상의 가치이므로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든 용납할 수 없다."

엄마는 그 남자와 2017년 2월 헤어졌다. 그 남자는 그 후에도 엄마를 만나려고 했다. 전화를 계속 했고, 계속 집에 찾아왔다. 괴롭히고 또 괴롭혔다. 심지어 집 안으로 침입하기까지 했다. 엄마는 법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남자에게 내려진 '최고형'은 벌금 300만원이었다. 그게 불과 넉 달 전이었다.

아무도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

살인의 전조
 

▲ 2016년∼2018년에 발생한 '교제살인' 범행을 분석한 결과 전체 사건의 70.3%가 거주지 안, 거주지 근처 등 가해자와 피해자의 생활 공간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이 주차장에서 일어난 경우도 자주 눈에 띄었다. (사진 촬영 장소는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한승호


이런 비극이 많았다.

<오마이뉴스>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일어난 '교제 살인' 판결문 108건을 조사한 결과, 사건이 일어나기에 앞서 피해자를 상대로 한 폭행이나 주거 침입 등 범죄로 가해자가 형사 입건된 경우는 19건이었다. 폭행·상해 범죄가 10건으로 가장 많았고, 주거침입이 4건, 협박 감금이 3건이었다. 살인 미수, 방화도 각각 1건씩 있었다.

이처럼 '살인의 전조'가 있었던 사건 19건 중에 검찰로 송치된 사실이 확인된 경우는 12건이었다. 그 중 기소유예나 불기소처분을 받은 후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인 사건이 두 번이나 있었다. 앞서 폭행 등 범죄로 재판에서 집행유예형을 선고받고 동일 피해자를 죽인 경우도 4차례나 있었다.

결국, 피해자 108명 중 19명(17.6%)이 공권력의 부재 속에서, 또는 '솜방망이 처벌' 이후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죽음들은 또한 앞선 범죄 후 6개월 안에 대부분 일어났다. 앞서 피해자를 상대로 한 범죄 날짜, 형사 입건일 등이 판결문에 명시된 경우는 모두 16건이었는데, 그 중 15건의 살인이 6개월 안에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정책팀장은 "피해자가 처한 상황을 넓게 본다면 가해자의 위험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고 처벌의 폭이 넓어질텐데, 대부분 사건 그 자체만을 본다"면서 "그들이(가해자들이) 너무 쉽게 풀려난다"고 말했다. 또한, "피해자들 모두 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들은 모두 살 수 있었다
 

▲ 법원 '판결서 인터넷 열람' 시스템을 이용해 101가지 키워드를 조합하여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발생한 '교제살인' 판결문을 찾아봤다. 사랑했거나 의지했던 상대에게 3년 동안 목숨을 잃은 여성은 최소한 108명에 이른다. 이런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이정환


열 아홉 명이었다.

2016년 6월 4일, 그로부터 석 달 전 가해자는 피해자를 때려 검찰 수사를 받았다.

2016년 8월 10일, 그로부터 2년 전 가해자는 피해자를 칼로 찔렀다.

2016년 8월 19일, 그로부터 6개월 전 가해자는 피해자를 짓밟았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2016년 8월 23일, 앞서 가해자는 기소유예를 받았었다. 집행유예도 받았었다. 피해자는 같다.

2016년 9월 13일, 그로부터 두 달 전 피해자는 가해자를 주거침입으로 신고했다.

2016년 10월 3일, 그로부터 16시간 전 피해자는 자신을 때린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2016년 10월 6일, 가해자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다. 피해자를 폭행해 받은 벌이었다.

2016년 11월 24일, 그로부터 44시간 전 피해자를 폭행한 가해자는 경찰서에 있었다.

2017년 1월 9일, 같은 날 피해자 신고를 받은 경찰이 집에 다녀갔다.

2017년 2월 3일, 가해자는 피해자를 감금·폭행한 혐의로 기소 중이었다.

2017년 4월 3일, 그로부터 석 달 전 피해자를 폭행한 가해자는 수사를 받았다.

2017년 9월 6일, 그로부터 일주일 전 피해자를 때린 가해자는 형사입건됐다.

2017년 11월 23일, 가해자는 경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피해자를 때렸다.

2018년 4월 1일, 그로부터 6일 전 가해자는 난동을 부렸고 경찰이 출동했다.

2018년 4월 13일, 그로부터 넉 달 전 피해자 아파트에 침입한 가해자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2018년 5월 4일, 그 전에 가해자는 피해자를 폭행한 혐의로 9번이나 형사 입건됐다.

2018년 5월 11일, 가해자는 집행유예 중이었다. 3개월 전 피해자 승용차에 불을 질렀다.

2018년 5월 23일, 그로부터 6개월 전 피해자는 가해자를 주거침입으로 신고했다.

2018년 9월 12일, 가해자는 집행유예 중이었다. 10개월 전 그는 피해자를 식칼로 협박했다.

그 날, 피해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 날, 그들은 모두 살 수 있었다. ◆

취재 : 이주연·이정환
조사 : 이지혜·박지선·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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