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일단 맞아야, 경찰은 여자를 지킬 수 있다"
[교제살인 ⑩]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데이트폭력 관련 법, 하루빨리 마련돼야"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열 번째 기사다.[편집자말]
한 달 전 그녀가 이별을 통보했다. 그는 분노했고 여성의 일터에 찾아가 물건을 부쉈다. 여성은 경찰에 신고했다. 지난 8월 경기도에서 발생한 칼부림은 그에 대한 보복이었다.
여성은 왜 경찰 신고 후에도 보호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일까.
경찰에게 물어봤다
▲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 이희훈
"데이트폭력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중요한데, 가해자가 피해자의 거주지와 생활 공간에 접근 못하게 하는 조치(이하 임시 조치)를 현재는 경찰이 취할 수 없습니다.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피해자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부족한 거죠."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의 말이다. 피해자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피해가 발생한 후에 가능하다.
"가해자가 '죽이겠다'라고 협박을 했거나, 둘만 아는 상징적인 물건을 피해자 주거지에 두고 갔다거나, 피해자가 충분히 공포에 떨고 불안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해도 경찰이 대응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사전 예방'이 안 되는 거죠. 현행법상 일단 피해자가 맞아야, 피를 봐야 신변 보호를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구멍들이 있기에 피해자는 충분한 보호를 받을 수도, 경찰은 충분한 보호 조치를 취할 수도 없다는 설명이다.
조 기획관은 경찰청 첫 '여성안전기획관'이다. 지난해 12월 임명된 이래, 여성 폭력에 대응하는 경찰청 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있다. 매달 열리는 '여성치안정책협의체' 회의를 이끌며 여성 안전에 관련된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지난 8월 20일, 조 기획관을 만났다.
법이 없다
▲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 이희훈
앞서 10년 가량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으로 일했던 조 기획관은 데이트폭력 관련 입법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법 제정이 어렵다면 개정을 통해서라도 하루빨리 데이트폭력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20대 국회에서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아래 가정폭력처벌법) 일부개정안'을 보면, 법의 적용을 받는 '가정구성원'에 '데이트 관계에 있는 자'를 추가하도록 돼있다. 이 법만 통과됐어도 데이트 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한 피해자 보호 명령(임시 조치 등)이 가능했다는 게 조 기획관의 설명이다.
"미국도 데이트폭력 처벌법이 별도의 법으로 돼있지 않고, 데이트 관계에 있던 사람도 가정폭력방지법에 적용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제정안보다는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기 쉬운 측면이 있어서, 가정폭력 처벌법을 개정하는 게 실효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데이트폭력 처벌법을 반대하는 측은 '데이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거냐를 두고 반대 논리를 펼치는데, 전 사실 이해가 안 가요. 미국은 '데이트 관계란 애정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친밀한 관계를 일컫는다, 여기서 친밀성은 관계 유지 기간과 유형, 상호작용의 빈도로 판단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둘 간의 친밀성은 서로 주고받은 문자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데이트 관계를 왜 정의하기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물론 현 가정폭력처벌법에도 미비점은 여럿 있다. 가해자 접근 금지 임시 조치가 복잡하게 이뤄진다는 것도 지적 받고 있는 대목이다. 경찰이 검찰에 신청하고, 또 검찰이 법원에 청구하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조 기획관은 이 과정에만 5일 정도 소요된다고 했다.
"피해자는 긴급하게 임시 조치 신청 해달라 요청하는데, 검찰이 기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건의 위중함은 현장을 본 경찰이 가장 잘 알아요. 경찰이 바로 임시 조치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현재 발의 중에 있고, 올해 안에 통과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하나의 맹점은, 임시 조치를 위반해도 과태료가 300만 원, 500만 원 수준이라는 겁니다. 법이 개정돼 가해자 형사처벌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데이트폭력도 이에 준하는 적용을 받아서 피해자들이 두텁게 보호받을 수 있는 법안 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랑싸움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아직도 많아"
▲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 ⓒ 이희훈
법이 없다고 경찰이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조 기획관은 "법이 만들어지길 기다리기만 할 게 아니라, 경찰 역량으로 최대한 피해자를 보호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경찰 내부에서도 과제라고 생각한다"라며 "112에 한 번 신고한 이력이 있는 피해자가 2차로 신고한 후 '전화 잘못 걸었다'며 취소할 경우 일선 경찰들이 인근 순찰을 강화하는 등의 대응 플랜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데이트폭력 신고에 대한 경찰의 민감도를 높이는 방안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경찰이 데이트폭력 피해 당사자에게 취할 수 있는 보호 조치는 무엇이 있을까.
일단, 피해가 발생한 이후 경찰에 신고를 하면 신변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이후 112 긴급 신변보호 대상자로 등록되면 피해자가 112를 누를 시 해당 경찰에 '데이트폭력 긴급 신변보호 대상자'임이 고지되고 긴급 출동이 가능해진다.
일반적으로 데이트폭력 신고 이후에는 스마트 워치를 제공한다. 시계에 있는 버튼만 누르면 피해자의 정확한 위치가 바로 경찰서로 전달되며 긴급 출동이 이뤄진다. 또 경찰에서 임시 숙소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최대 5일 동안 머물 수 있다. 피해자 요청이 있을 경우 그 필요성을 판단해 주거지 인근에 CCTV를 설치하기도 한다.
조 기획관은 "가정폭력 방지법이 1997년도에 제정됐는데, 그때만해도 아내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 사적 영역인 가정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 없다는 문화가 만연했다"라며 "현재 데이트폭력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데이트라는 단어가 갖는 낭만성 때문에 연인끼리 사랑싸움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라며 "데이트폭력 사건은 살인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아서, 전 사회적으로 사안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
취재 : 이주연·이정환
조사 : 이지혜·박지선·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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