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죽이고도, 그들은 이걸로 23년 형량 줄였다
[교제살인 ⑨] 하지만, 어떤 판사가 집행유예 원심 파기한 이유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아홉 번째 기사다.[편집자말]
그러나, "너는 별 것도 아닌 걸 갖고 사람을 화나게 만들어"라는 여자친구의 그 말이 마지막이 됐다고 했다.
우산에 맞아... 25세, 그의 시계는 멈췄지만
▲ 4개월 후... 그 남자는 풀려났다. ⓒ 이정환
그들의 싸움은 '사건'이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 순간 화가 난" 가해자는 들고 있던 90cm 검정색 장우산을 1m 앞에 서있던 피해자를 향해 던졌다. 우산 꼭지가 피해자를 향해 날아왔다. 그대로 피해자 왼쪽 눈 부위 미간 사이를 찔렀다.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우산 꼭지가 눈 안쪽으로 6cm 이상 들어갈 정도였다고 했다. 나비뼈(머리 양쪽 눈높이에 있는 나비 모양의 뼈)가 부러졌고 그 파편이 뇌교(중추신경계 일부)를 손상시켰다. 피해자는 50분 후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피해자 나이는 25세였다.
2017년 4월 열린 재판에서 판사는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도록 하여 되돌릴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발생시켰다"고 했다.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는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4개월 후, 그는 풀려났다. 항소심에서 가해자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형을 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상해로 피해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점은 일반경험칙상 넉넉히 예상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피해자를 향해 우산을 강하게 던진 것, 우산 꼭지가 6cm 이상 피해자 눈 안쪽으로 찌른 것"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달라진 건 단 하나였다. 피고인이 피해자 유족에게 합의금을 건넸다.
2억 원이었다. 피해자 가족은 항소심에서 가해자에 대한 선처를 탄원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이번에 한하여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고 했다.
그는 돈 2억 원으로 자유를 샀다.
주먹에 맞아... 21세, 그의 시계는 멈췄지만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듯한 언행을 하였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때려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도 있다.
2018년 8월 20일 오전 4시 27분에 시작된 폭행은 13분 동안 이어졌다.
피해자의 목을 감은 후 주먹으로 피해자의 머리를 1회 내리쳤다. 다시 주먹을 휘둘러 피해자의 머리를 2회 세게 때려 피해자를 쓰러뜨렸다. 팔로 피해자의 목을 감아(일명 헤드락)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게 한 후, 손으로 2회 피해자의 머리를 때렸다. 피해자를 둘러메고 노상에 내려놓은 후 피해자가 일어나자 양손으로 피해자를 밀어 뒤로 넘어뜨렸다. 피해자의 목을 감아 돌려 바닥에 주저앉히고 피해자가 바닥에 쓰려져 눕자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1회 때리고 휴대폰을 피해자의 뒤통수에 던져 내리친 후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세게 때려 쓰러지는 피해자의 뒤통수가 출입문 바닥 모서리에 부딪히게 했다. 연이어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을 1회 때렸다.
판결문에 적힌 13분의 기록이다. 재판부는 "피해자를 무자비하게 폭행하여 지주막하출혈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했다. 상해치사 혐의가 적용된 가해자에게 징역 6년형이 선고됐다.
그 역시 풀려났다. 2019년 7월 대전고등법원 청주 제1형사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합의금 1억 5000만 원을 지급하고 원만히 합의하였고, 피해자의 아버지는 피해자의 휴대폰에 남아있는 사진, 문자 등을 통해 피고인과 피해자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던 사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선처를 바란다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21세이던 여자의 삶이 끝났다. 동갑이던 남자친구는 올해 23살이 됐다. 그는 자유의 몸이다.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108건의 교제살인 사건 가운데 항소심에서 형량이 줄어든 사건은 총 9건이었다. 이 중 '합의금 지급'이 판결문에 명시된 사례는 6건이다. 총 4억7300만 원(합의금 불상 1건 미포함)이 피해자 유족에게 전달됐다. 그리고 1심에 비해 줄어든 가해자 6명의 형량은 총 23년이었다.
그러나... 어떤 판사의 양형 이유
그래도, 돈이 다가 아니라고 말한 판결도 있었다.
저항하지 않는 피해자를 상대로 양손으로 머리채를 붙잡아 머리카락이 뭉치째 빠질 정도로 강하게 수회 흔든 후 양 손바닥과 양 주먹으로 피해자의 얼굴과 머리 등을 10회 이상 때려 피해자에게 외상성 경막하출혈, 늑골 다발골절 등의 상해를 가해 외상성 뇌출혈로 인한 중증뇌부종에 따른 뇌간마비로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의정부지법 11형사부 2017고합○○○ 1심 판결문 중)
피해자 나이는 46세, 그 죽음은 9000만원에 합의됐다. 1심 재판부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다른 남자와 교제 사실을 다그치던 중 순간적으로 격분하여 우발적으로 사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점,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합의금으로 9000만 원을 지급하고 유족들이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점, 범행 이후 119에 스스로 신고한 점"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꼽았다.
검사가 "원심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를 제기했다. 가해자는 피해자 자녀에게 3000만 원을 추가로 지급했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을 줄 알았던 항소심 판결에서 판사는 '그러나'를 말했다. 2018년 10월 서울고등법원 제3형사부 조영철 판사는 원심을 파기하고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고, 그러한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해를 회복할 수 없는 중대 범죄이다. 피고인이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고 합의하기는 하였으나, 피해자의 사망이라는 결과 발생에 대해서는 그 피해가 전혀 회복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점도 고려돼야 한다. (서울고법 3형사부 2018노○○○ 2심 판결문 중)
합의금을 추가로 지급했음에도 오히려 감옥행이 결정됐다.
▲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 중에는 피해자가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가해자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례가 3건이 있었다. 그 중 1건은 2심에서 실형이 선고됐다. ⓒ 이정환
최나눔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팀장은 "피해자 측의 피해를 국가가 보상하고, 이를 가해자에게 청구하여 받아내는 구상권 제도가 활성화 돼야 한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측에 대한 피해 보상이 감형으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내는데 국가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유호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유족에게 합의금을 지급했다고 형량이 깎이는 것은 데이트폭력 사건을 '사소하게 보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며 "데이트폭력이 사회적 문제이고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사건임을 인지하도록 사회 전반적으로 인식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돈이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고, 그러한 생명을 침해하는 것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피해를 회복할 수 없는 중대범죄"라는 조영철 판사의 이 말에 '국가의 역할'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
취재 : 이주연·이정환
조사 : 이지혜·박지선·한지연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