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다녔던 살인자... 그의 격분을 헤아리지 말라
[교제살인 ⑬] 현직 판사 "판사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양형 차이... 진지한 고민 필요"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 우리는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이 죽음을 '교제살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 기사는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열세 번째 기사다.[편집자말]
두 사람은 내연 관계였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로 비난하고 욕설하는 문자를 주고받았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술에 취했다고 했다. 헤어져달라는 자신에게 피해자가 비아냥거리는 말을 했다고 가해자는 주장했다. 그리고 격분하여 피해자를 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피고인이 피해자와 불륜관계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에게 폭언을 하거나 피고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찾아오는 등 피고인측을 괴롭히는 행위를 해왔다. 사건 당일에도 피해자가 집착하면서 비아냥거리자 피고인이 화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여 범행 경위에 일부 참작할 사정이 있다. (2018년 1월 발생한 살인 사건 판결문 중)
그 사정이 유리한 정상이 됐다. 피고인이 피해자 어머니에게 5000만 원을 주고 합의한 것도 항소심에서 추가된 '유리한 정상'이었다. 유리한 정상은 형량을 낮추는데 역할을 한다. 그는 항소심에서 징역 7년형(1심은 징역 12년형)을 받았다.
판사는 여자의 고통을 헤아렸다
두 사람은 석 달 남짓 사귀었다. 여자는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의 집에 무단 침입했다. 무릎을 꿇고 다시 만나달라고 요구했다. "나가지 않으면 소리 지르겠다"는 여자의 입을 남자가 틀어막았다. 다른 한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판사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는 더욱 범행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이트폭력 그 자체를 특별가중요소, 즉 특별히 형벌이 더 무거워야 하는 범죄로 판단했다. 판사는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피고인의 행위는 '데이트폭력'의 전형적인 형태로, 피해자는 피고인에게 주거지, 연락처, 직장, 가족 및 친구관계, 생활 습관, 행동반경 등 모든 요소가 광범위하게 노출되어 있어 범행에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는 한 때 피고인과 연인관계였다는 이유만으로 25살의 젊은 나이에 제대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꽃다운 삶을 마감하였다. 이는 더 이상 연인관계 내부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폐단이 크고 엄중한 처벌이 필요한 사회적 문제로서, 범행에 취약한 피해자를 상대로 한 신뢰관계 및 피해자의 약점을 이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죄질이 나쁘고 비난 가능성도 높다. (2018년 4월 발생한 살인 사건 판결문 중, 김정민 판사)
두 사건 모두 교살이다. 앞서 소개한 사건은 7년형이었고, 그 다음의 경우는 20년형이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그 이유를 잘못된 관행에서 찾았다. 그는 "판결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없어진다"면서 "이미 사망한 피해자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피해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공감해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의 상황은 가해자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범죄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건"으로만 반영된다는 것이다. 연인이 가해자로 돌변할 경우 범행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는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판결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음의 상처
▲ 그 끝은... 살인이었다. ⓒ 이주연
여기 또 다른 두 개의 사건이 있다. 먼저 소개할 사건은 상해치사다. 그 다음 소개할 사건은 살인이다. 공통점이 있다. 형량이 8년으로 같다.
범행현장 곳곳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혈흔,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하는데 사용한 부서진 전기밥솥과 커피포트 등 모습과 집의 상태, 피해자의 모습 등에 비추어 보면 피해자는 극심한 고통과 공포에 시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2017년 7월 발생한 상해치사 사건 판결문 중)
상해치사의 기본적인 권고 형량 범위는 3∼5년이다. 감경 요소가 적용되면 2∼4년으로, 가중 요소가 적용되면 4∼8년으로 각각 그 범위가 바뀐다. 이 사건의 경우 감경 요소가 있었다. 가해자가 119에 자신의 범행을 신고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양형기준을 벗어나 법률상 처단형의 범위 내에서 형을 정한다"며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잔혹한 범행 수법을 가중 요소로 더 크게 판단한 결과였다.
반면 어떤 판사는 제약회사를 다니던 건실한 청년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나열했다.
피고인은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장학금을 받기도 하였고 대학 졸업 후 제약회사에 입사하여 피해자와 동거하기 전까지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였다... (중략) 피해자는 피고인과 사귄 이후에도 여러 명의 다른 남자들과 만나면서 거짓말을 반복하였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피해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믿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피해자가 계속하여 거짓말과 외박을 반복하는 한편 피고인을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이자 마음의 상처와 그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분노가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커졌는데 사건 당일 피해자 말에 격분하여 이성을 잃고 피해자를 살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은 피해자를 칼로 찌른 직후 곧바로 112에 전화하여 자신이 범행을 신고하였고... (중략) 피고인의 가족들이 피해자의 유족들에게 9000만 원을 지급하고 합의하였으며 피해자 유족들은 피고인을 용서하고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2018년 10월 발생한 살인 사건 판결문 중)
재판부는 피해자가 거짓말을 반복하고 가해자가 무시하는 태도까지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24회 이상 칼로 찔렀다.
손문숙·조재연 한국여성의전화 활동가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 유발론이 강력하게 작동한 경우로 보인다. 두 활동가는 '데이트폭력 피해 당사자 지원 정책, 이대로 좋은가'란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양형 판단에 있어서도 피해자 유발론이 강력하게 작동하며 '다른 남자를 만났다', '갑작스런 이별통보' 등 가해자가 주장하는 범행동기가 감경 사유로 반영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찰, 검사, 판사 모두... 피해자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 <오마이뉴스>가 만난 경찰, 검사, 판사 모두 입을 모아 데이트폭력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권력'의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사건 대응과 처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잘못된 판단은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또 하나의 '흉기'가 될 수 있다. ⓒ 이정환
익명을 요청한 현직 판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양형 차이가 난다"라며 "그 편차가 납득할 수준 이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양형기준 제도가 시행되면서 예전에 비해 줄었지만 여전히 양형 편차가 제법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결국 판사들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라며 "범행의 심각성, 범죄의 사회적 의미, 피해자의 고통과 피해 회복 등에 대해 판사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야한다"고 말했다.
한 현직 검사 역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먼저 치사로 기소되는 경우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 대원칙을 따를 수밖에 없고, 살인을 입증하지 못할 경우의 부담 또한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전했다. 하지만 그는 "검찰조차 아직도 마초 문화가 뿌리박혀 있다"면서 "가정폭력이나 데이트폭력을 '뭐 그런 걸 갖고'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깨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도 "경찰 안에서도 (성인지 감수성 등에 대한) 온도차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귀에 진물이 나도록 2차 피해 예방 교육, 성인지 감수성 교육, 데이트폭력 유형별 대처법 등을 경찰 내부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 기획관은 "데이트폭력은 살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전 사회적으로 사안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오마이뉴스>가 만난 경찰, 검사, 판사 모두 입을 모아 '인식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죽고 있다. 최소한, 열흘에 한 명이 사귀던 남자에게 죽고 있다. ◆
취재 : 이주연·이정환
조사 : 이지혜·박지선·한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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