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선수도, 심지어 부모도, 메달 위해서라면 맞을 수 있다 생각"
[그 코치 봐준 그 판결 ⑩] 정문자 인권위 상임위원 "사법부 감수성도 스포츠계와 다르지 않아"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올해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거치며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20년 동안의 스포츠 폭력·성폭력 판결문 163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판결문에 담긴 사건의 심각성·특수성,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양형사유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이 기사는 그 마지막 열 번째다. [편집자말]
▲ 정문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이희훈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서 지난해 체육계 폭력에 대해 실태 조사를 했는데 피해 학생 스스로가 '맞아야 성적이 오른다', '팀 성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다'라고 답해 놀랐다. 심지어는 부모들마저 경기 성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폭력이 용인된다고 생각했다."
정문자 인권위 상임위원의 말이다. 현재 인권위 스포츠특별조사단(특조단)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정 위원은 지난 9월 28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다수의 체육계 피해자들이 폭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특조단은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선수가 조재범 전 코치로부터 겪었던 폭행·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것이 계기가 돼 지난 2019년 2월 출범된 기구다. 체육계 미투가 확산되면서 나온 국가 차원의 조치였다.
특조단은 출범 이후 2019년 4월부터 11월까지 약 8개월간 스포츠계 인권 실태에 관한 광범위한 직권조사에 나섰다. 운동부에 있는 초중고 학생 6만 3천여 명, 107개 대학 학생선수 8천여 명, 실업팀 선수 8천여 명을 대상으로 했다. 또한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130여 건의 체육계 폭력·성폭력 판결문을 분석한 보고서도 발간했다.
특히 정 위원은 지난 2019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직접 체육계 폭력·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보고했다. 당시 그는 문 대통령에게 선수들의 인권 보호를 국가 책무로 삼아야 한다는 제안을 전달하기도 했다.
정 위원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체육계 내부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면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10~20년간 유지될 수 있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국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그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맞아야 성적이 오른다? "이런 생각 체육계에 만연"
▲ 정문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이희훈
- 인권위가 대규모 체육계 인권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조사를 통해 확인한 '체육계의 현실'은 어땠나?
"초중고 학생 선수들 가운데 폭력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상당했다. 동년배 일반 학생들보다 1.7배 높았다. 성관계를 요구받거나, 강간 피해를 입은 사례도 24건 있었다. 실업팀 선수들은 성폭력 피해 경험 비율이 11.4%로 나왔는데, 초중고(4.6%), 대학생(9%) 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치였다. 체육계 내부의 위계구조, 선수들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감시와 통제 등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었다고 본다."
- 많은 선수들에게서 비슷한 피해 유형이 발견된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메달을 따거나 국위선양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폭력 행위도 용인될 수 있다는 생각이 체육계에 만연해있다. 인권위에 접수된 진정사건에 따르면, 다수의 가해자들은 대체로 '그 당시에는 (본인이 저지른) 폭력·성폭력 행위가 잘못인지 몰랐다'거나, '과거 선배들도 그렇게 해왔다', '내부 관행이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일부 피해자들마저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 피해 선수들은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나.
"폭력을 경험한 운동부 학생 상당수가 '참고 맞아야 성적이 오른다', '팀 성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다'고 답변했다. 심지어는 일부 부모들도 같은 생각을 공유했다. 아이가 체육특기생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식이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지만, 일부 피해자들조차 때리는 행위에 대해 문제 의식이 없었다."
지난 11월 7일 인권위가 발표한 실태 조사 내용에 따르면, 신체 폭력을 경험한 초중고 학생선수 3288명 가운데 707명(21.4%)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폭행)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이를 두고 인권위는 "(선수들이)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미 폭력을 훈련이나 실력 향상을 위한 필요악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건의 실태조사뿐만 아니라, 과거 판례까지 분석했다. 그 작업을 진행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법원은 피해 선수들에게 주어진 최후의 선택지다. 체육계 내부에서 가해자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내려지지 않아 마지막 수단으로 법원에 호소를 한다. 하지만 법원마저 가해자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법원의 가벼운 처벌이 가해자들을 현장으로 복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됐다. 이런 문제 때문에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건에 대한 과거 판례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평가한다면?
"사법부의 감수성 또한 스포츠계 내부의 시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판례에서는 법원이 지도자의 폭력을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면서 양형요소로 고려했다.(관련 기사 : 코치 구타로 뇌손상에 의식불명... 법원은 왜 봐줬나 http://omn.kr/1ouu4) 가해자가 과거에 어떻게 메달을 땄고, 체육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감형 참작사유로 고려하기도 했다. 체육계 폭력이 가벼이 여겨지거나 외면되어온 배경에는 사법부의 판단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관련 기사 : 기괴한 성범죄에도... 가해자 '스포츠 인생' 걱정한 재판부 http://omn.kr/1ouuh)
- 문제적인 판결이 나온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법부가 체육계에서 발생한 사건들의 배경과 맥락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체육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겉으로만 보면 다른 형사 사건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사건 이면의 맥락에 있다. 체육계의 집단 우선주의, 견고한 위계질서, 선수들에게 끼치는 보이지 않는 불이익 같은 것들이다. 체육계 현실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당한 처벌이 내려질 수 있다."
"사건 터질 때마다 대책 쏟아지지만... 체육계-문체부만으로는 부족하다"
▲ 정문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이희훈
-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대책이 쏟아지지만, 비슷한 문제가 되풀이되고 있다.
"고 최숙현 선수 사건을 통해 체육계 현실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정부가 수차례 대책을 내놓고, 인권위가 여러 차례 권고를 했음에도 정작 현장의 폭력·성폭력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체육계의 피해자 보호체계 또한 얼마나 엉망인지가 드러났다."
- 최숙현 선수 아버지가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 최 선수 아버지는 가해자에 대한 빠른 처벌을 원하셨다. 하지만 인권위는 처벌하는 곳이 아니고 권고하는 곳이다보니 일부 한계가 있었다. 또한 조사 기간도 약 2~3개월 소요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인권위는 최 선수 아버지께 이런 문제를 말씀드렸고, 이후 아버지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셨다. 그래서 인권위가 끝까지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인권위가 책임지고 최 선수에 대한 진정사건 조사를 하지 못 한 점에 대해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대책이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나.
"폭력에 대한 체육계 내부의 인식도 문제지만, 정부나 체육단체가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내용이 바뀌는 것도 문제다. 특조단이 낸 직권조사 결정문에는 '체육계 문제를 뿌리 뽑을 수 있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제안이 들어갔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1~2년이 아니라, 10~20년 유지되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정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이전처럼 대한체육회, 문체부 정도의 대책만으로는 부족하다."
- 고 최숙현 선수 사건 이후에도 많은 대안이 나왔다. 어떻게 평가하나.
"가장 환영할만한 내용은 국민체육진흥법 목적에서 '국위선양'이라는 단어가 삭제된 것이다. 수년간 주장한 게 이제야 바뀌었다. 이것이 국내 스포츠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시작이 되길 바란다. 올해 8월에는 스포츠윤리센터가 출범됐다. 체육계 폭력·성폭력 사건을 근절하기 위해선 정부가 이 문제를 국가 책무로 가져가야만 하는데, 이 일환으로 스포츠윤리센터가 만들어졌다. 지금처럼 국가가 선수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기조를 놓치지 않고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 정문자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이희훈
- 특조단의 향후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
"올해부터 각 학교 및 스포츠 종목별 현장방문을 진행해 선수들의 문제를 직접 듣고 있다. 스포츠 인식 개선을 위한 캠페인도 기획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체육계의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특조단이 출범 이후 1년 7개월이 지났지만, 193건의 진정이 접수됐다. 123건이 폭력이고, 나머지 70건은 비리 등과 관련된 내용이다. 2019년 전만 해도 대한체육회나 문체부에 신고된 건 1년에 20여 건 정도였다. 특조단 출범 이후 진정 수가 늘긴 했지만, 초중고·대학생·실업팀 전체의 약 30%가 폭력 피해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현재의 진정 건수는 아직도 부족한 감이 있다. 피해자들이 지금보다 더 편하게 믿고 신고할 수 있도록 시스템 구축이 마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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