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의리 시험하려다가 난장판
[김종성의 히,스토리: 라이벌 열전] 전두환·노태우 vs. 김복동
군인 김복동(1933~2000)은 전두환과 더불어 육사 11기의 선두 주자였다. 1973년 준장으로 진급할 때도 전두환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51년에 최초의 4년제 정규 육사에 입학한 이 기수에서는 1931년생인 전두환의 리더십이 더 부각됐지만, 김복동 역시 만만치 않았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대부로 불리며 하나회 주축인 11기와 긴밀했던 윤필용(1927~2010, 육사 8기) 전 예비역 소장은 1991년 1월 18일 자 <중앙일보> 기사 '윤 장군과 육사 11기' 인터뷰에서 "리더는 단연 전씨였죠"라면서도 "김복동씨도 리더십으로는 쌍벽을 이루었죠"라고 평했다.
전두환은 동기생들보다 나이가 많고 공적인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를 형님으로 부르는 동기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전두환보다 두 살 어린 김복동은 형님 소리를 입에 담지 않았다.
쿠데타 제의 거절
1979년 12·12쿠데타 때 수도경비사령부에 근무한 김충립 당시 보안반장의 수기를 게재한 <신동아> 인터넷판 2016년 8월 23일 자 기사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에도 그런 이야기가 소개됐다.
육사 11기들과 인연이 깊은 김충립은 "김복동 장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며 "전두환 사령관보다 군번이 빨라 정규 육사 출신 중 제일 상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전 사령관에게 한 번도 형님이라고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복동은 전두환이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앞서가는 그룹이었던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로서 전두환과 경쟁했던 김복동은 46세 때인 1979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내리막길 정도가 아니라 곤두박질 정도의 중대 변화였다.
박정희가 피살된 그해 10·26사태 때 김복동은 경호실 차장보였다. 그래서 도의적 책임을 피해나갈 길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강원도의 군단 부군단장으로 전출된 그를 향해, 그해 연말에 손길이 다가갔다. 그가 결코 형님으로 부르지 않는 전두환 측의 쿠데타 참여 제의였다.
그 쿠데타는 그를 대장으로 하는 쿠데타가 아니라 전두환을 대장으로 하는 쿠데타였다. 그는 제의를 거부했다. 이 일은 10·26으로 이미 타격을 받은 그에게 설상가상의 손실을 안겼다. 잘 나가던 그가 군복을 벗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듬해 7월 육사 교장이 된 뒤 중장으로 진급하고 1982년 1월 49세 나이로 군복을 벗었다.
그가 12·12를 거부한 일은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신념의 표출로 해석됐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1992년에 김영삼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진 소신 있는 장군 출신"(<동아일보> 1992.2.12, 3면)이라는 말로 극찬했다.
하지만 그의 12·12 참여 거부를 이해하려면, 5·16 쿠데타 및 그 이후의 행적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는 5·16 쿠데타를 지지했고,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 학원팀에서 활동했다. 또 김종필 등의 육사 8기를 제거하기 위한 1963년 7·6쿠데타 음모에도 가담했다가 발각됐다.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동아일보> 1993.8.26. 5면)라며 박정희가 무마하지 않았다면 쿠데타에 실패한 30세의 김복동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이 같은 정치지향적 행적을 볼 때, 12·12 당시의 김복동이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소신 때문에 참여를 거부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쿠데타 참여를 거부하고 결국 군복을 벗게 됐지만, 그는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중장으로 진급한 뒤 명예롭게 물러났고, 전역 뒤에는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됐다. 신군부의 주축인 육사 11기 출신인데다가 거기서도 선두를 달리던 주자였고, 또 최대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노태우 의리 테스트
불명예 퇴진은 면했지만, 전두환과는 더 멀어지고 한 살 많은 매부인 노태우와도 멀어졌다. 신군부 정권의 두 핵심과 소원해지게 된 것이다. 1992년 11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5공 때 전(全) 전 대통령과 관계 불편'은 "그는 당시 군의 정치 개입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로 인해 5공 내내 전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고, 노 대통령과도 서먹서먹한 관계를 계속했다"고 말한다.
김복동이 전두환뿐 아니라 매부 노태우와도 관계가 악화하던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12·12를 계기로 김복동 등을 제치고 11기의 2인자로 우뚝 선 노태우가 1980년 8월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직을 승계함으로써 정권 2인자 지위에 다가선 것을 축하하는 작은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위의 김충립 수기에 따르면, 노태우보다 먼저 보안사령관 직을 제의받았다가 고사한 정호용은 김충립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태우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2인자가 되는 노태우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12·12 이후로는 노태우보다 위상이 낮아졌지만 12·12 이전만 해도 상급자였던 김복동에 대해 노태우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근거로 향후의 노태우를 점쳐보기로 한 것이다.
정호용은 취임 축하 파티의 주인공인 노태우가 스스로 상석에 앉을 것인지 아니면 상급자에게 상석을 양보할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김충립 기고문의 제목으로 쓰인 '노태우 의리 테스트'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인 자리이므로 아무 생각 없이 상석에 앉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군대 상급자를 상석에 앉힐 것인가가 이 테스트의 관건이었다.
정호용과 김충립의 기획에 따라 축하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북고 동기생인 김복동·노태우·정호용·김윤환이었다. 당시 이들 중의 최상급자는 김복동이었다. 김충립의 제안에 따라 이런 자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사전에 정호용은 김충립에게 "노태우가 보안사령관이 됐다고 김복동 장군을 제치고 상석에 앉을 리가 없어"라고 단언했다. 김충립 기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몇 시간 뒤 김충립은 식당 사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김충립 기고문에 "음식점 마담"으로 표기된 사장의 전화였다. 식당 사장은 김충립을 실장님으로 불렀다.
김복동과 노태우의 관계는 나빠졌고, 노태우는 뒤늦게 10·26 책임을 물어 김복동을 전역시키려 했다. 하지만 정호용의 중재로 김복동은 육사 교장 자리를 거쳐 명예롭게 군을 떠나게 됐다.
1.75안 선택한 김복동
신군부에서 밀려나고 전두환·노태우와 대립하게 된 김복동에게는 2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두 사람과 대항하는 편에 서는 것이고(1안), 또 하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2안).
상황은 다르지만 12·12쿠데타로 실각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6월항쟁 뒤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들어가서 신군부를 비판했다. 정승화는 1안을 선택한 것이다.
김복동은 1.75안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2안에 가깝지만, 1안도 약간 담은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타격을 입고 매부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 김복동은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가 택한 당은 전·노가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이었다. 전·노의 보금자리로 들어가기로 했으니 2안을 선택한 셈이 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2도 아니고 1.5도 아닌 1.75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노태우는 1.75를 받아주지 않았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6공에 들어서도 친인척의 정치참여를 배제한 노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13대 총선 때 출마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박철언 전 의원도 노태우 부인인 김옥숙의 사촌동생이다. 따라서 노태우가 김복동의 정계 진출을 막은 것이 그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김복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통령 친인척이었던 1992년에 그는 14대 총선을 통해 국회 진출에 성공했다. 1992년이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였던 데다가 1990년 3당 합당 뒤 민주계 김영삼의 정치 공세로 노태우가 한층 약해진 시점을 이용해 김복동은 정치권 진출을 성사시켰다. 전두환은 이미 약해졌고 노태우는 거의 약해지는 시점에 김복동이 일어난 것이다.
군부독재가 청산되던 그 시기에 김복동이 정승화의 길을 걸었다면, 김복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1안을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를 보여주는 2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
하나는 그가 노태우의 주선으로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본 뒤에 일어난 일이다. PK(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이 TK(대구·경북)의 지지를 받고 1992년 대선에 승리하자면 대구동구갑에서 당선된 김복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민자당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노태우가 김복동과 김영삼을 엮어주었고 김복동 자신도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김복동은 김영삼과 끝내 친구가 되지 못했다. 김복동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반(反)김영삼 노선을 선명히 했다. 체질에 안 맞는다는 언급은 1992년 12월호 월간 <길> 기사에 나온다.
김영삼은 친화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김복동이 김영삼과 친해지지 못한 것이 김영삼의 성격 때문일 리 없다. 둘이 가까워지지 못한 것은 김복동이 전두환처럼 보스 기질을 가진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김영삼이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김복동이 1안을 선택했다면, 민주화 운동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1안에 별 마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하나는, 1992년 대선 직전에 노태우·김영삼에게 타격을 주고자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정주영은 그 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통일국민당 창당은 6월항쟁 이후의 변화에 발맞춰 재벌체제를 이어가려는 기획에 불과했다. 6월항쟁의 정신에 맞는 정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목이 '김복동 탈당 파동의 전모'인 위의 월간 <길> 기사에도 정리돼 있듯이, 그의 국민당 입당 선언은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가 탈당 기자회견을 위해 동대구 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경찰과 안기부 직원 30여 명이 차량을 막아선 뒤 그를 서울 삼청동 안가로 연행했다.
낯선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다음날 아침 청와대 조찬 자리로 옮겨졌다. 그런 뒤 그의 명의로 탈당을 번복하는 보도자료가 나오고 이를 부정하는 김복동 보좌진의 반박 성명이 나오는 등의 어수선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는 결국 정주영의 품에 안겼다. 이는 전·노와는 함께할 수 없었던 그의 운명을 반영한다. 김영삼뿐 아니라 전·노와도 화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4년 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신군부 출신들이 싫어하는 구군부의 당으로 가서 당선된 것이다. 군부 출신들과는 마음이 맞았던 것이다.
전·노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결국 군부 출신들의 당으로 간 것은 6월항쟁 이후의 시대 흐름과 이탈된 그의 정치행보를 반영한다. 전·노를 이기는 길은 6월의 흐름을 타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와 어긋나는 길을 택했다.
신군부에 의해 밀려난 김복동은 뒤늦게나마 정치권에 들어갔지만, 이 시대는 육사 11기가 최첨단 엘리트였던 1979년 이전의 시대가 아니었다. 김복동에게 최적화된 조건이 갖춰진 시대가 아니었다. 육사 출신들에게 유리했던 1987년 이전이 아니었다.
정치인 김복동이 전두환·노태우를 극복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없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다. 2000년 4월 19일 67세를 일기로 김복동은 세상을 떠났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의 대부로 불리며 하나회 주축인 11기와 긴밀했던 윤필용(1927~2010, 육사 8기) 전 예비역 소장은 1991년 1월 18일 자 <중앙일보> 기사 '윤 장군과 육사 11기' 인터뷰에서 "리더는 단연 전씨였죠"라면서도 "김복동씨도 리더십으로는 쌍벽을 이루었죠"라고 평했다.
쿠데타 제의 거절
▲ 12.12 쿠데타의 핵심 관계자들12.12 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까지 무력 진압하면서 차례로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19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 기념촬영한 12.12 핵심 관계자들의 모습. 이 가운데에는 상황이 완전히 끝난 13일 아침에 뒤늦게 합류한 장성들도 있으며 거사과정서 소외되었던 보안사 간부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 연합뉴스
1979년 12·12쿠데타 때 수도경비사령부에 근무한 김충립 당시 보안반장의 수기를 게재한 <신동아> 인터넷판 2016년 8월 23일 자 기사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에도 그런 이야기가 소개됐다.
육사 11기들과 인연이 깊은 김충립은 "김복동 장군은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며 "전두환 사령관보다 군번이 빨라 정규 육사 출신 중 제일 상관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전 사령관에게 한 번도 형님이라고 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김복동은 전두환이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앞서가는 그룹이었던 육사 11기의 선두주자로서 전두환과 경쟁했던 김복동은 46세 때인 1979년에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내리막길 정도가 아니라 곤두박질 정도의 중대 변화였다.
박정희가 피살된 그해 10·26사태 때 김복동은 경호실 차장보였다. 그래서 도의적 책임을 피해나갈 길이 없었다. 이 때문에 강원도의 군단 부군단장으로 전출된 그를 향해, 그해 연말에 손길이 다가갔다. 그가 결코 형님으로 부르지 않는 전두환 측의 쿠데타 참여 제의였다.
그 쿠데타는 그를 대장으로 하는 쿠데타가 아니라 전두환을 대장으로 하는 쿠데타였다. 그는 제의를 거부했다. 이 일은 10·26으로 이미 타격을 받은 그에게 설상가상의 손실을 안겼다. 잘 나가던 그가 군복을 벗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듬해 7월 육사 교장이 된 뒤 중장으로 진급하고 1982년 1월 49세 나이로 군복을 벗었다.
그가 12·12를 거부한 일은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신념의 표출로 해석됐다. 그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1992년에 김영삼 민주자유당(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진 소신 있는 장군 출신"(<동아일보> 1992.2.12, 3면)이라는 말로 극찬했다.
하지만 그의 12·12 참여 거부를 이해하려면, 5·16 쿠데타 및 그 이후의 행적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는 5·16 쿠데타를 지지했고,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 학원팀에서 활동했다. 또 김종필 등의 육사 8기를 제거하기 위한 1963년 7·6쿠데타 음모에도 가담했다가 발각됐다.
"젊은 사람들이 다른 생각 말고 위에서 주어지는 일이나 잘하라고 해"(<동아일보> 1993.8.26. 5면)라며 박정희가 무마하지 않았다면 쿠데타에 실패한 30세의 김복동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이 같은 정치지향적 행적을 볼 때, 12·12 당시의 김복동이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소신 때문에 참여를 거부했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쿠데타 참여를 거부하고 결국 군복을 벗게 됐지만, 그는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중장으로 진급한 뒤 명예롭게 물러났고, 전역 뒤에는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됐다. 신군부의 주축인 육사 11기 출신인데다가 거기서도 선두를 달리던 주자였고, 또 최대 사조직인 하나회 출신이라는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노태우 의리 테스트
▲ 김복동 전 육군 중장 ⓒ 자료사진
불명예 퇴진은 면했지만, 전두환과는 더 멀어지고 한 살 많은 매부인 노태우와도 멀어졌다. 신군부 정권의 두 핵심과 소원해지게 된 것이다. 1992년 11월 21일 자 <동아일보> 기사 '5공 때 전(全) 전 대통령과 관계 불편'은 "그는 당시 군의 정치 개입을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로 인해 5공 내내 전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고, 노 대통령과도 서먹서먹한 관계를 계속했다"고 말한다.
김복동이 전두환뿐 아니라 매부 노태우와도 관계가 악화하던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12·12를 계기로 김복동 등을 제치고 11기의 2인자로 우뚝 선 노태우가 1980년 8월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직을 승계함으로써 정권 2인자 지위에 다가선 것을 축하하는 작은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위의 김충립 수기에 따르면, 노태우보다 먼저 보안사령관 직을 제의받았다가 고사한 정호용은 김충립의 제안을 받아들여 노태우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2인자가 되는 노태우를 신뢰할 수 있을 것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12·12 이후로는 노태우보다 위상이 낮아졌지만 12·12 이전만 해도 상급자였던 김복동에 대해 노태우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근거로 향후의 노태우를 점쳐보기로 한 것이다.
정호용은 취임 축하 파티의 주인공인 노태우가 스스로 상석에 앉을 것인지 아니면 상급자에게 상석을 양보할 것인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김충립 기고문의 제목으로 쓰인 '노태우 의리 테스트'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인 자리이므로 아무 생각 없이 상석에 앉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군대 상급자를 상석에 앉힐 것인가가 이 테스트의 관건이었다.
정호용과 김충립의 기획에 따라 축하 파티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북고 동기생인 김복동·노태우·정호용·김윤환이었다. 당시 이들 중의 최상급자는 김복동이었다. 김충립의 제안에 따라 이런 자리를 만들기는 했지만, 사전에 정호용은 김충립에게 "노태우가 보안사령관이 됐다고 김복동 장군을 제치고 상석에 앉을 리가 없어"라고 단언했다. 김충립 기고문은 이렇게 말한다.
주말 저녁 서울 한남동 '향교'에 정호용·김복동·노태우·김윤환 4명이 앉았다. 정 사령관이 노 사령관에게 상석을 권하자, 그는 두말없이 상석에 앉았다. 상관인 김복동 장군이 하석에 앉게 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음식점을 떠났다.
몇 시간 뒤 김충립은 식당 사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김충립 기고문에 "음식점 마담"으로 표기된 사장의 전화였다. 식당 사장은 김충립을 실장님으로 불렀다.
김복동 장군이 상을 뒤엎는 바람에 술자리가 난장판이 돼버렸어요. 실장님이 오셔서 정리를 좀 해주세요.
김복동과 노태우의 관계는 나빠졌고, 노태우는 뒤늦게 10·26 책임을 물어 김복동을 전역시키려 했다. 하지만 정호용의 중재로 김복동은 육사 교장 자리를 거쳐 명예롭게 군을 떠나게 됐다.
1.75안 선택한 김복동
▲ 1988년 1월 5일,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노태우 차기 대통령의 예방을 받고 새해 인사를 나누며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신군부에서 밀려나고 전두환·노태우와 대립하게 된 김복동에게는 2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두 사람과 대항하는 편에 서는 것이고(1안), 또 하나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었다(2안).
상황은 다르지만 12·12쿠데타로 실각한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은 6월항쟁 뒤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에 들어가서 신군부를 비판했다. 정승화는 1안을 선택한 것이다.
김복동은 1.75안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2안에 가깝지만, 1안도 약간 담은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타격을 입고 매부인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 김복동은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그가 택한 당은 전·노가 만든 민주정의당(민정당)이었다. 전·노의 보금자리로 들어가기로 했으니 2안을 선택한 셈이 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승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2도 아니고 1.5도 아닌 1.75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노태우는 1.75를 받아주지 않았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는 "6공에 들어서도 친인척의 정치참여를 배제한 노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13대 총선 때 출마하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노태우 정권에서 승승장구한 박철언 전 의원도 노태우 부인인 김옥숙의 사촌동생이다. 따라서 노태우가 김복동의 정계 진출을 막은 것이 그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김복동은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통령 친인척이었던 1992년에 그는 14대 총선을 통해 국회 진출에 성공했다. 1992년이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였던 데다가 1990년 3당 합당 뒤 민주계 김영삼의 정치 공세로 노태우가 한층 약해진 시점을 이용해 김복동은 정치권 진출을 성사시켰다. 전두환은 이미 약해졌고 노태우는 거의 약해지는 시점에 김복동이 일어난 것이다.
군부독재가 청산되던 그 시기에 김복동이 정승화의 길을 걸었다면, 김복동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1안을 걸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를 보여주는 2개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
하나는 그가 노태우의 주선으로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본 뒤에 일어난 일이다. PK(부산·경남) 출신인 김영삼이 TK(대구·경북)의 지지를 받고 1992년 대선에 승리하자면 대구동구갑에서 당선된 김복동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게 민자당 지도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따라 노태우가 김복동과 김영삼을 엮어주었고 김복동 자신도 김영삼과 친해지려고 노력해봤다. 하지만 김복동은 김영삼과 끝내 친구가 되지 못했다. 김복동은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라며 오히려 반(反)김영삼 노선을 선명히 했다. 체질에 안 맞는다는 언급은 1992년 12월호 월간 <길> 기사에 나온다.
김영삼은 친화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김복동이 김영삼과 친해지지 못한 것이 김영삼의 성격 때문일 리 없다. 둘이 가까워지지 못한 것은 김복동이 전두환처럼 보스 기질을 가진 사람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김영삼이 민주화운동 지도자 출신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김복동이 1안을 선택했다면, 민주화 운동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도저히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가 1안에 별 마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하나는, 1992년 대선 직전에 노태우·김영삼에게 타격을 주고자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정주영은 그 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큰 족적을 남겼지만, 그의 통일국민당 창당은 6월항쟁 이후의 변화에 발맞춰 재벌체제를 이어가려는 기획에 불과했다. 6월항쟁의 정신에 맞는 정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목이 '김복동 탈당 파동의 전모'인 위의 월간 <길> 기사에도 정리돼 있듯이, 그의 국민당 입당 선언은 현직 대통령의 처남 납치 사건으로 이어졌다. 그가 탈당 기자회견을 위해 동대구 톨게이트에 들어서자, 경찰과 안기부 직원 30여 명이 차량을 막아선 뒤 그를 서울 삼청동 안가로 연행했다.
낯선 방에서 하룻밤을 보낸 그는 다음날 아침 청와대 조찬 자리로 옮겨졌다. 그런 뒤 그의 명의로 탈당을 번복하는 보도자료가 나오고 이를 부정하는 김복동 보좌진의 반박 성명이 나오는 등의 어수선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는 결국 정주영의 품에 안겼다. 이는 전·노와는 함께할 수 없었던 그의 운명을 반영한다. 김영삼뿐 아니라 전·노와도 화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4년 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의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했다. 신군부 출신들이 싫어하는 구군부의 당으로 가서 당선된 것이다. 군부 출신들과는 마음이 맞았던 것이다.
전·노와 대립각을 세우면서도 결국 군부 출신들의 당으로 간 것은 6월항쟁 이후의 시대 흐름과 이탈된 그의 정치행보를 반영한다. 전·노를 이기는 길은 6월의 흐름을 타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와 어긋나는 길을 택했다.
신군부에 의해 밀려난 김복동은 뒤늦게나마 정치권에 들어갔지만, 이 시대는 육사 11기가 최첨단 엘리트였던 1979년 이전의 시대가 아니었다. 김복동에게 최적화된 조건이 갖춰진 시대가 아니었다. 육사 출신들에게 유리했던 1987년 이전이 아니었다.
정치인 김복동이 전두환·노태우를 극복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없었던 데는 그런 이유도 작용했다. 2000년 4월 19일 67세를 일기로 김복동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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