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91세 엄마의 질문, "늙어도 재미나게 살아져?"

[두 여자가 다시, 같이 삽니다] 새롭게 시작된 어머니와 나의 인연

등록|2020.11.19 08:53 수정|2020.11.19 09:08
91세 엄마와 51세 딸이 다시 고향에서 함께 사는 이야기를 씁니다.[편집자말]
나 : "어머니. 어머니랑 나랑 앞으로 한 10년 재미나게 살아보까?"
어머니 : "10년이나 살아질 건가?"

나 : "어머니 지금 몇 살?"
어머니 : "몰라."

나 : "어머니 몇 년생?"
어머니 : "1930년."

나 : "올해는 몇 년?"
어머니 : "몰라."

나 : "달력 봐봐."
어머니 : "2020년?"

나 : "그럼 어머니 몇 살?"
어머니 : "(한참 빼기 암산을 한 후) 90?"

나 : "우리 나인 한 살 더해야 되니까 어머니 올해 91세라. 그니까 앞으로 10년이면 101세 되겠다."
어머니 : "아휴~~"

나 : "할머니도 104세에 돌아가셔시난(돌아가셨으니) 어머니도 앞으로 10년 재미나게 잘 살 수 있겠지~"
어머니 : "늙어도 재미나게 살아져?"

나 : "어머니 젊을 때는 어신(없는) 돈에 자식 여덟 명 키우고, 아버지 목회 뒷바라지 허느랜(하느라) 고생고생해신디 이젠 그런 힘든 거 다 지나갔잖아. 살 집도 있고, 좀 있다 같이 살 딸도 있고, 돈 들어갈 자식들도 엇고 허난(없으니까) 어머니 몸만 건강하믄 재밌게 살아질 거 아닌가?"
어머니 : "게메이?(그럴까?)"


지난 2017년 초, 90세의 아버지가 고관절 골절로 병원에 3주 입원하시면서 본격적으로 힘든 노환의 증상이 시작되었다. 상태가 좋을 때는 버스를 타고 다니실 만큼 좋아지기도 하셨지만, 늘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계셨다. 그해 여름, 나는 약 11년 정도 근무하던 직장인 실상사작은학교를 그만두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가을에 제주의 부모님 집에 내려가서 한 달 조금 넘게 함께 생활하면서 나이 드신 어머니가 나이 드신 아버지를 힘겹게 돌보며 살아가시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었다. 제주를 떠난 후에도 부모님 두 분이서 살아가고 있을 힘겹고 불안한 일상의 순간들이 자꾸 떠올라 마음 한켠이 불안과 걱정으로 묵직했다.

2019년 말, 아버지의 증세가 심각해져서 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두 달 반 정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시던 아버지는 올해 1월 31일 숨을 거두셨다. 호흡이 곤란해지기도 하고, 몸이 붓기도 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총체적으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는 병원에 찾아가는 우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힘이 닿는 한 전하셨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의 마음이 우러날 수 있구나!' 하는 놀라움을 딸에게 전해주고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혼자 지내게 된 아흔의 어머니

91세의 어머니가 이제 혼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23세에 결혼해서 목회자인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여덟 명의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살아온 내 어머니가 거의 70년 간의 소위 '돌봄노동'을 마무리한 시점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돌보아야만 하는 긴 시간을 지나니 이제 어머니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아주 단순한 것이라도 새로운 이야기는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가스불을 켜는 등 위험한 일은 안 한 지가 1년쯤 되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의 노인주간보호센터를 다니게 되어 그곳에서 아침 간식과 점심, 오후 간식을 챙겨주신다. 절실하게 꼭 필요한 상황에 국가의 복지정책이 손내밀어주는 걸 피부로 느끼면서 조금 애국자가 되고 있기도 하다.
 

실상사의 어느 날2년 가까이 주 이틀을 실상사 공양간에서 밥을 하였다. 당연히 생계를 위한 일이었다. 아담한 절에서 단순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 이진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내심 결정을 내렸다. 어머니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할 상황이고, 직장에 매여 있지 않고 돌보아야 할 가족도 없는 내가 결정하고 움직이기가 가장 쉽겠구나 싶었다.

올 봄, 형제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 마음을 이야기했고, 늦어도 1년 안에 지리산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내려가기로 했다. 지금은 어머니와 가까이에 살고 있는 오빠가 거의 매일 어머니 집을 다녀가면서 어머니를 챙기고 있는 중이다.

내가 결정한 일이면서도 14년간의 지리산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제주도에 가기로 결정했다는 말을 친구에게 하면서 울컥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초록이 예쁘기 시작하던 봄, 함양의 상림공원 벤치에서였다. 얼마 전 또 그 곳을 친구들과 갔다가 그 때 얘기가 나왔다.

'그때 샘이 여기서 울었었는데...' 
 

단풍이 예쁜 산내 뚝방길이렇게 물들어가던 때 산내를 떠나게 되었다. 절을 오갈 때도 그렇고 종종 다니던, 차가 별로 없어 좋았던 길이 이젠 추억 속 한 장면으로 남겠지. ⓒ 이진순


지금은 지리산 집을 팔고, 제주도 전셋집을 구하고, 사람들과 만나서 이별밥과 술을 나누고, 목기장인 친구에게서 목기도 선물받고, 마침 수확철이라 이웃의 햅쌀도 선물받고, 지리산의 정다운 기운을 품에 안고 귀향을 준비 중이다.

가끔 이곳 풍경을 보면서 '이 풍경도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라는 생각으로 마음 속에 스산한 바람이 일기도 한다. 마당에서 보이는 천왕봉도, 기분 좋은 밤공기도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 며칠 후 이사를 해야 해서 집에는 짐 박스들이 쌓여 있다. 이렇게 새로운 시간이 다가오나 보다.

51살의 제가 91세의 당신을 돌보러 갑니다

가끔 지금의 내 나이인 '51세의 어머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1980년, 51세였던 그녀는 제주도 구좌읍 김녕리의 교회에서 목회자의 아내로, 여덟 자녀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아마도지금 내 나이 즈음이 아니었을까 싶은 젊은 어머니. 지금의 나보다 예뻐서 좀 기분이 나쁘다. ⓒ 이진순


그리고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 11살 아이였다. 가난했지만 피아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가끔 생때 부려대던 아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도시의 잠옷 입은 아이가 너무너무 부러워서 참다 참다 잠옷 사달라고 울먹이던 아이가 나였다.

잠옷은 육지에서 잠시 내려와 있던 큰언니가 나중에 사서 소포로 부쳐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연분홍 잠옷을 입고 그냥 잠자리에 들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친구들이랑 동네 밤길을 싸돌아다니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봐주길 바랐던 것 같다.

51살 어머니에게~!
11살 나를 돌보느라 애쓰시는군요~
이제 51살의 제가 91세의 당신을 돌보러 갑니다.
40년 인생 선배와 사는 것은 어떤 것일는지 배우러 곧 갈게요.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