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대학원생의 '연구노동'에도 근로기준법이 적용된다면

[국회로 간 대학원생④] 대학원생 연구노동, 다시 생각하기

등록|2020.11.30 14:59 수정|2020.11.30 14:59

▲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깃발 ⓒ 김태현


한국에서 대학원생의 기본권·교육연구환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중반이다. 물론 이전부터 대학원생이 열악한 처우에 노출돼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KAIST 대학원총학생회가 꾸준히 대학원 연구환경실태조사를 진행해왔다는 사실 또한 잊혀서는 안 될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대학원생 인권운동이 현재와 같은 공적인 관심을 획득하기까지는 다음과 같은 단계가 필요했다. 먼저 2014년 대통령직속청년위의 '대학원생 연구환경 실태보고서', 2015년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연구팀의 '2014년 대학원생 인권실태 및 제도개선 조사보고서', 같은 해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학원생 연구환경에 대한 실태조사' 등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다룬 보고서가 발간됐다.

다음으로 2015년 중반 악명높은 "인분교수" 사건을 기점으로 충격적인 대학원생 권리침해 사례가 이어졌다. 결정적으로 전국대학원총학생회협의회를 포함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당사자 단체가 등장했다. 이를 통해 대학원생 문제는 비로소 뜬소문이나 개개인의 일탈이 아닌 '사회와 제도의 문제'가 되었다. 대학원생·연구원의 연구활동을 노동 혹은 근로 개념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태어났다.

대학원생에게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면? 

왜 노동권이었을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대학원생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의 입장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다. 성희롱·성폭력과 인권침해는 물론, 인건비 횡령이나 과도한 근무시간, 사적인 업무 혹은 부적절한 업무 부여에 이르기까지 대학원생 문제 사례를 검토한 이들은 두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대부분의 대학원생 문제는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영향력에 비해 이를 제어할 제도적인 장치가 부재하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한국의 법과 제도 내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즉 연구실을 운영하는 교수가 조직 구성원인 대학원생에게 행사하는 권한을 제약하고 후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법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쉽게 찾기 어렵다.

그 한 가지 방법이란 바로 교수-대학원생 관계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즉 근로기준법을 제외하면 '갑'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을'을 보호하는 제도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조건에서,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접한 사람들이 대학원생에게 법적인 노동자 지위를 부여하는 해결책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바였다.

그러한 해결책이 아직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시니어 교수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대학원생의 노동자성 지위 부여에 반감을 표출했다. 직업 간 귀천이 확고했던 시기에 성장한 그들은 왜 대학원생들이 '고귀한' 학자·연구자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비천한' 노동자로 격하시키고자 애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갖은 고생과 부조리를 기꺼이 감수하는 자신들의 '파이팅 넘치던 삶'에 젊은 학생들이 동참하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탄을 금하지 못했다.

이러한 도덕적 차원에서의 반대가 2010년대의 변화한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위선적인 꼰대'라는 비난과 조롱만을 유발할 뿐이라면, 대학원생 노동자성이 제도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보다 실질적인 이유 또한 존재했다. 덜 감정적인 교수들은 대학원생의 연구에 노동의 측면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연구가 그에 못지않게 대학원생 본인의 교육과 경력 발달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근본적인 장애물은 역시나 돈이었다.

대학관계자들은 대학원생 연구에 근로기준법을 적용하게 될 때 발생하는 추가적인 비용을 감당할만한 재정여력을 지닌 대학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호소했다. 근로소득의 유무에 따라 장학지원의 수혜자격이 달라지는 기존의 복지제도 또한 문제였다. 노동자 지위의 인정이 기존의 장학금·세제 혜택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2018년 이래 대학원생 노동자성 인정 추진 흐름의 전면에 서 있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은 이러한 난점을 돌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한다. 대학원생의 모든 활동을 노동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중에서 명확히 노동으로 규정될 수 있는 지점에서 노동자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지난 10월 6일 국회 앞 농성 돌입 기자회견에서 대학원생노동조합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에서 노동권 부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교육·연구·행정에 종사하는 조교", "국가와 기업에서 수주하여 수행하는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는 학생연구원", "학회 운영의 실무를 수행하는 학회 간사", "대학에서 강의하는 강사"를 맡는 경우, 대학원생 신분과 무관하게 노동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규정을 통해 현실화할지, 그 과정에서 전체 대학의 연구환경이 어떻게 변화할지 현재로서는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지난해 강사법 통과와 그에 대한 사립대의 대응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반복하지 않고자 한다면, 대학 및 교수집단 또한 지금까지의 무기력을 내려놓고 대학원생 문제 해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대학원생 노동 상상하기

지금까지 우리는 소극적인(negative) 권리로서의 대학원생 노동을 논의했다. 누군가가 소극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그가 보유한 권리가 타인의 침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과 같다.

예를 들자면 어떤 대학원생 조교가 사전에 합의된 업무시간에 따라 일할 권리를 지닌다고 할 때 교수 혹은 상급자는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여 업무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만약 상급자가 이를 무시하고 추가 업무시간을 강요할 경우 그는 노동권 침해에 따른 제재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소극적 권리로서의 노동 개념은 강력한 사용자의 권력이 사전에 합의된 범위를 침범할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노동자의 영역을 방어하고 보호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스스로가 약자·피해자의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노동이 아니더라도) 권리의 개념에 의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물론 대학원생과 노동이라는 문제를 꼭 한 가지 방식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많은 대학원생에게, 그리고 학위를 마치고 학계 안팎에서 전업 연구자의 삶을 선택한 이들에게 노동은 경제적이고 직업적인 기회를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일자리로서의 노동' 개념은 사회 전체의 인력과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준다.

특히 학령인구수의 극적인 감소에 따른 급격한 대학구조조정의 가능성을 목전에 둔 오늘날, 학위를 마친 대학원생, 그중에서도 기업과 같은 다른 영역으로의 구직이 쉽지 않은 기초학문분야 연구자 집단이 연구노동을 지속할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 공급할 수 있는가는 앞으로의 대학원생 문제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다.

조금 더 주목하고 싶은 용법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 그리고 노동자를 성장시키는 경험으로서의 노동 개념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노동은 한편으로 세계에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가치를 생산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노동을 수행하는 인간 자신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성장의 경험으로 간주된다.

오늘날 대학원생의 노동, 특히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자들이 수행하는 연구노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의 논의에서 이러한 측면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적극적'(positive) 행위로서의 노동 개념을 통해서만 지식의 생산이 단순히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고 대가를 지불받는 과정 이상의 것임을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한창 지적으로 성장하는 단계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적절한 연구노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게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연구노동' 다시 생각하기

전문연구자의 핵심적인 역할이 지식의 생산과 관리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비교적 '시장가치'를 측정하기 수월한 분야든, 아니면 그러한 측정이 매우 쉽지 않은 분야든 (우리는 일제 식민지 시기 역사가 중요하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해당 분야의 특정 연구가 어느 정도 금액의 가치를 지니는지 판단하려 들지는 않는다) 지식의 생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세계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때로는 약간 더 효율적이고 풍요롭게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사회에 필수적인 활동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연구노동은 무엇보다도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다. 중요한 것은 어떤 연구노동을 수행할 기회를 얻느냐에 따라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노동자들의 역량 또한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더 크고 수준 높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사람의 시야와 분석력이 그렇지 못한 사람의 그것보다 더 넓고 정교할 가능성이 높듯, 대학원생·연구원 또한 더 중요한 연구경험을 축적할 때 생산할 수 있는 지식의 범위와 밀도가 증대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상식적이지만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결론이 도출된다. '대학원생·연구자에게 더 뛰어난 질의 연구노동경험을 제공할 때, 그들이 사회에 제공하는 지식의 가치 또한 높아질 것이다.'

나는 교육부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과 같이 국가 전체의 지식생산에 관여하는 공적 기구는 물론,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나 사단법인 지식공유 연구자의집처럼 대학원생·연구자의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 또한 방금과 같은 의미에서의 (연구)노동 개념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연구자의 인권침해를 막고, 필수적인 의식주 여건을 제공하며,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통해 연구자를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일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생산하는 연구물·지식이 굳이 과거의 수준에 정체되어야 할 게 아니라면, 젊은 연구자들이 어떤 성격의 연구노동을 경험할 수 있을지, 연구자들의 효율적인 성장을 위해 무슨 기회를 제공하고 어떤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을지 의식적으로 고민할 필요는 있다. 이는 박사학위 이후에 유의미한 지적 전진을 이룩하는 연구자를 찾기 힘들며, 또 사회의 다양한 주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지식인을 좀처럼 재생산해내지 못하고 있는 한국 학술장에 주어진 오랜 숙제다. 연구노동 개념의 다양한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시도는 그러한 숙제를 풀어내기 위한 첫 단추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