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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졸업시키지 마요" 아무도 예상 못한 이 학교의 기적

[월간 옥이네] 충북 옥천 안남어머니학교... 그들이 배운 건 한글만이 아니었다

등록|2020.12.29 17:14 수정|2020.12.31 13:28

▲ 충북 옥천군 안남어머니학교 학생들 ⓒ 월간 옥이네


"방학이 싫다. 졸업은 더 싫다."

손꼽아 기다리는 방학,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기다렸던 졸업. 학창시절을 거쳐온 이들 대부분에게 방학과 졸업은 긴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여름‧겨울마다 찾아오는 방학에 속상함을 숨기지 못하는 학생들, '나 졸업시키지 말라'고 부탁하는 학생들이 있다면, 그들이 다니는 학교는 대체 어떤 곳이기에 방학과 졸업을 마다하는 것일까.

'주민 자치'로 이름을 알린 충북 옥천군 안남면에 그런 학생과 학교가 있다. 2003년 문을 연 '안남어머니학교'다. 안남면 주민을 위한 문해학교인 이곳이 어느덧 설립된 지 17년이 흘렀다. 지난 시간 동안 이곳 어머니 학생들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조금 더 주름진 얼굴, 조금 더 작아진 몸집, 조금 더 느려진 발걸음... 하지만 17년 전 출석부에 '내 이름 빼먹지 말라'고 당부하던 마음과 이곳에서 만난 행복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농촌 여성의 잃어버린 권리 회복의 시작이자 안남면 주민 자치의 출발점이던 안남어머니학교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어머니들 마음에 '학교 종'이 울리던 날

2003년 2월 25일 안남면사무소 2층에서 조촐하지만 가슴 벅찬 입학식이 열렸다.

"배우긴 했는데, 시집 와서 일만 하다 보니 다 까먹었지."
"한글도 몰라서 이렇게 나오니 부끄럽네."
"뭘! 모르는 거 배우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게 어디 부끄러운 일인가?"


어려운 시절,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모인 안남어머니학교 학생들이다. 이렇게 모인 '어머니 학생'은 50여 명. 당시 안남초등학교 전교생 숫자에 맞먹는 규모다.

안남어머니학교 설립을 주도했고 현재까지 교사 활동 및 운영을 맡고 있는 송윤섭 교장은 이날을 안남면 주민 자치의 시작으로 기억한다. 지역 주민들이 모여 공동체 다른 구성원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해결하기 위한 활동이었던 데다, 이를 시작으로 ▲ 안남면 순환 버스 ▲ 안남면 지역발전위원회 ▲ 안남배바우작은도서관 등 안남면 주민자치의 상징이 이어졌기 때문.

인접한 안내면에 이듬해 '행복한학교'라는 이름의, 역시 지역 여성 어르신을 위한 문해학교가 열리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가부장적 농촌 문화에서 배제돼온 여성을 삶의 주체로 세웠다는 점에서 더욱 남다른 의미가 있다.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자치와 관련해 일상적인 지역 활동을 챙겨보면 좋지 않겠나 하는 고민이 있었죠. 마침, 글을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마을 여성 어르신이 많다는 걸 접했고요. 여기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였고, 학교 운영 준비를 시작했어요. 마을마다 다니며 어머니 학생들을 모집했고요." (송윤섭 교장)
 

▲ 충북 옥천군 안남어머니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모습 ⓒ 월간 옥이네


자원봉사 교사로 모인 사람들은 연주리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이던 염우진씨, 청정리 여성 농민 배태숙씨, 연주리에서 안남공판장을 운영하는 김현자씨, 화학2리에 살던 추경숙씨, 지수리 주민 신복자씨, 도덕2리 송윤섭씨 등 6명. 이들은 안남면 12개 마을을 구석구석 돌며 직접 학생을 모집했다. 현수막이나 안내문 정도로는 그 취지나 내용을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무 명이나 모이면 다행 아닐까.'

기우였다. 그렇게 모인 학생은 50명이 넘었다. 혹시나 명단에 이름이 빠지진 않을까, 그래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내 이름 꼭 적어줘요. 빠뜨리면 안돼. 꼭 넣어줘야 돼" 신신당부하는 예비 학생들의 성화가 줄을 이었다.
   
교사로 모인 주민들은 다른 걱정이 있었다. '한번도 남 앞에 서본 적이 없는데 내가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였다. 서울과 청주 등 다른 문해학교를 견학하고 교육을 참관하며 여러 차례 운영에 대한 회의도 거쳤다. 준비 기간만 5~6개월. 그 사이 주민 교사들은 과거의 꿈을 떠올리기도 하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며 격려의 힘을 더했다.

그러던 차에 <옥천신문>에 실린 김기남 어머니의 사연은 이들은 물론 안남 주민들에게 '어머니학교'의 필요성을 확신하게 했다. 한글을 배우기 위해 보은까지, 버스와 택시를 세 차례 갈아타며 가야 한다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 마을 안에서 저런 필요를 충족시켜 보자'는 생각을 되새겼다.

송윤섭 교장은 안남면 전체 주민들의 반응과 분위기가 어머니학교와 학생들, 그리고 이 일을 만들어 가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감을 부여했다고 설명한다.

"학교에 가려고 길을 나선 어머니 학생을 보면 밭일을 멈추고 트럭으로 모셔다드리는 청년도 있고, 아내 공부를 위해 경운기를 몰고 면사무소까지 오는 할아버지도 있고요. 어머니 학생들을 볼 때마다 정말 멋지다고 응원해주는 주민들을 계속 만나다 보니 어머님들도 자신감을 얻고 당당해지셨죠.

자원활동하는 선생님들 중엔 '어느 집 며느리'로 사는 여성이 많았는데 어머니학교 일을 하며 어머니가 달리 보이더라는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어요. 서로 좀 더 객관화해서 보기도 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됐던 거죠."


억압의 틀을 깨고
     

▲ 충북 옥천군 안남어머니학교에서 한 학생이 수업을 받고 있다 ⓒ 월간 옥이네


매주 2회, 약 2시간 씩 모이는 어머니학교는 정말 학교처럼 운동회도 하고 백일장도 나가고 소풍도 가며 어머니들에게 전에 없던 경험을 선물했다. 봄소풍 때는 선생님들 먹을 것까지 챙긴다며 찰밥에 과일에 떡 등 이것저것을 너무 많이 가져와 선생님들을 행복한 당혹감에 젖게 하기도, 당시 청마리에 있던 아자학교에서 1박 2일 야영을 진행했을 땐 노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박옥분(87)씨는 한글을 깨치러 다니던 그 길이 무척이나 재미났다고 회상한다.

"농사 짓고 나서 겨울되면, 식당 하는 부산 딸네 집 가서 일 도와주고, 대구 아들네 집 가서 밥해주고 그랬지. 근데 핵교 생기니께 나오라대. 그래서 한 번 가봤더니 참 재밌어. 새벽에 인나서 목욕하고 밥 한숟갈 떠먹고 가도 재밌어. 그때는 그냥 배우면 재미나서 암만 대근해도 집에 와서 공책 한 장씩 쓰고 잤는데 지금은 헛일이여. 한 귀로 들으면 한 귀로 흘르고 하니께. 그래도 이렇게 웃고, 이렇게 즐겁게 다니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거 아니어요?"

무엇보다 어머니학교는 스스로 자신을 챙기게 했다는 점에서 작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어머니학교에 다니며 깨친 것은 '한글'만이 아니었다.

"우리 엄마들이 학교 오는 날만큼은 머리 단장하고 옷이랑 신발도 예쁜 걸로 챙겨서 오세요. 평소에는 농사짓고 사느라 그날이 그날 같은데 학교 오는 날은 학생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시간을 살러 오는 거예요. 예전에는 쭈뼛쭈뼛 힘들던 관공서 출입도 쉬워졌고요. 농협에 가서도 '입금표는 내가 써볼게' 하는 자신감을 얻으셨죠."

초기 3~4년을 어머니학교 교사로 활동한 김현자씨는 "어머니학교는 어머니 자신을 찾는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면사무소 2층에 있던 어머니학교에 등교하며 불편하기만 했던 관공서는 '우리 학교'가 됐고, 왠지 모르게 무섭던 경찰은 '언제든 나를 도와줄 사람들'이 됐다.

어머니학교 입학식부터 꾸준히 지면에 소식을 보도해온 <옥천신문> 황민호 제작실장 역시 같은 평가를 한다. "소수자로 살던 어머니들이 가방 메고 길을 나서 면사무소를 드나들고 직접 통장을 만든 경험"은 그들을 대상화 되지 않은, 주체적으로 복지와 평생교육을 만들어 가는 이들로 자리매김하게 했다는 것.

실제로 어머니학교는 학생회 등을 운영하며 어머니 학생 스스로 운영에 동참하는 등 학교 안팎으로 다양한 사회 경험을 가능케했다. 황민호 실장은 "각자 마을 안에서만 살던 어머니들이 마을을 나와 비슷한 여성들과 소통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됐다"며 "어머니들을 '수혜자'로만 보는 것이 아닌, 그동안 사회적 약자이던 이들을 주체로 세웠다"고 평가했다.

송윤섭 교장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견한 어머니 학생들의 경험을 전하기도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문상'을 가본 이야기다.

"어머니학교 학생의 남편이 돌아가셔서 함께 문상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어머님들이 장례식장을 나오며 하셨던 이야기가 생각나요. 어머님들 스스로도 말씀하시며 웃으실 정도로, 그동안은 뒤에서 궂은 일만 했지 예를 갖춰 문상을 와본 게 처음이라고."

어머니학교, 더 넓고 깊은 돌봄을 꿈꾼다
   

▲ 충북 옥천군 안남어머니학교에서 한 학생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 월간 옥이네

          
안남어머니학교는 어머니 자신들의 삶뿐 아니라 지역의 삶도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어머니학교 학생들의 입에서 시작된 순환버스를 비롯해 지역의 대소사를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회'와 같은 지역발전위원회, 지역 어린이들과 주민들의 사랑방인 작은 도서관 등이 그것이다.

이제 안남은 이를 바탕으로 한 발 더 나아간 '돌봄'을 꿈꾼다.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안남면복지회관을 거점으로 한 지역 돌봄 기능 강화가 그것.

어머니학교에 나오지 않는 어르신들도 부담 없이 이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따뜻한 밥 한 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곳. 경제적인 이유로 면 지역에 들어서기 힘든 공공 목욕탕을 지어 어르신들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면민들의 목욕탕. 나아가 지역의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소통하고 교류하며 더 큰 공동체의 희망을 나눌 공간 말이다. 안남 사람들은 이 공간을 바탕으로 안남의 '교육문화복지 공동체'를 그린다.

현재 복지회관 건립을 추진하는 안남면지역발전위원회 윤성희 사무국장은 "주민들마다 고민하는 부분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르신들의 식사와 보호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방향"이라며 "최대 1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규모로 지어질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송윤섭 교장은 이것이 살아온 마을에서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송 교장은 "어르신들이 요양원이나 다른 곳에서 눈 감는 것보다 살던 마을에서 이웃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는 말씀을 곧잘 하신다"며 "복지회관은 일종의 '노노케어'가 가능한 안남의 시작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몇몇의 노력만으로 한 번에 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관계를 만들며 더 많은 사람이 지역 돌봄 체계 안에 들어오는 방향으로 간다면, 안남의 돌봄 체계가 더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월간 옥이네 2020년 12월호(통권 42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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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 옥이네 1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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