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이 이어준 나영이와의 첫 만남... 12년의 기록
나영이의 친언니가 함께 기획한 책 <우리들 푸르른 기록>
▲ <우리들 푸르른 기록> 책 표지 ⓒ 이회림
가해자가 출소한 후, 예상대로 언론은 과도하게 가해자를 조명하느라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유튜버가 가해자의 집 앞으로 가서 고성을 지르고, 그들의 채널로 생중계까지 할 줄은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잊힐 권리'를 말하기 위해 말이든 글로든 그 사건을 소환했던 저나 그 유튜버들이나 결과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문득 들더군요. 아예 그런 칼럼도 쓰지 말고,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이 맞았을까 하면서 자꾸만 되돌아보면서요.
2012년까지만 실질적으로 나영이를 치료한 주치의가 지금까지 도움을 준 것처럼 보도되는 것도 혼란스러웠습니다. 2013년 여름, 나영이 아버지께서 주치의가 2012년까지만 나영이를 챙기고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로 진료를 중단했다며, 저에게 다른 정신과 의사를 연결해 달라고 부탁하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치의라는 분은 치료보다 정치에 더 집중하느라 바빴을지 모릅니다. 정말로 더 이상 치료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 내릴 만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어찌 되었든 지금이라도 발 벗고 나서 모금 운동을 하고, 나영이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책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이 책은 '나영'이라고 불리던 소녀를 환한 빛 속으로 잘 떠나보내는 방법에 대해 나영이 언니와 함께 고민한 시간의 결과물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잘 맞는 방법인지,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용기를 내서 책을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아래는 책의 첫 부분에서 가져온 '첫 만남'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입니다. 이 책의 취지에 공감하는 분들이 계시면 전문을 찾아 읽어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당벌레 초콜릿
▲ 초콜릿은 나영이와 나를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 unsplash
<우리들 푸르른 기록>
'첫 만남'
2009년 1월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해바라기 아동센터에서 전해 듣고 연락드립니다. OO서 OO 형사님이시죠?"
2009년 1월, 아버님의 전화를 처음 받은 날은 제가 서울 시내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어요.
추운 겨울날, 병원 근처 베이커리 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어요. 진료를 받기 전에 먼저 카페에 모여 인사를 나누기로 했던 거죠.
"인사드려, 너 도와주러 오신 경찰언니야."
나영이의 첫인상은 웃음기가 없고 피곤해 보였어요.
"안녕? 반갑다. 오느라 힘들었지? 언니가 선물 하나 준비해 왔어. 사실 내가 밤샘 근무할 때마다 한 통씩 먹어 치우는 건데, 왠지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네 것도 사 왔어."
절대로 동정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섣불리 위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동네 초등학생 대하듯이 편하게 말을 걸었어요.
"어~?!"
나영이의 작은 눈이 확 커지면서 얼굴이 환해졌어요. 얼굴에 조명이 하나 더 켜진 듯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무거웠던 주변 공기가 명랑해졌어요. 처음 인사를 나눌 때는 내키지 않는 듯 건성으로 하느라 눈도 잘 마주치지 않더니, 무당벌레 초콜릿을 보자마자 얼굴빛이 금세 변했지요.
'무당벌레! 다 네 덕분이다!'
저는 마음속으로 안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나영이가 타고 온 차 안에 돌고래 모양의 쿠션이 놓여 있길래 무당벌레를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을 슬며시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마운 무당벌레 초콜릿 덕분에 다소 무겁지 않은 분위기로 병원 진료실에 함께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영이의 얼굴에서 조금 전 그 밝은 표정은 풀썩 날아가 버리고 없더군요.
아무래도 병원이라는 곳이 꼭 필요한 공간이기는 하나 결코 편안한 장소가 될 수는 없었겠지요. 그건 저의 존재도 마찬가지. 나영이 입장에서 오늘의 만남을 미리 상상해보니, 저 또한 그동안 만나 온 수많은 회색빛 공무원 어른 중 하나일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립니다. 이 글을 쓴 이회림님은 경찰관으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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