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초심자의 길
[초보자를 위한 삶의 주인공 되는 글쓰기 비법] 1장
연재를 시작하기 전 (INTRO)
당신은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철문을 박박 긁고 있습니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당한 형벌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만큼 교활하거나 악하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울음이 내 삶의 절반을 채우는 것 같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러다 마주치는 허탈감이 내 삶의 나머지를 채웁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우리는 남은 인생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요.
당신은 타인의 눈높이에 다다른 곳에 내 자리가 있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싫은 사람 밑에서 가면 쓴 얼굴로 삶을 버텨냈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의 평안함과 안락함은 침대에서 조차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늘 해야만 하는 것들이 당신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신이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맨 얼굴에서 뱉는 말이었습니다.
신문에, TV에 나오는 말은 앵무새처럼 곧잘 혀를 굴려 입 밖으로 밀어냅니다. 하지만 진달래가 봄을 대변할 수 없고, 제비가 여름을 어느날 가져 오는 것이 아니듯, 당신의 삶을 설명할 단어는 늘 입안의 가시처럼 당신을 마음을 쿡쿡 찌를 뿐 바깥으로 나올 생각따윈 없어 보입니다. 글쓰기는 당신의 말을 찾는 첫 단계입니다. 통념에 머문 당신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당신이 한동안 모른척 해서, 늘 당신 주변을 배회하고 한숨 쉬던 내면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초보자를 위한 삶의 주인공 되는 글쓰기 비법'은 글쓰기 장인들의 문장을 한올씩 풀어보며, 궁극적으로는 내 말을 찾아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재 글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이 땅에 힘없는 사람들이 연재 글을 공유해주고, 자신의 입담을 담은 글쓰기 표현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궁극에는 '모두가 시민기자인 오마이뉴스' 기사를 눈에 담지만 말고, 고단한 삶에 등불을 밝힐 수 있는 다양한 서사를 써 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꿈은 원대하지만, 처음은 표현 씨앗 수집하는 노동자로서 자원부터 찾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그것들이 노지에 뿌려지더라도 말입니다. 어느 계절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피어날 꽃임을 믿습니다.
1장 글쓰기 초심자의 길
살면서 글쓰기가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리포트를 제출할 때, 회사원이라면 마케팅 전략서가 필요할 때, 취업준비생이라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 유튜버라면 자막 작업을 할 때 그 외 기획서, 메일, 칼럼, SNS 및 블로그 글쓰기 등 입이 아플 정도로 종류가 다양합니다. 글을 담는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전제는 문자를 통해 상호간에 소통하는 것' 정도가 될 것입니다.
시중에는 'HOW TO'(방법론)에 집중하는 글쓰기 책이 많습니다. 대중은 글쓰기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글쓰기 목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써야 하는데, 책 서평을 써야 하는데,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SNS 카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시장은 수요자가 요구하는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써야 하는 글쓰기의 제반 상황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맞는 책을 지침 삼아 올바른 글쓰기 활동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과연 그 뿐일까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내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통념화된 사고가 아닌 다른 생각을 품어 봄직한 글쓰기, 나를 위로하고 궁극에는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글쓰기, 프레임에 갇혀 빙산의 일각만 보지 않고 그 뿌리까지 내다 보려는 공부하는 글쓰기 비법은 없을까요.
소설가 전상국은 <소설쓰기 명강의>를 통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형태를 갖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물음을 필요로 한다.'
먼저,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형태라는 것은요? 구체적이라는 것은요? 나타난다는 것은요? 마지막으로 물음은요? 평생을 글쓰기의 장인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이 한 문장 안에 그의 사유를 함축합니다.
'나'라는 형태의 사물이 관계하는 것의 근본은 아들러식으로 말하자면, 지구라는 혹성입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약한 육체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체화된 긴장과 불안은 늘 몸의 근육 이곳 저곳에 통증을 유발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와 너가 가진 통증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 우리는 생에 아픔을 느끼는가,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통증을 완화할 것인가. 혹은 타인이 내게 준 통증을 나는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의 삶에 에너지원으로 쓸 것인가.
더 깊숙이, 통증이 내게 왔을 때, 나의 움직임은 어땠는가. 내 눈은 어디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가. 내 호흡은 어떤가. 나는 그때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가. 내 발걸음은?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말의 어조는 어땠지? 그때 날씨는? 그 장소는 어땠지? 시간은 아침이었나 저녁이었나? 등등.
질문을 만들고, 단어를 수집하고, 그 단어를 잇는 문장을 만들고, 문장과 문장이 만나 단락이 되고, 단락과 단락이 어울려 한편의 글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글쓰기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야 할 것들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생후 50일쯤 된 아기의 눈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흑백이었던 세상에 색이 시나브로 더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여긴 어디지?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호기심 가득 찬 눈동자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끔 합니다.
물론 컴퓨터 앞에 앉은 당신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눈앞에 첫 문장을 시작할 단어만 나타난다면, 세상 무엇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혜량 깊은 마음도 있지만, 뮤즈는 내게 어떤 영감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는 것은 이릅니다. 인류 문명은 나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오만만 버리면 됩니다.
먼저 길을 나선 위인들을 부르며 쫓아가면 됩니다. 그 위인들의 입장에서 글쓰기 초심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아기와 같을테니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무엇이든 가르쳐 주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초심자의 마음에 늘 질문 주머니가 채워져 있을 때에만 가능하겠지만요.
남의 것을 보고 베껴 써서 내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그릇된 행동이지 배우기 위해 훌륭한 문장을 내 노트에 옮기는 것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한 처사일 것입니다. 물론 인용된 글귀의 출처는 반드시 밝혀야겠지요.
당신은 손톱이 부러질 정도로 철문을 박박 긁고 있습니다. 저승에서 시시포스가 당한 형벌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만큼 교활하거나 악하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가슴 밑바닥에서 차오르는 울음이 내 삶의 절반을 채우는 것 같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생각, 그러다 마주치는 허탈감이 내 삶의 나머지를 채웁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요. 우리는 남은 인생을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요.
신문에, TV에 나오는 말은 앵무새처럼 곧잘 혀를 굴려 입 밖으로 밀어냅니다. 하지만 진달래가 봄을 대변할 수 없고, 제비가 여름을 어느날 가져 오는 것이 아니듯, 당신의 삶을 설명할 단어는 늘 입안의 가시처럼 당신을 마음을 쿡쿡 찌를 뿐 바깥으로 나올 생각따윈 없어 보입니다. 글쓰기는 당신의 말을 찾는 첫 단계입니다. 통념에 머문 당신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당신이 한동안 모른척 해서, 늘 당신 주변을 배회하고 한숨 쉬던 내면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초보자를 위한 삶의 주인공 되는 글쓰기 비법'은 글쓰기 장인들의 문장을 한올씩 풀어보며, 궁극적으로는 내 말을 찾아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했습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재 글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이 땅에 힘없는 사람들이 연재 글을 공유해주고, 자신의 입담을 담은 글쓰기 표현을 찾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궁극에는 '모두가 시민기자인 오마이뉴스' 기사를 눈에 담지만 말고, 고단한 삶에 등불을 밝힐 수 있는 다양한 서사를 써 주시길 바랍니다. 저의 꿈은 원대하지만, 처음은 표현 씨앗 수집하는 노동자로서 자원부터 찾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그것들이 노지에 뿌려지더라도 말입니다. 어느 계절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피어날 꽃임을 믿습니다.
1장 글쓰기 초심자의 길
살면서 글쓰기가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리포트를 제출할 때, 회사원이라면 마케팅 전략서가 필요할 때, 취업준비생이라면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때, 유튜버라면 자막 작업을 할 때 그 외 기획서, 메일, 칼럼, SNS 및 블로그 글쓰기 등 입이 아플 정도로 종류가 다양합니다. 글을 담는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전제는 문자를 통해 상호간에 소통하는 것' 정도가 될 것입니다.
시중에는 'HOW TO'(방법론)에 집중하는 글쓰기 책이 많습니다. 대중은 글쓰기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글쓰기 목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논문을 써야 하는데, 책 서평을 써야 하는데,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SNS 카드 뉴스를 만들어야 하는데… 당연히 시장은 수요자가 요구하는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써야 하는 글쓰기의 제반 상황을 이해하고 그 목적에 맞는 책을 지침 삼아 올바른 글쓰기 활동을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이 과연 그 뿐일까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가 아닌, 내 감각을 깨우는 글쓰기, 통념화된 사고가 아닌 다른 생각을 품어 봄직한 글쓰기, 나를 위로하고 궁극에는 타인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글쓰기, 프레임에 갇혀 빙산의 일각만 보지 않고 그 뿌리까지 내다 보려는 공부하는 글쓰기 비법은 없을까요.
소설가 전상국은 <소설쓰기 명강의>를 통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의 사물이 형태를 갖춰 구체적으로 나타나기까지는 많은 물음을 필요로 한다.'
먼저, 하나의 사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형태라는 것은요? 구체적이라는 것은요? 나타난다는 것은요? 마지막으로 물음은요? 평생을 글쓰기의 장인으로 살아온 사람답게 이 한 문장 안에 그의 사유를 함축합니다.
'나'라는 형태의 사물이 관계하는 것의 근본은 아들러식으로 말하자면, 지구라는 혹성입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약한 육체로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체화된 긴장과 불안은 늘 몸의 근육 이곳 저곳에 통증을 유발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와 너가 가진 통증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왜 우리는 생에 아픔을 느끼는가,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가진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이러한 통증을 완화할 것인가. 혹은 타인이 내게 준 통증을 나는 어떻게 버티고 앞으로의 삶에 에너지원으로 쓸 것인가.
더 깊숙이, 통증이 내게 왔을 때, 나의 움직임은 어땠는가. 내 눈은 어디에 시선을 던지고 있는가. 내 호흡은 어떤가. 나는 그때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가. 내 발걸음은?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더라? 말의 어조는 어땠지? 그때 날씨는? 그 장소는 어땠지? 시간은 아침이었나 저녁이었나? 등등.
질문을 만들고, 단어를 수집하고, 그 단어를 잇는 문장을 만들고, 문장과 문장이 만나 단락이 되고, 단락과 단락이 어울려 한편의 글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글쓰기를 하는 동안 우리가 거쳐야 할 것들입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당신은 여전히 컴퓨터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생후 50일쯤 된 아기의 눈을 보신적 있으신가요? 흑백이었던 세상에 색이 시나브로 더해지는 시기라고 합니다. 여긴 어디지? 이건 뭐지? 하는 표정으로 호기심 가득 찬 눈동자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게끔 합니다.
물론 컴퓨터 앞에 앉은 당신의 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눈앞에 첫 문장을 시작할 단어만 나타난다면, 세상 무엇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혜량 깊은 마음도 있지만, 뮤즈는 내게 어떤 영감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는 것은 이릅니다. 인류 문명은 나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오만만 버리면 됩니다.
먼저 길을 나선 위인들을 부르며 쫓아가면 됩니다. 그 위인들의 입장에서 글쓰기 초심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아기와 같을테니 얼마나 귀엽겠습니까. 무엇이든 가르쳐 주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초심자의 마음에 늘 질문 주머니가 채워져 있을 때에만 가능하겠지만요.
남의 것을 보고 베껴 써서 내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그릇된 행동이지 배우기 위해 훌륭한 문장을 내 노트에 옮기는 것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과한 처사일 것입니다. 물론 인용된 글귀의 출처는 반드시 밝혀야겠지요.
덧붙이는 글
다음 2장에서는 프란츠 카프카의 <단식 광대>의 한 부분을 가지고 글쓰기 보따리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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