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춤 하나로 90년대 남성들 마음 빼앗은 이 가수
[응답하라 1990년대] 예쁜 음색으로 사랑 받았던 강수지
▲ <흩어진 나날들>이 들어있는 강수지 2집은 1집을 능가하는 인기로 강수지를 최고의 솔로 여성가수로 성장시켰다. ⓒ 오감 엔터테인먼트
부유한 가정을 중심으로 막 '비디오'라는 것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중·후반,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은 '영화'라는 신세계를 접하게 됐다. 그 중에서도 사나이들의 의리를 주제로 한 '홍콩 누아르'라는 장르가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홍콩 누아르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은 당시 남학생들의 필수관람 영화였고 두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주윤발과 이수현은 순식간에 남학생들의 영웅이자 롤모델이 됐다.
그렇게 남자들의 의리와 배신이 남학생들의 심장을 뜨겁게 하던 80년대 후반, 뜬금없이 귀신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멜로 영화 <천녀유혼>이 청소년들의 가슴을 울렸다. 특히 <천녀유혼>의 히로인 왕조현은 순식간에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당시 남학생들은 굳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왕조현을 통해 '청순가련'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왕조현은 주윤발이 모델로 등장한 '우유맛 탄산음료' 라이벌 업체 음료 CF에 출연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무장해제시킨 강수지의 어깨춤
서울에서 태어난 강수지는 중학교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뉴욕에서 가수의 꿈을 키우던 강수지는 1988년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미국 동부지역 금상을 수상했다. 그 후 가족을 뉴욕에 두고 홀로 귀국한 강수지는 1990년 1집 앨범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데뷔했다.
강수지의 데뷔곡 <보랏빛 향기>는 강수지가 직접 쓴 상큼한 가사와 신예 작곡가 윤상의 경쾌한 멜로디, 그리고 강수지의 청아한 목소리가 더해진 신나는 노래다. 특히 입으로 불면 날아갈 것 같은 가녀린 체구에 어깨를 살짝 흔드는 특유의 어깨춤은 남성 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대한민국의 남학생들이 더 이상 왕조현 같은 타국의 스타들에게 목을 멜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랏빛 향기>는 발매 당시 조정현이나 김민우 같은 대형 신인들에 밀려 지금의 대중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단히 큰 사랑을 받진 못했다. 사실 강수지뿐 아니라 데뷔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가수들은 데뷔곡이 그 가수의 대표곡으로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작 활동 당시에는 의외로 큰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요즘에야 블랙핑크와 트와이스, 오마이걸 등 여자 아이돌의 팬덤도 규모가 상당히 커졌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남성 팬들이 여성 가수를 쫓아 다니는 문화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강수지는 1991년에 발표한 2집에서 <흩어진 나날들>로 MBC <여러분의 인기가요>에서 3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데뷔 1년여 만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흩어진 나날들>은 훗날 박효신, 서영은, 조규찬 등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된 명곡이다). 강수지는 <흩어진 나날들>에 이어 발랄한 후속곡 <시간 속의 향기>로 다시 한 번 인기몰이를 하며 최고의 여성 솔로 가수로 등극했다.
강수지는 1992년 3집 엘범을 발표하며 최고의 여가수를 향한 '굳히기'에 들어갔다. 하지만 3집 타이틀곡 <내 마음 알겠니>는 기대했던 만큼 큰 인기를 끌진 못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같은 외부적인 변수나 1,2집에서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던 윤상과의 음악적 결별(윤상은 1991년 가수로 데뷔하면서 인기스타가 됐다)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 강수지의 실제 이야기인듯한 노래들이 들어 있는 4집은 강수지의 최고 명반으로 꼽힌다. ⓒ 오감 엔터테인먼트
1993년 6월 발표된, 강수지가 직접 가사를 쓴 4집 타이틀곡 <그 때는 알겠지>는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를 네 곁에 두려 한다면, 사랑한다는 이유로 지나온 모든 것들을 용서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게는 어려운 걸'이란 가사를 담고 있다.
강수지 4집에서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노래는 타이틀곡 <그 때는 알겠지> 정도였다. 하지만 강수지 4집은 진성과 가성을 가장 부드럽게 넘나드는 여성 보컬리스트 강수지의 매력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명곡들로 가득 차 있다. 1번 트랙 <사랑했어 너만을>은 신인 테크노 밴드 EOS의 리더 강린이 만든 애절한 발라드곡이다. 10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했던 강수지의 유창한 '네이티브 영어 내레이션'을 들을 수 있는 곡이다.
<돌아와줘 내게>와 <널 기다리며>는 강수지 특유의 발라드 넘버들로 라디오를 중심으로 잔잔하게 사랑을 받았다. <소중한 기억들>과 <아름다운 시간들>처럼 <보랏빛 향기>나 <시간 속의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발랄한 댄스곡들도 수록돼 있다. 강수지는 4집에 수록된 8곡 중 7곡의 가사를 직접 쓸 만큼 작사가로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하지만 강수지 4집의 백미는 마지막 트랙의 < I Miss You >다. 작곡가 겸 가수 오태호가 작사·작곡한 드라마틱한 가사가 돋보이는 < I Miss You >는 훗날 고 서지원이 리메이크했다가 사후에 더 유명해진 노래의 원곡이다. 서지원이 폭발적인 샤우팅으로 노래의 슬픔을 폭발시켰다면 강수지는 좀 더 담담하고 성숙한 창법으로 '두려움이 앞선 미안함'을 잔잔한 감성으로 표현했다.
강수지 4집은 좋은 노래들로 채워져 있는 알찬 앨범이었지만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수지 4집의 활동시기는 신승훈 3집의 <널 사랑하니까>, 서태지와 아이들 2집의 <하여가>, 이무송의 <사는 게 뭔지>, 김수희의 <애모> 등 90년대 가요계를 대표하는 레전드급 히트곡들의 활동시기와 겹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수지 4집은 팬들 사이에서 강수지 최고의 명반으로 꼽힐 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이다.
데뷔 9년 동안 11장의 앨범 발표한 부지런한 가수
▲ 강수지는 지난 2018년 <불타는 청춘>에서 '치와와 커플'로 활약하던 김국진과 실제 부부가 됐다. ⓒ SBS 화면 캡처
강수지는 미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앨범 수록곡 대부분의 가사를 직접 쓸 정도로 작사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유했다. 그러면서도 6집 앨범에서는 작사가 박주연에게 앨범 전곡의 가사를 맡기기도 했다. 1995년 겨울에는 미스터투의 <하얀 겨울>, 터보의 <회상>과 함께 '90년대 3대 겨울송'으로 꼽히는 <혼자만의 겨울>을 발표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강수지는 데뷔 후 9년 동안 9장의 정규 앨범과 한 장의 스페셜 앨범, 그리고 한 장의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며 부지런히 활동했다. 물론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한 앨범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외면 받은 앨범도 있었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앨범을 발표하는 것만으로 그 시절 강수지를 좋아하는 팬들에겐 아주 큰 선물이었다.
사실 강수지는 <혼자만의 겨울>이 수록된 스페셜 앨범 이후로는 가수로서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렸고 개인적으로도 굴곡진 삶을 경험하기도 했다. 지난 2010년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발표한 디지털 싱글 <추억은 눈꽃처럼>은 발매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로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았다. 그리고 강수지는 <추억은 눈꽃처럼>을 끝으로 10년 넘게 공식적인 가수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강수지는 지난 2015년 SBS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 출연해 김국진과 '치와와커플'로 활약하다가 2018년 5월 백년가약을 맺었다. 현재 MBC 라디오 <원더풀라디오 강수지입니다>의 DJ로 활약하고 있는 강수지는 예쁜 음색으로 많은 명곡들을 들려주던 매력적인 여성 보컬리스트다. 그리고 지금은 아저씨가 됐을 수많은 소년들의 가슴에 아련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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