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가 준 종이에 고개를 떨군 어르신, 그 이유가
[서평] 문해교실 67명의 할매, 할배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어느 멋진 날'
우연은 필연이다. 코로라 19로 인해 한가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책 정보를 찾다가,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초록담쟁이' 작가의 그림이 표지로 되어있는 <어느 멋진 날>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67명의 할매, 할배가 쓰고 초록담쟁이 그리다'. 그 중에서 '초록 담쟁이 그리다'라는 소개 문구에 꽂힌 나는 바로 동네 책방에서 책을 주문했다. 책 내용보다 표지에 자석처럼 끌려서였다. 따뜻한 책을 품고 집에 왔다. 책 한 권에 펼쳐진 그림들은 여백 없이 차오르는 햇살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철벽같은 설움을 쏟아낸 시
꼭 필요한 때 외에는 별로 친하지 않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정보를 찾다가 4년 전에 우연히 초록담쟁이님의 그림을 찾아냈다. 요즘 말로 "심쿵"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싶었던 추억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초록담쟁이님의 그림은 내게 첫 사랑처럼 다가왔다. 엄마가 그립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친구가 떠오르고, 여행가고 싶은 날이나 마음이 울적해서 눈물이 날 때도 위로가 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햇살이 펼쳐진 거실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글의 내용보다 그림을 더 아끼면서 보고 싶었기에 천천히 책을 열었다. 책머리에 '소녀 할머니와 소년 할아버지가 떠나는 시간여행'으로 시작되는 글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한 글자, 한 줄, 한 문장이 고스란히 아픔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글이 아니라 일상이었고 삶이었으며 생의 전부였던 그분들의 마음이 보였다.
삶 안에 켜켜이 쌓인 한과 눈물, 글을 몰라서 부끄러움에 구멍 난 가슴을 매우지 못하고 살아온 배움이란 한, 자음과 모음을 배우면서 철벽같은 설움을 풀어낸 한풀이 늦깎이 시인들이 토해낸 고백의 시와 만났다. 눈물 없이 웃을 수 없고, 웃으면서 눈물이 나는,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가슴에 묻어둔 소녀소년 시절을 보았다. 희로애락(喜怒哀樂), 4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시어에는 칠, 팔십 평생 살아온 어르신들의 상처가 담겨있었다.
어린 시절 어리광을 부리고 사춘기를 느낄 새도 없던 때,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싶어도 부모님 눈치 보며 형제자매를 위해 죽을 수도 없었던 그때. 소리치며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난을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원망조차 할 수 없어 꼴망태 둘러매고 산으로 가 허공에 대고 펑펑 울어야 했던 할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동생들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시집을 가야 했던 할매...
그렇게 청춘을 갉아먹고 까막눈으로 인생을 살아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제라도 어깨춤을 추며 동네방네 글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어르신들의 시어가 줄줄이 담겨있다.
박춘식 어르신이 쓴 시 <보호자>를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아픈 아들 휠체어에 태우며 병원을 서성인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천 갈래로 찢겨 있을 상황인데 "여기 적혀 있는 곳으로 가세요"라는 간호사의 무표정한 말투에 글을 몰라 읽을 수 없어 무거웠던 종잇조각을 든 불안한 보호자.
한글 공부 4년 만에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는 가벼워졌고 줄줄 읽고 외는 당당한 보호자가 되었다는 시어를 읽는 내 속이 다 뻥 뚫리게 시원해졌다. 얼마나 좋았을까! 자랑스럽게 휠체어를 밀고 다녔을 어르신이 눈에 선했다.
수줍게 써온 이름 석 자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할 때였다. 노인일자리는 어르신들에게 경제적인 작은 도움과 함께 노후 생활에 활기를 주고자 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신체적 변화는 나이를 먹으면 누구에게나 오는 노화 현상이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은 다양했기에 건강하고 힘이 있는 분들은 야외 활동을, 허약하거나 조금 불편하신 분들은 실내에서 활동하도록 배정했다.
어르신들이 활기차게 일하면서 나름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독려하며,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도록 신경 쓰곤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임무에 충실한 어르신들과 소통하면서 "일자리 주어서 고마워유" 하는 어르신들은 때때로 떡이나 고구마를 가지고와 먹으라며 손에 쥐어주곤 하셨다.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신체적인 조건이나 가정사로 인해 중도 포기하는 분들이 발생했기에 인원을 충당해야 할 때가 있었다. 동네 경로당에서 정보를 입수, 옆집 할매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할머니 세 분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서류를 정리하고 사인을 받아야 하는 데 자꾸 딴청을 부리며 왔다 갔다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던 나는 난감했다. 안절부절못하던 할머니는 같이 온 일행이 접수를 마치고 먼저 나가자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떨며 무어라 속삭이듯이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순간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간절함 간곡함 절박함이 보였다.
"할머니 잠깐 저리로 갈까요. 혹시 할머니 글 모르세요?"
말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고개와 함께 흘러나온 한숨만으로도 답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나도 처음부터 이 일자리가 하고 잡헜어유. 그런디 글을 모릉게 어떻게 히야하는지, 차마 친구들에게 말도 몬하고 속상해 있었유, 저네들을 자기 이름이라도 쓰더라구유, 나는 이름도 못 써유 옆집 할매가 선상님이 친절하다고 혀서 용돈이 궁항게 와봤시유. 혹시나 안 될까 봐 그 할매한테도 아즉 말도 못 하구 몰래 왔시유."
우리 부모님 세대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분이 많았다.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는 가치관으로 학교를 못 다니게 한 외할아버지를 친정엄마도 원망했었다. 몰래 야학을 다니며 자음 모음과 덧셈뺄셈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 할아버지에게 들켜 붙잡혀왔다며 서럽게 우시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A4용지를 몇 장 가지고 와 4등분했다. 그리고 큼지막하고 또렷하게 잘 보이도록 이름 석 자를 써드리며 연습하고 다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삼일 후 굼벵이가 굴러가듯이 열심히 써온 이름 석 자를 보여주면서 수줍게 웃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모든 어르신들이 다 가고 난 후에 사인을 하면서 내 손을 꼬옥 잡다가 가셨다. 딸 같은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유'라고 하는, 그분만의 인사였다.
<어느 멋진 날>에는 "나"는 없이 "너"만 먹여 살리기 위해 흙을 일구며 허리가 휘도록 텃밭에 씨를 뿌리기만 했던 우리들의 부모님, 첫사랑이 보낸 편지도, 보고 싶은 자식 만나러 가는 버스 안내 글도, 군에 간 아들 편지도, 자식에게 돈을 부치러 간 은행에서도 이름 석 자 못 써서 차마 말 못하고 손에 붕대를 감고 가셨던 어머니의 한숨이 담겨있다. 그런 부모의 삶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낸 자식이기에, 나의 영혼도 붉어졌다.
자음 ㄱ과 모음 ㅏ가 만나 '가시내'가 되어 팔십 먹은 노인 가슴에 청춘을 안겨다 주었다며 배움 앞에서 저절로 어깨춤이 난다는 임분순 할머니. '글을 알게 해준 우리학당이 119'라는 시어를 보면서 '왜 내가 부끄러웠을까?' 싶었다. 나는 하늘로 가신 엄마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뒤늦게, '천지가 글씨 밭인 세상을 까막눈으로 살아 내느나 애쓰셨습니다'란 말을 해드리고 싶었다.
초록담쟁이님의 순수한 그림 덕분에 끝내 배움의 한을 풀어낸, 살아있는 시어들을 만나게 되었다. 문해교실 학당이란 글밭에서 산과 들에 핀 꽃처럼 노년의 인생에 꽃이 피었다고 기뻐하는 우리들의 부모님들을 만나서 슬펐지만, 슬퍼도 웃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어느 날 이루어지는 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멋진 날>에는 거짓말 같은 새 세상을 만나서 다시 사는 '기적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67명의 할매, 할배가 쓰고 초록담쟁이 그리다'. 그 중에서 '초록 담쟁이 그리다'라는 소개 문구에 꽂힌 나는 바로 동네 책방에서 책을 주문했다. 책 내용보다 표지에 자석처럼 끌려서였다. 따뜻한 책을 품고 집에 왔다. 책 한 권에 펼쳐진 그림들은 여백 없이 차오르는 햇살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 <어느 멋진 날>67명의 할매와 할배가 쓰고 초록담쟁이 그리다 ⓒ 이복희
꼭 필요한 때 외에는 별로 친하지 않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정보를 찾다가 4년 전에 우연히 초록담쟁이님의 그림을 찾아냈다. 요즘 말로 "심쿵"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싶었던 추억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게 초록담쟁이님의 그림은 내게 첫 사랑처럼 다가왔다. 엄마가 그립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친구가 떠오르고, 여행가고 싶은 날이나 마음이 울적해서 눈물이 날 때도 위로가 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햇살이 펼쳐진 거실에 앉아 시집을 펼쳤다. 글의 내용보다 그림을 더 아끼면서 보고 싶었기에 천천히 책을 열었다. 책머리에 '소녀 할머니와 소년 할아버지가 떠나는 시간여행'으로 시작되는 글을 읽으면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한 글자, 한 줄, 한 문장이 고스란히 아픔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글이 아니라 일상이었고 삶이었으며 생의 전부였던 그분들의 마음이 보였다.
삶 안에 켜켜이 쌓인 한과 눈물, 글을 몰라서 부끄러움에 구멍 난 가슴을 매우지 못하고 살아온 배움이란 한, 자음과 모음을 배우면서 철벽같은 설움을 풀어낸 한풀이 늦깎이 시인들이 토해낸 고백의 시와 만났다. 눈물 없이 웃을 수 없고, 웃으면서 눈물이 나는, 우리들의 부모님들이 가슴에 묻어둔 소녀소년 시절을 보았다. 희로애락(喜怒哀樂), 4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시어에는 칠, 팔십 평생 살아온 어르신들의 상처가 담겨있었다.
어린 시절 어리광을 부리고 사춘기를 느낄 새도 없던 때,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싶어도 부모님 눈치 보며 형제자매를 위해 죽을 수도 없었던 그때. 소리치며 원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가난을 이길 수 없음을 알기에 원망조차 할 수 없어 꼴망태 둘러매고 산으로 가 허공에 대고 펑펑 울어야 했던 할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동생들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시집을 가야 했던 할매...
그렇게 청춘을 갉아먹고 까막눈으로 인생을 살아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이제라도 어깨춤을 추며 동네방네 글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어르신들의 시어가 줄줄이 담겨있다.
어깨춤이 절로 나네
심상옥
시장 가려고 버스를 탈 때 글을 몰라 남이 타니까 타는갑다 하고 탔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밀리다가 서리를 당해도 그런갑다 했다
엄마, 오늘 또 한건 했다메 딸들이 놀려도 그런갑다 했다
부모가 다리 밑에 가서 자도 2학년까지만 학교에 보냈어도 좀 나았겠지
글이 그림으로 안 보일 때 글보고 버스 타고 글 써서 돈도 찾고
이 나이에 글 안다고 벼슬이야 하겠냐마는 글 아니까 덩실덩실 어깨춤이 절로 나네
박춘식 어르신이 쓴 시 <보호자>를 읽으면서 펑펑 울었다. 아픈 아들 휠체어에 태우며 병원을 서성인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천 갈래로 찢겨 있을 상황인데 "여기 적혀 있는 곳으로 가세요"라는 간호사의 무표정한 말투에 글을 몰라 읽을 수 없어 무거웠던 종잇조각을 든 불안한 보호자.
한글 공부 4년 만에 간호사가 건네주는 종이는 가벼워졌고 줄줄 읽고 외는 당당한 보호자가 되었다는 시어를 읽는 내 속이 다 뻥 뚫리게 시원해졌다. 얼마나 좋았을까! 자랑스럽게 휠체어를 밀고 다녔을 어르신이 눈에 선했다.
수줍게 써온 이름 석 자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할 때였다. 노인일자리는 어르신들에게 경제적인 작은 도움과 함께 노후 생활에 활기를 주고자 하는 사업이기도 하다. 신체적 변화는 나이를 먹으면 누구에게나 오는 노화 현상이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은 다양했기에 건강하고 힘이 있는 분들은 야외 활동을, 허약하거나 조금 불편하신 분들은 실내에서 활동하도록 배정했다.
어르신들이 활기차게 일하면서 나름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독려하며,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되도록 신경 쓰곤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임무에 충실한 어르신들과 소통하면서 "일자리 주어서 고마워유" 하는 어르신들은 때때로 떡이나 고구마를 가지고와 먹으라며 손에 쥐어주곤 하셨다.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신체적인 조건이나 가정사로 인해 중도 포기하는 분들이 발생했기에 인원을 충당해야 할 때가 있었다. 동네 경로당에서 정보를 입수, 옆집 할매가 가보라고 해서 왔다는 할머니 세 분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서류를 정리하고 사인을 받아야 하는 데 자꾸 딴청을 부리며 왔다 갔다 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없던 나는 난감했다. 안절부절못하던 할머니는 같이 온 일행이 접수를 마치고 먼저 나가자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떨며 무어라 속삭이듯이 말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순간 할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간절함 간곡함 절박함이 보였다.
"할머니 잠깐 저리로 갈까요. 혹시 할머니 글 모르세요?"
말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고개와 함께 흘러나온 한숨만으로도 답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나도 처음부터 이 일자리가 하고 잡헜어유. 그런디 글을 모릉게 어떻게 히야하는지, 차마 친구들에게 말도 몬하고 속상해 있었유, 저네들을 자기 이름이라도 쓰더라구유, 나는 이름도 못 써유 옆집 할매가 선상님이 친절하다고 혀서 용돈이 궁항게 와봤시유. 혹시나 안 될까 봐 그 할매한테도 아즉 말도 못 하구 몰래 왔시유."
우리 부모님 세대는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분이 많았다. 여자는 배우면 안 된다는 가치관으로 학교를 못 다니게 한 외할아버지를 친정엄마도 원망했었다. 몰래 야학을 다니며 자음 모음과 덧셈뺄셈을 막 배우기 시작할 때 할아버지에게 들켜 붙잡혀왔다며 서럽게 우시던 엄마가 떠올랐다.
나는 A4용지를 몇 장 가지고 와 4등분했다. 그리고 큼지막하고 또렷하게 잘 보이도록 이름 석 자를 써드리며 연습하고 다시 오라고 했다. 그리고 삼일 후 굼벵이가 굴러가듯이 열심히 써온 이름 석 자를 보여주면서 수줍게 웃으셨다. 그분은 언제나 모든 어르신들이 다 가고 난 후에 사인을 하면서 내 손을 꼬옥 잡다가 가셨다. 딸 같은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워유'라고 하는, 그분만의 인사였다.
<어느 멋진 날>에는 "나"는 없이 "너"만 먹여 살리기 위해 흙을 일구며 허리가 휘도록 텃밭에 씨를 뿌리기만 했던 우리들의 부모님, 첫사랑이 보낸 편지도, 보고 싶은 자식 만나러 가는 버스 안내 글도, 군에 간 아들 편지도, 자식에게 돈을 부치러 간 은행에서도 이름 석 자 못 써서 차마 말 못하고 손에 붕대를 감고 가셨던 어머니의 한숨이 담겨있다. 그런 부모의 삶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아낸 자식이기에, 나의 영혼도 붉어졌다.
▲ 초록담쟁이 그림가족위한 먹걸이 이고지고 버스를 기다리며 ⓒ 이복희
자음 ㄱ과 모음 ㅏ가 만나 '가시내'가 되어 팔십 먹은 노인 가슴에 청춘을 안겨다 주었다며 배움 앞에서 저절로 어깨춤이 난다는 임분순 할머니. '글을 알게 해준 우리학당이 119'라는 시어를 보면서 '왜 내가 부끄러웠을까?' 싶었다. 나는 하늘로 가신 엄마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뒤늦게, '천지가 글씨 밭인 세상을 까막눈으로 살아 내느나 애쓰셨습니다'란 말을 해드리고 싶었다.
초록담쟁이님의 순수한 그림 덕분에 끝내 배움의 한을 풀어낸, 살아있는 시어들을 만나게 되었다. 문해교실 학당이란 글밭에서 산과 들에 핀 꽃처럼 노년의 인생에 꽃이 피었다고 기뻐하는 우리들의 부모님들을 만나서 슬펐지만, 슬퍼도 웃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어느 날 이루어지는 순간을 나는 기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느 멋진 날>에는 거짓말 같은 새 세상을 만나서 다시 사는 '기적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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