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권력을 내려 놓을 때 보이는 것들
[리뷰] 영화 <블라인드> 사랑은 보려 하지 말고 느끼는 것
▲ 영화 <블라인드> 포스터 ⓒ (주)컨텐츠썬
'본다'라는 권력은 지금까지 세상을 지탱해왔다. 하지만 보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것들이 있다. 바로 내면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볼 수 없어 거울에 비친 모습이나 타인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볼 수밖에 없으며 내면을 보는 눈이 멀어버리면 진실 또한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
종종 우리는 상대방의 외모만 보고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린다. 이를 첫인상 3초의 마법이라고도 부른다. 단 3초 만에 외모를 보고 여러 가지를 판단해 버리고는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저 사람 참 괜찮은 사람 같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현혹돼 상처를 입는 일도 다반사다. 관계는 상대방과의 충분한 교감으로 형성돼야 하건만, 우리는 겉모습만 쫓다 많은 것을 잃는다. 과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까.
▲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주)컨텐츠썬
영화 <블라인드>는 후천적으로 시력을 잃은 소년 루벤(요런 셀데슬라흐츠)과 자기 모습을 혐오하는 마리(핼리너 레인)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전혀 다른 결말을 선보인다. 2006년 작품으로, 무려 15년 만에 우리나라에서 정식으로 개봉한다.
그동안 영화 마니아 사이에서 꽤 회자되었으며, 수많은 팬을 양산했었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한다는 3초의 마법을 비웃기라도 하듯, 각자의 핸디캡을 끌어안는다. 루벤은 보이지 않는 대신 청각과 촉각, 후각을 곤두세워 자기 방식으로 탐색한다. 세상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엄마 캐서린(카텔리네 버벡)은 난폭한 아들 루벤을 위해 책을 읽어주고 씻겨주는 사람을 고용하지만, 오는 사람마다 루벤의 폭력성에 두 손 두 발 들고 떨어져 나가 골치가 아프다. 한편, 새로운 낭독자로 온 마리는 첫 만남부터 기선제압에 성공한다. 거친 야생마 같았던 루벤을 차차 순한 양으로 길들인다. 마리에게 어떠한 신비로운 능력이라도 있는 걸까. 사뭇 마리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마리는 어릴 적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갖은 학대와 폭력을 겪으며 자랐다. 백색증을 앓고 있는 탓에 머리카락과 눈썹은 흰 눈처럼 하얗고 핏기 없이 창백하며, 얼굴과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마리의 상흔은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도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거울 앞에서 똑바로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할뿐더러 늘 사람을 피해 다닌다. 그러던 중 눈이 보이지 않는 소년 루벤 앞에서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는 마리는 해방감을 맛본다. 자신을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 행복이란 감정을 조금씩 알아간다.
루벤은 <눈의 여왕>을 읽어주는 마리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해, 영혼의 눈이라 불리는 제3의 눈을 뜨게 된다. 낭독하는 글귀를 마음으로 보고 아름다운 상상을 맞이한다. 마리의 숨소리와 냄새, 손끝의 감각을 통해 사랑을 배워가던 루벤은 어두운 골방에 형벌처럼 가둬두었던 자신을 조금씩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루벤과 마리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도 잠시, 루벤은 주치의 빅터(얀 데클레어)를 통해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드디어 그토록 갈망하던 빨간 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마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까, 전전긍긍하던 마리는 그의 곁을 떠나기로 한다. 그 후 눈을 뜬 루벤은 마리를 찾아 백방으로 헤매지만 한겨울 눈 속에 파묻힌 듯, 그 어디에서도 마리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 영화 <블라인드> 스틸컷 ⓒ (주)컨텐츠썬
영화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을 떠올리게 한다. 한계를 극복한 다양한 사랑의 모양을 서정적인 북유럽 정서로 그려냈다. 감독은 외모는 껍데기일 뿐 진실한 사랑은 마음의 느낌, 그 자체라고 말한다. 두 주인공을 칠흑 같은 어둠, 순백의 환한 눈꽃 세상에서만 오직 빛날 수 있도록 설정했다. 때문에 관객 또한 냉랭한 감정 속에서 타오르는 심장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루벤의 극단적인 선택이 아직도 짜릿한 통증으로 각인되어 심장을 찌른다. 내내 웃지 않고 화만 내고 있다가 처음으로 미소 짓던 루벤의 입가에서 그들만의 해피엔딩을 엿보았다면 과한 몽상일까. 시종일관 흑백 톤에 가까운 무채색 분위기는 차갑다 못해 시려 뭉클함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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