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오면 '죽음'을 떠올리는 노인들
[서평] '관리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새로운 복지돌봄체계에 대한 구상 '래디컬 헬프'
▲ 폭설로 고립된 어르신 댁을 찾아가는 길재난의 시대, 복지는 어떠해야 할까? 코로나, 폭우, 폭설, 한파 등 예측 할 수 없는 기후 환경의 위기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한다. 이웃복지, 동네복지, 마을복지가 살아나야 한다. 모두가 함께 살 길이다. ⓒ 이민희
폭설과 한파가 마을을 휩쓸었다. 주간보호센터가 사흘 연속 문을 열지 못했다. 도로가 얼어붙고 마을이 고립되었다. 하얀 눈에 뒤덮여 시간이 정지한 듯한 마을은 '잔혹동화' 같다.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반짝이지만 외롭다. 시골의 홀몸 어르신들에게 폭설, 한파, 폭염, 태풍과 같은 날씨는 그 자체로 위협이다.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어르신들 댁에 전화를 돌려 안부를 확인했다.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혼자 계시는 어르신 댁을 방문했다.
"선상님들이 오니께 나가 살어... 으이구, 어서 죽어야 하는디... 혼자서는 암 것도 못하는디 살면 뭣한당가..."
마을이 사라졌다
주간보호센터에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자립생활 불능으로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은 매우 곤란해진다. 도움을 청하거나 도움을 받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추억 속 시골 동네 풍경은 옆집 숟가락 갯수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가깝고도 친밀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빈집은 늘어나고 농촌 시골은 점점 더 '과소화'되고 있다.
'과밀화'의 반대말인 '과소화'는 인간이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기반시설과 사회적 인프라가 붕괴 지경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면 소재지에서도 떨어진 외곽 마을인데, 반경 3km 안에 병원, 약국, 슈퍼마켓, 학교 등이 한 개도 없다.
하루 네 번 정도 다니는 버스를 이용해서는 일상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어려우므로 자가용은 필수품이 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에 놓인 이들이 농촌의 노인들이다. 과소화는 사람들간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고립과 단절, 관계망의 해체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의 악화와 삶의 질 하락으로 이어진다.
도시라고 다를까? 사람과 자원이 집중된 도시는 '과밀화'의 역습을 당했다.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감염병의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쪽방촌의 비극, 생계 비관 자살, 고독사 등이 보여주듯이, 도시의 사람들은 모여 있으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사람들은 자본주의 축적이 쌓아 올린 거대한 도시 문명의 디스토피아 안에서 각자 외로운 섬으로 존재한다.
각기 다른 양상이지만 도시와 농촌 모두 '마을'이 사라지고 있다. 공동체의 붕괴는 취약계층의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을 끼친다. 노동시장의 주변에 존재하거나 복지를 '구매'할 수조차 없는 이들은 더 많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복지'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꿈꾸며 스스로 살아나갈 힘을 줄 수 있을까?
연결의 회복,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
▲ <래디컬 헬프 : 돌봄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 전환> 표지 ⓒ 착한책가게
영국의 사회학자 힐러리 코텀은 책 <래디컬 헬프>에서 돌봄과 복지 제도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복지제도는 20세기 세계대전 이후에 고안된 것으로 21세기에 다양하게 맞딱드린 사회적 문제와 위험 앞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저자가 보기에 전후 사회의 디딤돌이자 실질적인 지지 체계였던 20세기 복지시스템은 거대한 '관리 당국'으로 변모했다. 시스템은 필요와 위기 수준에 따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복지 대상자들을 관리할 뿐이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복지 급여와 서비스 체계도 복잡해진다. 한국에서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서비스의 종류는 360여 가지가 넘는다. 행정부처별로 나뉘어져 서로 통합되지 않는 데다 사회복지담당 공무원도 그 내용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방대하다.
큰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과 수고에 비해 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다. 삶의 벼랑 끝에서 그 어떠한 사회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의 사연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복지 시스템을 손본다며 호들갑을 떨지만 그다지 바뀌는 것은 없다.
저자는 질문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기존 서비스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곁에 서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로 바꾸자는 것이다. 사람들이 부딪친 문제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근본에서부터 탐색해야 한다.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키워드는 '연결'이다. 개인, 가족, 지역 사회가 배우고 일하고 건강하게 서로 맞닿으며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지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러한 지원이 실질적으로 가능한 새로운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새로운 복지는 사람들의 의존성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서는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럭저럭 잘살고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에 방향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를 관리만 하기보다는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사람 사이의 만남과 관계를 엮어갈 수 있도록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40쪽)
영국에서 '파티서플'이라는 단체를 만든 저자는 2006년부터 5개의 사회 실험을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을 연구해왔다. 폭력과 약물중독으로 위기에 놓인 가정, 일자리를 잃고 빈곤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 병원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노인 등과 함께 하며, 그들의 해체된 사회적 연결망을 재조직하고 스스로의 힘을 키워 자립해나가는 과정을 지원했다. '욕구를 관리하는 복지'에서 '역량을 강화하는 복지'로의 전환적 시도는 새로운 복지의 가능성을 창출했다.
예컨대, 위기 가정의 자립을 지원하는 '라이프 프로그램'은 가족이 스스로 미래의 비전과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왔다. 꿈을 설계하고 계획을 수립하고 역량을 기르는데 필요한 사람과 자원을 연결했다. 가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원 체계를 고안해냈다.
이 과정은 가족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권력을 당사자에게 돌려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복지 서비스 대상 자격을 평가하고 요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회수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탐색하는 것으로부터 접근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복지 시스템의 운영 논리는 이런 식이다. 즉, 나를 평가하고, 나를 의뢰하고, 나를 관리하라. 이러한 시스템은 투입(구축 및 전문적 개입 시간)과 산출(위험 행동 감소)을 계산한다. 이 시스템에는 접근이 제한되며 소요 비용이 관리된다. 우리의 실험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제시했다. 우리 모두가 번성할 수 있도록 핵심 역량을 키워라. 필요하다면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반드시 지원을 받도록 하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포함시켜라. 자유롭다는 느낌, 목적의식,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등의 측면에서 변화와 우리 삶의 질을 측정하라. 이것이 바로 래디컬 헬프,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돌봄체제이다. (257쪽)
'행복한 삶'을 위한 급진적인 대안
현대 복지 체계의 시작은 1942년 영국에서 발표된 '사회 보험과 관련 서비스'(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라는 보고서이다. '베버리지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 문건의 슬로건이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사회보장은 모든 국민에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표방했으며, 빈곤을 예방하기 위해 아동수당, 보편적 의료 서비스, 완전 고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래디컬 헬프>는 21세기의 달라진 정치 사회적 위기를 '베버리지 보고서'의 틀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현대의 빈곤은 돈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연결망의 해체, 관계와 공유해 온 경험의 단절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며 "관계의 결핍은 세상에 대한 이해와 지금까지 누려온 풍성한 향유와 물질적 기회들에 영향을 준다"(66쪽)고 진단한다.
▲ 행복한 삶을 위한 역량<래디컬 헬프>의 저자 힐러리 코텀은 행복한 삶을 위한 4가지 역량으로 일과 학습, 건강과 활력, 지역사회공동체, 관계를 제시했다. ⓒ 이민희
복지당국은 '급여'라는 이름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복잡해지는 현대의 빈곤 문제로부터 사회적, 정서적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실질적으로 돕지는 못한다. 과학기술과 복지제도가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는 했으나 '좋은 삶', '행복한 삶'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복지는 행복한 삶을 창출하기 위한 역량을 키울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네 가지 역량이란 ① 일과 학습 ② 건강과 활력 ③ 지역사회공동체 ④ 관계이다.
관리와 통제의 복지에서 역량 중심의 복지로의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연결을 회복하고 네트워크를 강화해야 한다. 필요한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 사람과 자원이 유연하게 연결되고 지지할 수 있는 체계를 고안해야 한다. 이는 기존의 관료적인 복지 행정 시스템의 차원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사람에 주목하고 사람을 연결하는 데 집중하려면 권한이 지역으로 더 분산 이양돼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더 이상 기계적으로 권력을 좌우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신, 정원을 설계하고 식물을 심고 돌보고 가꾸며 필요하면 잡초도 뽑는 수석 정원사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전환은 점진적 단계들을 밟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단계들이 우리 모두와 각자가 번성하는 삶이라는 더 크고 공유된 비전에 연결됨으로써 비로소 급진적이 된다. (340쪽)
2026년 한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이다. 초고령 사회의 충격을 감당할 만큼 국가적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물음표'다.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은데 혁신은 답보 상태다. 문재인 정부가 대한민국 복지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선포한 '커뮤니티 케어'(지역사회통합돌봄)는 아직 어느 지역에서도 실효성 있는 모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래디컬 헬프>에서 말하는 급진적인 대안을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공동체 복지'라고 생각한다. 관료행정이 우선되는 복지가 아니라 관계가 회복되고 공동체가 살아나는 복지이다. 더 이상 서비스의 공급자와 수요자가 명확히 분리되고, 국가와 시장이 그 자격 여부를 판별하여, 혜택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급'을 매기는 복지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 복지는 상호 의존 체계 안에서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이 열리는 복지이다.
오래 사는 것보다 잘 늙는 것이 중요하다. 잘 연결되어야 잘 늙는다. 폭설에 쌓인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동네였어도 이런 불안함, 위기감을 느꼈을까. 관계가 풍성하고 다양한 연결이 가능한 공간에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시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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