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4천여 명 독립군부대 재편성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33회] 독립군 재건에 나선 지 3년여 후 병력이 4천여 명에 대기관총과 대포까지 갖췄다고 한다

등록|2021.02.08 17:32 수정|2021.02.08 17:32
 

▲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최운산과 그 형제들의 독립의지는 여전히 불타올랐다.

일찍이 여러 가지 가업을 통해 사업수완을 키웠던 최운산은 여러 방법으로 모금을 하고, 어느 정도 기금이 모이자 중소 국경 부근에 있는 북간도 산림지대에 독립군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편지를 받은 최우삼과 당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부인 김성녀 여사는 땅을 처분하고 군자금을 마련해 연해주로 보냈다. 최운산 장군 형제들은 삼림 지역인 동녕현의 넓은 땅을 사서 '고려촌'이라고 이름 붙이고 군사학교를 세워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훈련을 마친 군인 중 일부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봉오동 기지처럼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갔다가 언제든 일제와 싸울 때 소집령을 내리면 독립군으로 복귀하도록 하고 다시 돌려보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주석 5)

노령과 만주의 교민들에게 자유시 참변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였다. 희생된 독립군 중에는 국내에서 건너간 애국청년들이 많았지만, 현지 교민들의 자제들도 상당수 있었다. 해서 최운산 형제들이 열정을 갖고 독립군 부대의 재건에 나섰으나 병력을 모으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최운산 장군은 독립전쟁 중에 사망한 독립군 가족에게는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전달하게 했다. 봉오동에 있는 부인 김성녀 여사에게 사망한 독립군 가족들의 생활비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고 모연활동을 하는 독립군이 직접 전달하기도 했다. (주석 6)

이역에서 교민들의 협력이 없이는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마치 교민과 독립운동가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인 것이다. 그래서 최운산은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가족을 잃은 동포들에게 많은 관심을 쏟았다. 먼저 봉오동 구토로 돌아간 부인 김성녀가 앞장섰다.

최운산 장군은 경신참변에서 살아남은 동포들을 도울 방법을 생각했다. '삼동'이라는 지역에 땅을 사서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경신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군 가족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독립군들이 땅을 개간하고 독립군 가족들이 와서 농사를 지으면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고 독립군 가족들도 살 곳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고려촌'과 새로 마련하는 '삼동' 지역에 독립군을 분산시켜 주문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1년의 노력 끝에 삼동 지방의 토지를 구입하고 독립군부대를 옮기고 일제에 의해 집을 잃었던 사람들도 이주를 시작했다. 최진동ㆍ최운산 장군 형제들과 우리 독립군은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다시 처음부터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우리 독립군의 활약이 신문을 통해 국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알려지면서 북간도에 있는 독립군은 다시 대한민국 독립의 희망이 되었다. (주석 7)


최운산 형제들의 이와 같은 동포애와 독립군 재기운동은 국내의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독립군 재건에 나선 지 3년여 후 병력이 4천여 명에 대기관총과 대포까지 갖췄다고 한다.

이미 보도한 바와 같이 북간도와 아령소련 방면 근처에 근거를 둔 독립당 최진동이 거느린 다수의 부하가 무기를 가지고 그 세력이 매우 굳세다 한다. 중국 관헌 간에서도 매우 염려하고 있다. 동녕현지사가 조사하여 길림성 성장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최진동의 부하는 4,199명이며 장총이 4,059개이며 기관총이 27개이며 대포가 4개라고 한다. (주석 8)


주석
5> 최성주, 앞의 책, 74쪽.
6> 앞의 책, 75쪽.
7> 앞의 책, 75~76쪽.
8> 『동아일보』, 1924년 1월 14일.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