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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민족대회 후 달라진 소비에트정권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36회] 내전이 종식되고 일본군이 철병한 후로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등록|2021.02.11 14:06 수정|2021.02.11 14:06
 

1919년 5월 25일 붉은 광장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레닌.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옛 소련)은 결국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74년 만인 1991년 12월 붕괴되고 만다.1919년 5월 25일 붉은 광장에서 붉은 군대 병사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레닌. 1917년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옛 소련)은 결국 한 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74년 만인 1991년 12월 붕괴되고 만다. ⓒ 다함께


10월혁명 후 볼셰비키정권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한인의 지원을 필요로 했으나 한국의 독립운동에 조직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내전이 마무리되면서는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

내전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변화하기 시작한 볼셰비키의 대한인 정책은 자유시참변 이후 본격화되어, 한인에게 약속하였던 독립운동 지원을 중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인에 대한 우호정책도 포기하였다.

1922년 10월 25일 일본군의 최후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고 시베리아전쟁이 종결되자,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은 11월 16일 '극동공화국'의 영토를 통합하고 극동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산하에 한인문제 전권위원부를 두었다. 그 최초의 임무는 한인의 국적문제였다. (주석 6)


러시아는 볼셰비키정부내전 그리고 일제와 싸울 때에는 한인무장부대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가, 내전이 종식되고 일본군이 철병한 후로는 완전히 태도를 바꾸었다. 한인 독립군들은 우선 국적문제에서부터 어려움에 빠졌다.

러시아내 한인사회는 2개의 부류로 분리되는데, 그 하나는 러시아에 살면서도 귀국을 꿈꾸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있던 사람들로서 민족주의적 빨치산부대 사령관으로 된 홍범도와 한인사회당을 만들어 조선에서의 사회주의사상 고취를 도모하던 이동휘ㆍ오성목 등으로 대표되는 여호(餘戶)이며, 또 다른 하나는 연해주의 조선인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던 남만춘ㆍ한창걸ㆍ황하일ㆍ오학묵 등으로 대표되는 원호(元戶)이었다. 그런데 국적문제는 혁명 후 토지분배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주석 7)

이와 같은 러시아의 한인들에 대해 적대정책에는 몇 가지 정치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 극동지역 러시아인들은 일본 점령기 동안 한인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러시아인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하였으며 △ 한인 등 소수민족이 애써 경작한 토지를 강탈하는 것은 짜르시대 이래 러시아인 이민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기존 한인의 존재가 방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소비에트 한인을 시민으로 받아들일 경우 한인에게 대량의 토지를 공급하여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이 있었기 때문에 경쟁상대로 생각하여 추방을 원하였던 것이다. (주석 8)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한국 독립군에게 더욱 어려움은 소련이 일본과 맺은 기본조약이었다.

특히 일ㆍ소 기본조약 5조에서 상호간의 선전 및 파괴활동과 그에 대한 지원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규정되면서 노령에서의 항일투쟁은 물론이거니와 코민테른의 한인사회주의운동 지원은 공식적으로 단절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후 1928년 여름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좌편향노선이 나타나면서 항일투쟁보다는 공산주의가 강조되고 만주와 조선내에서의 항일투쟁에 대한 관심도 급격하게 식어갔다. (주석 9)

'자유시 사변'은 현지의 한인들은 물론 독립군 전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참변'이었다. 당시 한인이 현지를 살펴 본 기록을 일제 정보기관이 입수하여 보고한 내용이다.

연해주에 사는 한인들 중에서 가장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전날의 조선독립군으로 노령에 들어가 공산당 별동대(빨치산)로 동작하여 붉은당으로 하여금 연해주를 점령토록 해 준 사람들이다. 처음에 조선독립군이 노령에 들어가 붉은 당과 연락하였을 때에는 붉은 당은 원래 일본의 적이다.

만일 붉은당이 승리를 거두면 많은 원조를 주어서 독립운동 대성공에 이루도록 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도록 했다. 그래서 모든 전투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서 결국 한인 장교가 연해주별동대의 총사령이 되어 한인과 러시아인들을 통솔하여 쌍성자,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그런데 붉은당이 연해주의 군권과 정권을 완전히 점령한 후에는 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수만의 군인들은 거지가 되어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 이들이 노령을 떠나서 중국으로 가려고 해도 출경을 허락지 않기 때문에 모두 풍천설지(風天雪地)에서 얼어죽는 귀신들이 되어버렸다. (주석 10)


주석
6> 강원식, 「한인의 항일투쟁과 스탈린」, 서대숙 편, 『한국과 러시아관계, 평가와 전망』, 103쪽, 경남대학교 극동문제 연구소, 2001.
7> 앞의 책, 104쪽.
8> 앞의 책, 105쪽, 발췌.
9> 앞의 책, 107쪽.
10> 『연경야화(蓮京夜話)』, 고경 제1272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37, 467쪽, 2001.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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