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병고로 1월 한 달이 통째로 날아갔으나 멈출 수 없는 일
해가 바뀌면서 1월 한 달을 병원 생활로 보냈다. 참 고통스럽고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베푸신 하느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허리통증이 유난히 심했다. 복막투석기가 있는 내 방과 바로 옆 화장실 사이는 몇 발짝 되지 않는데, 1월 2일 밤에는 화장실을 갈 때 한없이 멀게 느껴지면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번 넘어지면 도저히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으니, 나를 일이키기 위해 아내도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겨우 복귀한 침실에서 몇 시간 후 다시 화장실을 가다가 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방 안에 준비해 놓고 있는 플라스틱 소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복막투석 줄을 끌고 가서 화장실을 이용하려 한 것이 불찰이었다.
한참의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실로 복귀한 다음 앉은 채로 소변기를 사용하면서 허리 통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도 화장실을 가지 못할 정도로 걸음 떼기조차 어렵게 된 현실이 실로 비통스러웠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날 아내는 나도 모르게 딸, 아들과 의논을 한 다음 119구급차를 불렀다. 나는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구급차를 타고 서산의료원으로 실려 갔다.
서산의료원에서는 일단 코로나를 의심하면서 먼저 서울 중앙보훈병원과 대전보훈병원 등의 병실 사정을 알아보았다. 전국 각지의 모든 보훈병원은 코로나 방역 거점병원으로 지정되면서 병실마다 만원이라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충남 지역 코로나 방역 거점 병원인 천안 단국대학병원 입원을 권유했다. 우리 부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사설 응급 차량을 불러 타고 단국대병원으로 옮겨갔다.
코로나 방역 거점 병원에 입원하다
자그마치 19만 7천원을 들여 사설 응급차량을 타고 천안 단국대학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내가 코로나 방역 망에 정통으로 걸려들었음을 감지했다. 이미 코로나 방역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나는 허리통증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굳이 화장실을 가다가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은 것과 아침에 또 한 번 무의식중에 넘어진 것 때문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실수만 없었으면, 또 가족들이 깜짝 놀라 119만 부르지 않았으면 비용 들이며 이런 생고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집 안 거실의 내 전용 컴퓨터 안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일거리 생각 때문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컴퓨터 안에서 어느 정도 꼴이 갖춰지고 있는 그 일거리는 어쩌면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일이었다.
나는 현재 3월 1일 출간을 목표로 '촛불시집'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촛불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든 나라이고 민족인데, 그 촛불을 기념하는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기백명 시인들의 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만든 촛불혁명 찬양시집은 존재하지만 한 개인의 촛불 관련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은, 나로서는 역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 부끄러운 일을 감히 내가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촛불시집' 출간 준비 소식을 우리 고장신문에 맨 먼저 알리다
처음엔 그저 네 번째 '목적시집'을 출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2008년의 첫 번째 목적시집인 신앙시집 <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와 2012년의 두 번째 목적시집 <불씨>, 2013년의 세 번째 목적시집 <그리운 천수만> 이후에 이어지는 목적시들을 모아서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을 표방하려 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내 많은 시들에서 강하고 명료하게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촛불혁명 당시 전국 각지의 성당들과 안산시 야외음악당,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대전 현충원 현충각., 경기도 안성시 유무상통마을 등등에서 낭송했던 시들이 여러 편이었다. 또 동학혁명과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행사 낭송시들에서도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꼈다.
출판사와 평론가의 의견도 있어서 결국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 대신 '촛불시집'이라는 표어를 달기로 했다. '촛불의 생명력과 영속성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점, 또 이 지점에서도 나를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퇴원 후 허리 통증이 많이 완화되더니 이제는 제법 걸을 수 있게 되고, 코가래 발작도 많이 줄어서 성당 주일미사에도 갈 수 있게 됐다.
단국대학병원에서 퇴원한 열흘 후 중앙보훈병원으로 옮겨 보름가량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마저 갈 수 없어 노상 기저귀를 차고 살면서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신경외과로 가서 다시 CT를 찍었다 역시 척추협착증이 심한 상태라는 진단과 함께 복막투석 환자라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는 참 절망적이었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단국대학병원에서 신장 관리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폐렴 치료를 한데 이어 보훈병원에서도 계속 폐렴약과 신장약을 함께 처방했고 점차 폐렴균이 졸아들었다. 그러자 허리 통증 완하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되고 퇴원도 할 수 있게 됐다.
1월 3일 밤 방을 나와 화장실을 가다가 엉덩방아를 찧곤 한 것도 폐렴균의 장난이었음을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두 병원에서 퇴원 후 나는 입원과 관련하여 추호도 가족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 앞에는 늘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길잡이를 해주신다는 것을 느낀다. 병원에서 나와 내 네 번째 목적시집인 '촛불시집' 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지난해 12월 말부터 허리통증이 유난히 심했다. 복막투석기가 있는 내 방과 바로 옆 화장실 사이는 몇 발짝 되지 않는데, 1월 2일 밤에는 화장실을 갈 때 한없이 멀게 느껴지면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번 넘어지면 도저히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으니, 나를 일이키기 위해 아내도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한참의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실로 복귀한 다음 앉은 채로 소변기를 사용하면서 허리 통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도 화장실을 가지 못할 정도로 걸음 떼기조차 어렵게 된 현실이 실로 비통스러웠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다음날 아내는 나도 모르게 딸, 아들과 의논을 한 다음 119구급차를 불렀다. 나는 내 뜻과는 전혀 관계없이 구급차를 타고 서산의료원으로 실려 갔다.
서산의료원에서는 일단 코로나를 의심하면서 먼저 서울 중앙보훈병원과 대전보훈병원 등의 병실 사정을 알아보았다. 전국 각지의 모든 보훈병원은 코로나 방역 거점병원으로 지정되면서 병실마다 만원이라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충남 지역 코로나 방역 거점 병원인 천안 단국대학병원 입원을 권유했다. 우리 부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사설 응급 차량을 불러 타고 단국대병원으로 옮겨갔다.
코로나 방역 거점 병원에 입원하다
▲ 입원생활 거의 1월 한 달을 천안단대병원과 서울 중앙보훈병원에서 생활했다. ⓒ 지요하
자그마치 19만 7천원을 들여 사설 응급차량을 타고 천안 단국대학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내가 코로나 방역 망에 정통으로 걸려들었음을 감지했다. 이미 코로나 방역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였다. 나는 허리통증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굳이 화장실을 가다가 두 번이나 엉덩방아를 찧은 것과 아침에 또 한 번 무의식중에 넘어진 것 때문에 이런 사단이 벌어졌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실수만 없었으면, 또 가족들이 깜짝 놀라 119만 부르지 않았으면 비용 들이며 이런 생고생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기도 했다.
집 안 거실의 내 전용 컴퓨터 안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일거리 생각 때문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컴퓨터 안에서 어느 정도 꼴이 갖춰지고 있는 그 일거리는 어쩌면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또 어쩌면 평생의 마지막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한 일이었다.
나는 현재 3월 1일 출간을 목표로 '촛불시집'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촛불혁명'이라는 위대한 역사를 만든 나라이고 민족인데, 그 촛불을 기념하는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기백명 시인들의 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만든 촛불혁명 찬양시집은 존재하지만 한 개인의 촛불 관련 시들을 모은 시집이 없다는 것은, 나로서는 역사를 제대로 살지 못하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 부끄러운 일을 감히 내가 해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촛불시집' 출간 준비 소식을 우리 고장신문에 맨 먼저 알리다
처음엔 그저 네 번째 '목적시집'을 출간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2008년의 첫 번째 목적시집인 신앙시집 <때로는 내가 하느님 같다>와 2012년의 두 번째 목적시집 <불씨>, 2013년의 세 번째 목적시집 <그리운 천수만> 이후에 이어지는 목적시들을 모아서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을 표방하려 했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내 많은 시들에서 강하고 명료하게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촛불혁명 당시 전국 각지의 성당들과 안산시 야외음악당,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대전 현충원 현충각., 경기도 안성시 유무상통마을 등등에서 낭송했던 시들이 여러 편이었다. 또 동학혁명과 안중근 장군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행사 낭송시들에서도 촛불이 불타고 있음을 느꼈다.
출판사와 평론가의 의견도 있어서 결국 네 번째 목적시집이라는 말 대신 '촛불시집'이라는 표어를 달기로 했다. '촛불의 생명력과 영속성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나는 이 시점, 또 이 지점에서도 나를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낀다. 퇴원 후 허리 통증이 많이 완화되더니 이제는 제법 걸을 수 있게 되고, 코가래 발작도 많이 줄어서 성당 주일미사에도 갈 수 있게 됐다.
단국대학병원에서 퇴원한 열흘 후 중앙보훈병원으로 옮겨 보름가량 입원해 있었는데, 그때는 오른쪽 허벅지 통증이 너무 심해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마저 갈 수 없어 노상 기저귀를 차고 살면서 하루는 휠체어를 타고 신경외과로 가서 다시 CT를 찍었다 역시 척추협착증이 심한 상태라는 진단과 함께 복막투석 환자라 수술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때는 참 절망적이었고 비참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단국대학병원에서 신장 관리를 하면서 집중적으로 폐렴 치료를 한데 이어 보훈병원에서도 계속 폐렴약과 신장약을 함께 처방했고 점차 폐렴균이 졸아들었다. 그러자 허리 통증 완하와 함께 걸을 수 있게 되고 퇴원도 할 수 있게 됐다.
1월 3일 밤 방을 나와 화장실을 가다가 엉덩방아를 찧곤 한 것도 폐렴균의 장난이었음을 그때는 생각도 못했다. 두 병원에서 퇴원 후 나는 입원과 관련하여 추호도 가족들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그리고 내 앞에는 늘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길잡이를 해주신다는 것을 느낀다. 병원에서 나와 내 네 번째 목적시집인 '촛불시집' 출간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에도 실렷습니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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