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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조성한 군산 째보선창 '장작거리', 애잔한 풍경들

군산 주민들의 삶과 문화, 역사가 느껴지는 흔적들⑩

등록|2021.02.14 14:33 수정|2021.02.14 14:53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 난로용 장작을 쌓아놓은 모습 ⓒ 조종안


"요즘 굉장히 추운디 나무(장작) 좀 나가는가?"
"그놈의 연탄 때미 장사가 돼야 말이쥬. 나무장사도 끝물인 모양이에유."


어렸을 때(1950년대 말) 군산 째보선창에서 쌀가게 운영하는 어머니와 나무장수(노점상) 아저씨의 대화다. 어머니 쌀가게로 향하는 길목에는 장작, 숯 등을 취급하는 점포와 노점상이 예닐곱 곳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1950년대 초 새로운 땔감으로 연탄(19공탄)이 등장하면서 장작 매상이 떨어지자 나무장수가 어머니에게 푸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무장수 말마따나 그때는 '일등 땔감'으로 대접받는 장작 소비량이 연탄에 뒤지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정부가 산림 보호를 내세우며 연탄의 우수성을 홍보하고, 연탄을 때면 겨울에도 뜨거운 물로 빨래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부유층 중심으로 아궁이 개량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던 것. 그러니 장작 소비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1950년대 '일등 땔감' 장작의 추억
 

▲ 1950년대 초 군산의 거리 모습(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찍음) ⓒ 조종안


1950년대 초, 군산의 어느 구멍가게 앞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이다. 한국전쟁 때 군산 미 공군기지에 근무했던 키스 아이스버그가 찍은 컬러사진이다. 아이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우물 井(정)'자로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시대를 반영한다. 사진에 나타나듯 50~70년대 군산에는 도로변이나 공터에 장작이나 잡목을 쌓아놓고 파는 가게가 많았다.

굵은 통나무를 길쭉하게 쪼갠 땔감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장작(長斫), 가을에 접어들면 장작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장작은 낱개비를 여남은 개씩 묶은 '단(관)'과 대량 단위인 '평(坪)'으로 나눠 거래됐다. 부자들은 마소 짐바리로 10~20평씩 들여 마루 밑이나 광(헛간)에 가득 쌓아뒀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동네 구멍가게에서 한두 단씩 사다가 밥을 해 먹었다.

장작불 지필 때 빠질 수 없는 게 관솔이었다. 소나무 장작에는 관솔이 엉켜있거나 옹이가 있게 마련이었는데 이 부분을 따로 잘라내 쏘시개로 썼던 것. 나무장수들은 향이 그윽한 관솔을 몇 개비씩 묶어 별도로 팔았으며 일반 가정에서는 장작을 패거나 들일 때 관솔에 신경을 썼다. 귀하기도 했거니와 관솔이 있어야 불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나무 장작에는 관솔이 없었다. 대신 갈색을 띠는 소나무 장작에 비해 무겁고 단단했으며 연기가 발생하지 않았다. 색깔도 회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참나무 장작이 화력도 세고 숯불도 더 오래갔다. 밥물이 끓기 시작하면 물을 뿌려 불꽃을 줄이고 뜬 숯은 풍로로 옮겨 생선을 굽거나 찌개나 국을 끓여 먹었다. 이러한 기능은 참나무 장작이 훨씬 우수했다.

째보선창 장작거리, 일제에 의해 조성
 

▲ 일제강점기 죽성포 입구 ⓒ 조종안

   

▲ 신탄시장 개설 알리는 1926년 11월 24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개항(1899) 전후 군산의 민간 무역은 경포(서래장터)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가 장재시장을 개장하고 죽성포(째보선창)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죽성포로 넘겨주게 된다. 이후 죽성포는 군산 지역에서 가장 큰 어항으로 발돋움한다. 1926년에는 신탄시장(장작거리) 조성 계획이 발표된다.
 
"군산항만 수축(群山港灣 修築)에 반(伴)하야 동해안(東海岸)에 약 3천평(約 三千坪)을 매축(埋築)하고 신탄시장급 염건어공장 등(薪炭市場及 鹽乾魚工場 等)을 신설(新設)하기 위(爲)하야 군산부(群山府)와 군산상업회의소(群山商業會議所)와 타협(妥協)한 결과(結果) 부급의소(府及議所)에서 공동경영(共同經營)하기로 출원중(出願中)이라 하며..(줄임)"- 1926년 11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나타나듯 당시 군산부는 동해안(째보선창 부근) 공유수면 약 3000평을 매립, 신탄시장을 조성하고 염건어 공장을 신설하겠다고 밝힌다. 이후 신탄(땔감) 야적장과 선박 화물을 육지로 올리기 편리한 하양장(荷揚場)이 설치된다. 1931년 가을에는 총자본금 2만 원으로 군산신탄주식회사(사장 박창숙)가 출범한다.

1930년대 군산에는 기차역, 영정(영동), 죽성포 등에 장작거리가 조성되어 있었다. 장작, 숯 등을 취급하는 조선상인들 모임인 신탄상조합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그중 죽성포 장작거리는 군산어업조합 남쪽 포구(현 째보선창 공영주차장 부근)에 자리했다. 외지에서 들어온 장작을 화주에게 위탁받아 판매하는 객주도 많았다고 전한다.

신탄시장 조성 후 주민들 원성 높아져
 

▲ 죽성포 화목선 선상에서 장작 직거래하는 모습(1934년 12월 30일 동아일보) ⓒ 조종안


고깃배가 뻔질나게 드나드는 포구에 장작거리가 조성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충청·전라 지역 중심에 자리한 탄토항인데다, 그때는 기차나 자동차보다 선박을 이용한 해상운송이 용이하였고, 고깃배들이 밥할 때 장작 이상으로 좋은 땔감이 없었던 것.

죽성포는 주로 충남 안면도, 서산, 보령, 서천, 강경 전북 줄포, 부안 등지의 신탄선(화목선)이 드나들었다. 야적장에는 섬(島) 지방에서 무단으로 도벌해 온 장작과 솔가지도 더러 있었다. 태풍이나 풍설(風雪)로 뱃길이 끊겨 장작값이 급등하거나 짐을 만재한 화목선 전복 사고로 선원과 화주가 실종됐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질 때도 있었다.

신탄시장 조성 후 주민과 상인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그동안 장작을 배에 싣고 온 화주가 소비자에게 직접 넘겨주는 방식의 직거래가 이뤄졌는데 중간 도매상을 거치게 되자 값이 오르는 등 소비자 부담이 커졌던 것. 일제 당국이 호안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화목선이 이틀 이상 정박하는 것을 금지하자 상인과 주민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졌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그해 8월 '폭리취체령'을 공포하고 물가를 통제하기 시작한다. 군산에서도 경찰이 나서 가격표시 상황을 조사하는 등 감시에 들어간다. 장작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경찰은 위반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단속을 펼쳤다. 그러나 판매가격 조성 수준에 불과할 뿐, 전쟁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막을 수 없었다.

째보선창의 애잔한 풍경들
 

▲ 째보선창에 정박한 돛단배들(1950년대) ⓒ 군옥대관


광복 후에도 장작은 중요한 가정필수품 중 하나였다. 주부들이 겨우살이 걱정할 때도 김장 다음으로 꼽을 정도였다. 째보선창 어부들도 식량만큼이나 귀하게 여겼다. 고깃배에서는 페인트 깡통이나 미제기름통을 개조한 화덕에 밥을 지어 먹었는데, 쌀이 가마니로 있어도 땔감이 없으면 굶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꼬미(출어준비) 할 때도 장작은 꼭 챙겼다.

장작거리는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후반에도 활기를 띠었다. 우람한 체구의 장작 패는 아저씨(도끼꾼)도 여러 명 상주했다. 그들은 두세 명이 한 조를 이뤄 장작 사 가는 사람을 따라가 패주고 품삯을 받았다. 통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모탕에 올려놓고 도끼로 뻐개는 그들의 유연한 손놀림은 오늘날의 곤봉체조 선수 솜씨를 능가했다.

째보선창은 호안을 따라 이어진 좁은 길가에 떡장수, 팥죽장수, 모주장수 등으로 항상 장속을 이뤘다. 간판도 없는 오두막 분위기의 대폿집(선술집)도 즐비했다. 허술한 목로주점으로 지게꾼과 구루마꾼들은 막걸리 한 사발로 하루의 고단함을 달랬다. 철공소와 용접소가 많아 귀를 따갑게 했는데, 대폿집 창을 뚫고 나오는 도끼꾼들의 고함소리도 한 몫 더했다.

선창에 드나드는 고깃배는 대부분 돛단배였다. 음력 조금(8일, 23일) 전후에는 포구에 2~3톤급 소형 목선들이 헌책방의 책꽂이처럼 꽉 들어찼다. 그 자그만 배에서도 밥을 지어 먹었다. 맑은 날 해거름 즈음이면 화장(火長: 배에서 밥하는 어부)들이 밥하느라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애잔한 풍경은 군산 째보선창에서만 볼 수 있는 장관이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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