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명절' 이후, 한밤중에 엄마가 신혼집에 들이닥쳤다
'설날엔 시가, 추석엔 처가' 선언에 불같이 화낸 엄마... 효자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효자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나는 크면서 여러 번 부모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효자였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표를 받아왔고 웬만하면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지 않았다.
내가 효자라는 건 어느 정도 인증된 사실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현우 같은 아들 둬서 좋겠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부러움 섞인 말을 내가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들의 '효자 인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동네 아주머니의 칭찬을 엄마가 들을 수 있도록 했다는 사실이 내가 효자였다는 명백한 증거다.
어느덧 자라 서른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식 전에도 시가와 처가를 오갔다. 설에는 시가에,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들렀다. 각 명절의 중요도에 따라 정한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시월드 드라마의 변곡점, 명절
결혼식 전만 해도 명절 분위기는 유쾌하고 따뜻했다. 명절이 시월드 드라마의 변곡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은 둘이서 하는 게 아니라던데 명절을 보내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30년을 알고 지내온 엄마가 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엄마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엄마의 마음을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6월에 결혼했다. 결혼식 이후 처음 맞는 명절은 추석이었다. 결혼 전에 그랬던 것처럼 추석은 처가에 먼저 들르는 명절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아빠와 엄마에게 연락했다. 처가에 먼저 내려가 보겠다고 알렸다. 아빠와 엄마는 알겠다고 말했다. 이번 명절도 큰 파동 없이 유유히 흘러가겠다고 예상했다. 이때만 해도 시월드 드라마와 영화는 너무 극적으로 표현되었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예정대로 처가에 먼저 방문했다. 장모님은 우릴 반겨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심하셨다.
"결혼식 후 첫 명절인데 시댁부터 다녀오지 그랬어?"
이미 부모님께 연락드렸고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들르는 명절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엄마는 괜찮지 않았나 보다. 오후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장모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그날의 통화는 시월드 드라마 속 불꽃 튀는 갈등의 서막 같았다. 엄마는 작은 아버지들이 내일 오시니까 그전에 집으로 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오는 날이고 결혼식을 했다고 해서 그걸 바꿀 순 없다. 둘째, 작은 아버지들이 오는 상황이어서 예외로 둘 수 있지만 우리가 작은 아버지들을 기다리는 게 의무는 아니다. 게다가 미리 통화까지 한 상태에서 갑자기 오라는 건 우리 부부 입장에서는 난감하다. 셋째, 시가에 작은 아버지들이 오는 것처럼 처가에도 인사를 드릴 어른들이 있다. 처가라고 다르지 않다.
엄마는 그럴 거면 이번 명절에 집에 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집안의 어른들이 우릴 기다리는 게 '무례'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처가의 어른들을 무시하고 시가로 급히 가는 건 더 큰 '무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무례'였다. 상황을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다음날 시가로 이동하자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시가로 이동했다. 우리 부부가 도착하자, 엄마는 약간 뿔이 난 듯 우리를 본체만체 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고 작은 아버지 식구들은 인근 콘도로 이동했다. 엄마는 통화에서도 그랬고 면전에 대놓고 명절날 오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 협박처럼 느껴졌고 단호한 입장을 전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 혼자면 이리저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이제는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통보하면 앞으로 명절에 오지 않겠다."
엄마는 갑자기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며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착한 며느리'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시어머니 선물을 물어보는 직장의 젊은 직원부터 주변 친구들의 며느리 이야기까지.
갑자기 폭탄은 내게서 아내에게로 튀었다. 착한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며, 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와 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어느 날 엄마는 만취 상태로 새벽에 불쑥 서울 신혼집에 들이닥쳤다. 나는 물론이고 아내도 놀랐다. 엄마는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호통을 쳤다.
"남편이 잘못 행동하면 너(아내)라도 잘해야 되는 거 아니니?"
아내와 나는 꾹 참았다. 새벽에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온 엄마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말 꾹꾹 참고 있었는데 엄마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렸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그러니?"
내내 조용했던 아내가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왜 부모님 이야기까지 하시는 거죠? 저희 부모님은 시댁부터 들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셨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엄마는 당황했는지 급히 종전을 선언했다.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다시 택시를 타고서 휙 가 버렸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시가에 들르지 않는다. 명절 선물 세트와 문자 메시지 정도만 보낸다.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가부장제의 기득권을 지닌 아빠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전쟁터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아빠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혼내지도 않았고 엄마를 말리지도 않았다. 내게는 아빠가 소극적으로 엄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본인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엄마의 편에 섰을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엄마와 내가 싸우고 있었다.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이 참 안타까웠다. 엄마는 시집살이로 꽤 고생을 한 걸로 알고 있다. 며느리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말을 몇 번 읊었던 엄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먼 이야기 같던 시월드 이야기는 더 이상 남 일이 아니었고 드라마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니었다
글을 써놓고 보니 우리 부부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단적으로 그려낸 시월드에 사는 부부 캐릭터 같다. 엄마는 시월드 속 악랄한 시어머니 캐릭터랑 똑 닮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악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피해의 경험과 상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다른 가해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엄마는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진로를 비롯해 삶의 중요한 순간에 나의 선택을 존중해왔다. 몇 년 전 명절에도 가족 모임을 뒤로 하고 제주도를 가겠다는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만큼 열려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헛다리를 제대로 짚었다.
추석에 대화한 엄마는 내가 그동안 소통해 온,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이 파국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엄마가 정해 놓은 원칙이 짓밟혔기 때문일까. <타짜> 곽철용의 순정이 짓밟혀 깡패가 된 것처럼, 엄마는 새벽에 신혼집을 들이닥치는 시어머니가 되어 버렸다.
이야기를 들은 몇몇 남성 친구들은 이런 내 상황이 안타까웠던 건지, 날 불효자라고 생각했던 건지, 부모님께 그래도 찾아봬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이다. 말문이 막혔다. 더 자세히 설명한다 한들 못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고 설명할수록 나만 불효자가 되는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 힘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 친구들 말처럼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나는 '효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효자와 페미니스트는 한 몸에 공존할 수 없었다. 간혹 여성 친구들이 남자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나는 "효자만 아니면 된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다.
경험은 진리가 된다. 꼰대는 이렇게 탄생한다. 어디선가 불쑥 '효자 페미니스트'의 사례가 나와 이 젊은 꼰대의 편견을 깨부수어주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 어딘가에 효자 페미니스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배가 아파 온다.
명절 때만 되면 그날 일을 복기한다. 만약 내가 효자가 되기로 선택했더라면 우리 부부 관계는 '최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최선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인격이나 신념 혹은 처세술로 효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내 몸뚱아리는 하나였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기분이었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우리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돌보며 치유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뼈아픈 경험을 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 부부의 믿음과 사랑은 두터워졌다. 나는 효자 페미니스트는 되지 못해 조금 아쉬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전혀 없다.
나는 크면서 여러 번 부모 속을 썩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효자였다.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 때문에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표를 받아왔고 웬만하면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지 않았다.
어느덧 자라 서른이 되었고 결혼을 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식 전에도 시가와 처가를 오갔다. 설에는 시가에,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들렀다. 각 명절의 중요도에 따라 정한 건 아니었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시월드 드라마의 변곡점, 명절
▲ 명절이 시월드 드라마의 변곡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pixabay
결혼식 전만 해도 명절 분위기는 유쾌하고 따뜻했다. 명절이 시월드 드라마의 변곡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은 둘이서 하는 게 아니라던데 명절을 보내면서 실감하게 되었다. 30년을 알고 지내온 엄마가 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엄마가 변한 게 아니라 내가 그동안 엄마의 마음을 잘 몰랐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6월에 결혼했다. 결혼식 이후 처음 맞는 명절은 추석이었다. 결혼 전에 그랬던 것처럼 추석은 처가에 먼저 들르는 명절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아빠와 엄마에게 연락했다. 처가에 먼저 내려가 보겠다고 알렸다. 아빠와 엄마는 알겠다고 말했다. 이번 명절도 큰 파동 없이 유유히 흘러가겠다고 예상했다. 이때만 해도 시월드 드라마와 영화는 너무 극적으로 표현되었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예정대로 처가에 먼저 방문했다. 장모님은 우릴 반겨주시면서도 한편으로는 근심하셨다.
"결혼식 후 첫 명절인데 시댁부터 다녀오지 그랬어?"
이미 부모님께 연락드렸고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들르는 명절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엄마는 괜찮지 않았나 보다. 오후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장모님 눈치를 보며 전화를 받았다.
그날의 통화는 시월드 드라마 속 불꽃 튀는 갈등의 서막 같았다. 엄마는 작은 아버지들이 내일 오시니까 그전에 집으로 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하며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추석에는 처가에 먼저 오는 날이고 결혼식을 했다고 해서 그걸 바꿀 순 없다. 둘째, 작은 아버지들이 오는 상황이어서 예외로 둘 수 있지만 우리가 작은 아버지들을 기다리는 게 의무는 아니다. 게다가 미리 통화까지 한 상태에서 갑자기 오라는 건 우리 부부 입장에서는 난감하다. 셋째, 시가에 작은 아버지들이 오는 것처럼 처가에도 인사를 드릴 어른들이 있다. 처가라고 다르지 않다.
엄마는 그럴 거면 이번 명절에 집에 오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집안의 어른들이 우릴 기다리는 게 '무례'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입장도 이해됐지만 처가의 어른들을 무시하고 시가로 급히 가는 건 더 큰 '무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무례'였다. 상황을 아내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는 다음날 시가로 이동하자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시가로 이동했다. 우리 부부가 도착하자, 엄마는 약간 뿔이 난 듯 우리를 본체만체 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고 작은 아버지 식구들은 인근 콘도로 이동했다. 엄마는 통화에서도 그랬고 면전에 대놓고 명절날 오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다. 협박처럼 느껴졌고 단호한 입장을 전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 혼자면 이리저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이제는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통보하면 앞으로 명절에 오지 않겠다."
엄마는 갑자기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며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착한 며느리'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시어머니 선물을 물어보는 직장의 젊은 직원부터 주변 친구들의 며느리 이야기까지.
갑자기 폭탄은 내게서 아내에게로 튀었다. 착한 며느리들의 이야기를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며, 왜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와 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 어느 날 엄마는 만취 상태로 새벽에 불쑥 서울 신혼집에 들이닥쳤다. 나는 물론이고 아내도 놀랐다. 엄마는 나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호통을 쳤다.
"남편이 잘못 행동하면 너(아내)라도 잘해야 되는 거 아니니?"
아내와 나는 꾹 참았다. 새벽에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온 엄마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말 꾹꾹 참고 있었는데 엄마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렸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그러니?"
내내 조용했던 아내가 억울함과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왜 부모님 이야기까지 하시는 거죠? 저희 부모님은 시댁부터 들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셨는데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엄마는 당황했는지 급히 종전을 선언했다.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며 다시 택시를 타고서 휙 가 버렸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시가에 들르지 않는다. 명절 선물 세트와 문자 메시지 정도만 보낸다.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가부장제의 기득권을 지닌 아빠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전쟁터의 최전선에 있어야 할 아빠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혼내지도 않았고 엄마를 말리지도 않았다. 내게는 아빠가 소극적으로 엄마의 편에 선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본인의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엄마의 편에 섰을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엄마와 내가 싸우고 있었다.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이 참 안타까웠다. 엄마는 시집살이로 꽤 고생을 한 걸로 알고 있다. 며느리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말을 몇 번 읊었던 엄마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먼 이야기 같던 시월드 이야기는 더 이상 남 일이 아니었고 드라마도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니었다
▲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며느리들. 드라마 <며느라기>의 한 장면. ⓒ pixabay
글을 써놓고 보니 우리 부부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단적으로 그려낸 시월드에 사는 부부 캐릭터 같다. 엄마는 시월드 속 악랄한 시어머니 캐릭터랑 똑 닮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악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피해의 경험과 상처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또 다른 가해로 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엄마는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엄마였다. 엄마는 진로를 비롯해 삶의 중요한 순간에 나의 선택을 존중해왔다. 몇 년 전 명절에도 가족 모임을 뒤로 하고 제주도를 가겠다는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그만큼 열려 있는 집안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헛다리를 제대로 짚었다.
추석에 대화한 엄마는 내가 그동안 소통해 온,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끔찍한 사랑이 이 파국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엄마가 정해 놓은 원칙이 짓밟혔기 때문일까. <타짜> 곽철용의 순정이 짓밟혀 깡패가 된 것처럼, 엄마는 새벽에 신혼집을 들이닥치는 시어머니가 되어 버렸다.
이야기를 들은 몇몇 남성 친구들은 이런 내 상황이 안타까웠던 건지, 날 불효자라고 생각했던 건지, 부모님께 그래도 찾아봬야 하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걱정하는 마음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참 답답할 노릇이다. 말문이 막혔다. 더 자세히 설명한다 한들 못 알아들을 것 같기도 하고 설명할수록 나만 불효자가 되는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힘든데 친구들을 설득하는 데 힘 쓰고 싶지 않았다.
만약 친구들 말처럼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나는 '효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효자와 페미니스트는 한 몸에 공존할 수 없었다. 간혹 여성 친구들이 남자친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가 있는데 나는 "효자만 아니면 된다"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한다.
경험은 진리가 된다. 꼰대는 이렇게 탄생한다. 어디선가 불쑥 '효자 페미니스트'의 사례가 나와 이 젊은 꼰대의 편견을 깨부수어주었으면 좋겠다. 한편으로 어딘가에 효자 페미니스트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배가 아파 온다.
명절 때만 되면 그날 일을 복기한다. 만약 내가 효자가 되기로 선택했더라면 우리 부부 관계는 '최악'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결과는 최선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했다. 개인의 인격이나 신념 혹은 처세술로 효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내 몸뚱아리는 하나였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기분이었다.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한 차례의 전쟁을 치르고 우리 마음은 상처투성이였지만 우리 부부는 서로의 마음을 돌보며 치유했다. 굳이 경험하지 않아도 될 뼈아픈 경험을 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 부부의 믿음과 사랑은 두터워졌다. 나는 효자 페미니스트는 되지 못해 조금 아쉬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전혀 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 계정에도 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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