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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반성하니 선처? '어른들'의 태도가 학교폭력 키웠다

등록|2021.02.17 14:47 수정|2021.02.17 14:47
흥국생명에서 활약하고 국가대표가 될 만큼 재능이 있는 이재영-이다영 자매 배구선수의 과거 학교폭력(아래 학폭) 사건이 대통령도 체육계의 고질적인 폭력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지시할 만큼 국가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두 선수에 대한 징계가 내려지면서 흥국생명의 감독은 이사태가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속내를 비추기도 했다. 그리고 두 자매의 아버지는 용서를 구했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현실적으로 두 선수가 빠지면서 흥국생명은 내리 4연패 중이니 속이 탈만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런 '어른들'의 태도가 학교폭력을 구조적 폭력으로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잘못했다고 했으니 이제 없던 일로 하고 자기들 좋은 대로 무마하고 지나가자는 태도야 말로 학교폭력보다 더 그릇된 2차 폭력이다. 그리고 이러한 어른들이 존재하는 한 구조적 폭력은 결코 제거될 수 없다.

이번 사건과 마찬가지로 학폭은 개인 간의 사사로운 감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폭력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대부분 '어른들'이 만든다.

물론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 두 자매의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다. 특히 피해자가 밝힌 내용 가운데 두 자매가 폭언, 폭력, 갈취를 넘어서 다른 사람을 시켜 폭력을 가했다는 대목은 많은 이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두 자매의 아버지가 자식들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그러한 발언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부모의 소임을 다 하지 못하여 자녀들을 폭력배로 만들었거나, 눈치를 채고도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방임한 것.

이른바 '엘리트' 체육 선수만 되면 무엇이든 용서할 태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아버지가 체육계에 오래 몸담고 있으면서 여러 명의 국가대표도 길러낸 '유능한' 체육 지도자인만큼, 체육계의 오랜 병폐인 '구조적 폭력'의 존재의 개연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가 만무하다.
 
용서를 구하는 자필 편지를 썼음에도, 흥국생명과 국가대표에서 퇴출되었음에도 국민들의 분노가 여전한 이유를 아버지는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그것도 반성하고 있는 '엘리트' 선수의 장래를 망칠 일이 있느냐는 억울함을 행여 마음에 지니고 있다면, 폭력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건 이 두 자매 중 한 명이 소셜미디어에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해 왔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해자'였던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피해자가 되었다고 추정되는 상황을 온 세상에 밝힌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구조적 폭력의 가해자들의 행태이다.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자신의 행동의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식별력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곧 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상황이 계속 자신에게 이롭게 유지되고 그 상황이 제도화되면 도덕감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틀 안에서 도덕감을 상실하는 것은 일부 '엘리트' 체육 선수들만이 아니다.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법조계이다. 법을 '주무르다' 보면 마치 자신들이 법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착각이 제도적인 방어막으로 보호를 받게 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법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의 부도덕과 불법 행위는 무마하는 이른바 '법꾸라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사악함과 더불어 구조가 그들을 방어해주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한 개인의 뜻을 바꾸도록 하여 그의 도덕성을 증진하는 것은 공자가 갈파한 대로 수천의 군대의 수장을 사로잡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개인의 도덕성을 함양하는 것에도 계속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조적 폭력을 조장하는 구조 차제를 혁파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구조적 폭력을 조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엘리트주의이다. 이 엘리트주의는 계급주의는 낳은 근원이다. 이미 신라시대부터 최치원도 치를 떨게 만든 계급주의는 면면히 이어져 조선시대의 당파주의와 결합되어 오늘날의 학연, 지연, 혈연의 구조 안에서 고착화되었다.

그래서 정치계뿐 아니라 법조계, 학계, 체육계, 언론계, 문화계 등 사회 모든 곳에 뿌리 깊은 종기처럼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학연, 지연, 혈연의 그물망 안에서 고이 보존된 엘리트주의는 사회적 부패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른바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해 집단 이기주의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독재 권력은 물론 중국, 일본, 미국과 같은 외세에 기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부패 집단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아 대한민국의 건전한 발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이제 경제적으로는 세계 7위의 국가가 되었지만, 사회의 부패 정도를 측정하는 '부패지수'(CPI)에서는 OECD 회원국 35개 국 가운데 27위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박근혜 정권 때인 2016년의 53점에서 2019년 59점으로 상승해 이 정도이다. 한국보다 부패지수가 더 낮은 나라는 폴란드, 체코, 이탈리아, 그리스, 헝가리, 터키, 멕시코 정도이다.

이러한 거시적인 차원에서 두 배구선수의 학폭이 해석되어야만 근원적인 해결에 접근이 가능하다.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제기되는 변명인 '극히 일부의 일탈'로 보기에는 그 구조적 폭력의 뿌리가 너무 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조적 폭력과 그에 따른 부패를 척결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당연히 제도 개혁과 의식 개혁의 병행이다. 특정 집단에 과도한 권력이 집중되어 무소불위의 권한을 발휘하는 현상을 최대한 제어해야 한다. 그래서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 개혁도 이러한 구조적 폭력의 척결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검찰의 '엘리트주의'는 거의 목불인견의 수준에 이르렀다. 국민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군림해온 검찰개혁이야말로 한국 사회에 고착화된 구조적 폭력의 틀을 깨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배구 선수의 학폭과 검찰 개혁이 결국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이 없이는 학폭도, 검찰의 부패도 막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개혁은 제도의 개선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국민들의 의식 개혁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왜 검찰이 개혁되어야 하는지, 왜 '학폭'은 구조적 폭력이며, 그 해결을 위해서는 헤겔이 말한 '전체성'(Totalität)의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문제인지를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정부와 여당 단독으로 법제도의 개선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폭력 예방 교육을 포함한 인성 교육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초중등학교에서의 윤리도덕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면 수능에서 윤리과목을 만점을 받은 검사들이 타락할 수는 없다. 인성교육은 학교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교육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엘리트주의'에서는 인성교육마저 인지교육으로 전환하여, 윤리과목의 수능 점수로 환산하는 오류를 범하기에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인성교육은 윤리 교과목에서 배타적으로 다루는 주제가 아니다. 마치 생활체육이 있듯이 생활 인성교육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초중등학교 과정에서 모든 과목이 인성교육의 도구가 되어야 하고 학교 밖에 생활에서도 인성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인성교육은 무엇으로 시작할 수 있는가? 책 읽기이다. 책 읽기는 단순히 교양과 지식을 쌓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 문자화 된 것을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이 해석해 나가면서 다른 타인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대화로도 가능하지만 대화는 지나가버리고 만다. 책은 상대방의 마음을 두고두고 되풀이하여 이해하는 연습을 하도록 해준다. 모르는 내용은 다시 한번 더 읽고 또 읽는 가운데 타인의 생각에 대한 관심, 나와는 다른 생각에 대한 이해심이 늘게 되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인들은 하루 평균 3시간 40분을 모바일 기계를 사용했다. 그리고 모바일 앱을 구매하느라고 5조 8천억 원의 돈을 지불했다. 그런데 2020년 기준으로 한국 성인들은 1년에 6권의 책을 읽는다. 그런데 초중등학교 학생들이 1년에 33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를 전체 평균을 해보아도 하루 독서 시간은 30분 정도이다. 결국 수능과 동시에 책을 손에서 버리는 것이 한국인들이다. 책을 읽는 목적이 타인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오로지 명문대 입시와 엘리트코스이기 때문이다. 엘리트가 되어 권세를 부리며 호의호식하면 그만이지 그 따분한 독서를 왜 한다는 말인가?

문자 그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닐 수 없다. 참고로 독일과 비교해 보자 독일 국민의 12%는 1년에 3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11%는 30권까지, 27%는 20권까지 26%는 10권까지 그리고 그 나머지 24%도 평균 5권을 읽는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평균 36권을 읽는다. 한국의 9배이다.

독일이 선진국인 이유는 단순히 경제력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사회적 통합 능력은 통일 이후 그리고 난민 수용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힘은 모두 타인에 대한 이해, 곧 사회적 공감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엘리트가 되기 위해 죽자 사자 입시나 고시 참고서만을 읽는 나라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구조적 폭력을 없애는 길은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 공감능력은 30초에서 10분을 넘지 않는 유튜브 영상이나 앱툰으로는 결코 키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독서밖에 없다.

배구선수의 학폭에서 결론이 독서에 이른 것이 생뚱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범람하고 커뮤니케이션이 과도할 정도인 21세기의 ICT 사회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외롭다. 대화를 하지만 대화가 아니다.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정을 나누지만, 그 정은 접속을 종료함과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책은 2,500년 전 사람과도 정을 나누는 도구가 된다. 그러니 이제라도 인터넷 접속을 끊고 책을 들어볼 일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훈련이 시작될 것이다. 아직은 희망이 있다. 어른들이 먼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의 모범이 되기 전에 스스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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