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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민은 일관되게 이런 시장을 뽑았다

[이런 시장을 원한다!] 시장 선거가 대선 전초전? 글쎄... 과연 그럴까

등록|2021.02.22 13:28 수정|2021.02.22 13:28
2021년 4월 7일 재·보궐선거가 치러집니다. <오마이뉴스>에서는 '이런 시장을 원한다!'는 각계각층 유권자의 목소리를 시리즈로 소개합니다. '뉴노멀' 시대 새로운 리더의 조건과 정책을 고민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말]

▲ 서울특별시청 ⓒ 이희훈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대통령으로 가는 전초전이라고들 말한다. 의원내각제 하의 1960년 지방선거 때는 그것이 국무총리로 가는 전초전이라고들 말했다.

1960년 11월 27일 자 <동아일보> 기사 '서울시장선거'는 "서울특별시가 행정상 우리나라의 수도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라는 이유뿐 아니라, 뉴욕시장이 대통령후보가 될 수 있는 정도로 정치적 비중이 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서울특별시장이 국무총리 후보의 비중을 가진다"고 말했다.

서울시장이 대통령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이제까지의 민선 서울시장 중에서 그렇게 된 인물은 2002년 시장에 당선된 이명박밖에 없었다. 총 9차례 선거에서 김상돈·조순·고건·이명박·오세훈·박원순 6명이 배출됐지만, 대권의 꿈을 이룬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서울시장 직이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되지만, 대통령으로 가는 길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언론이나 정치권은 '대선 전초전'을 운운하며 선거를 흥행시키려 했지만, 투표권을 가진 서울시민들은 대선보다는 다른 것을 좀 더 우선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민들이 그리는 이상적인 서울시장 이미지는 대통령 이미지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었다.

2010년 오세훈 재선, 2014년 박원순 재선 및 2018년 박원순 3선에서 나타나듯이 현역 시장이 패배한 적이 없다는 점 외에, 역대 선거에서 나타난 유형 중 하나는 현실 정치의 때가 덜 묻은 후보가 항상 당선됐다는 점이다.

자유당이 몰락한 뒤에 치러진 1960년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가 정착된 1995년 이후의 8차례 선거는 어떤 형태로든 여야 양대 정당이 참여하는 가운데 치러졌다.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2011년 보궐선거 때도 박원순을 당선시킨 표의 상당수는 제1야당인 민주당의 지지표였다. 이렇게 양대 정당이 각축하는 가운데서도 서울시민들은 정치적 때가 덜 묻은 후보에게 표를 던져왔다.



이명박도 지금과 달리 2002년에는 때가 덜 묻어 있었다. 이명박이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는지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당시, 유권자들에게 비쳐지는 그의 모습은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되고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때가 덜 묻은 인물이었다.

2007년 대선 전에 이명박 신드롬이 불어 그의 당선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은, 이런 신드롬이 불 가능성이 있었을 정도로 대선 이전의 이명박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런 이미지가 2002년에는 훨씬 강하게 남아 있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의 민선 시장인 조순 역시 신선한 이미지의 덕을 봤다. 육사 교관 시절 노태우를 가르친 인연으로 노태우 정부의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를 역임한 적은 있지만 1995년 이전의 조순은 여의도 정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 공천으로 시장에 도전한 조순은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경제학자 이미지가 강했다. 그가 쓴 경제학 책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1974년에 쓴 <경제학원론>은 제자인 정운찬 서울대 교수와의 공저로 변신하면서 1992년 8월 31일 현재 4판 6쇄까지 인쇄됐다.

제30대 선거가 있은 1995년 당시, 타이완(대만)에서 수입된 드라마 <판관 포청천>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주인공 포청천뿐 아니라 전조·공손책과 마한·장용·조호 같은 등장인물들도 인기를 얻은 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조순은 '서울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었다. 생김새나 눈썹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자들이 추천하는 그의 강직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다.

시장 선거 사흘 뒤 발행된 그해 6월 30일 자 <동아일보> '조순 씨, 고맙다 포청천'은 "서울시장 후보 조순 씨가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은 것은 94년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라며 "강의를 듣던 제자들이 강직한 면모나 생김새가 포청천과 꼭 닮았다며 붙여주었다"고 말한다.

김대중 지지자들이 민주당에서 새정치국민회의로 옮겨간 뒤에 이 당의 공천으로 제31대 시장이 된 고건 역시 전임자 조순처럼 정치적 때가 별로 묻지 않았다. 1975년에 전남지사가 되고 전두환 정권 때 교통부 장관 및 민주정의당(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노태우 정권 때 관선 서울시장을 역임한 고건은, 유능한 행정 관료 이미지는 강해도 현실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 1995년 제30대 서울시장 선거 포스터.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드라마 <판관 포청천>의 영향으로 조순은 '서울 포청천'이란 별명을 얻었다. 생김새나 눈썹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자들이 추천하는 그의 강직한 이미지 때문이기도 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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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고건-이명박에 이어 2006년 제32대 시장으로 당선된 오세훈도 신선한 이미지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판관 포청천>이 방영된 지 보름 뒤인 1994년 10월 31일까지 배금자 변호사와 함께 6개월 동안 MBC 교양 프로그램 <오 변호사 배 변호사>를 진행하면서 신선하고 훈훈한 이미지를 준 31세 오세훈은 10년 뒤인 2004년에도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을 줬다.

39세 때인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서울 강남구을에서 당선된 그는 제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1월 6일 불출마 선언으로 <오 변호사 배 변호사> 이상의 감동을 줬다. 4년간 국회의원을 하면서 정치자금 모으는 일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은 유권자들이 그를 다시 보도록 만들었다. 그달 6일 자 <경향신문> '오세훈 의원, 선배들 거취 돌아보길'은 이렇게 말한다.
 
오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힘겨운 갈등에 가슴 아파 했고, 이는 정치개혁과 깨끗한 정치 실현을 위해 참여한 제게 견디기 힘든 자기모순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정치개혁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던 시대에 개혁의 상실을 경험했으며, 그 현실에 대해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어 "정치현실에 정통하지 못하면서 정치를 바꿔보겠다고 덤벼든 무모함이 부끄럽고, 잘못된 길을 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묵인한 무력함이 부끄럽고, 묵인을 넘어서서 어느새 동화되어간 무감각함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의 자아비판은 2년 뒤 그가 신선함을 무기로 제33대 시장에 당선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상급식을 저지하며 시대 흐름에 역행하기 전까지 그에게는 그것이 강점이었다.

성희롱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박원순이 오세훈 사퇴 뒤에 시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정치권과 거리를 두고 시민운동가로 오래 활동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가 덜 묻은 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선호가 제1회부터 제7회까지의 지방선거에서 일관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신선

1960년 당선된 김상돈 시장도 엄밀히 말하면 어느 정도 신선했다. 1960년 시장 선거 직전까지 그는 4선 국회의원이었다. 그래서 정치적 때가 묻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승만과 경찰에 의해 좌절된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부위원장 출신이었다. 친일세력과 이승만에 의해 날개가 꺾인 친일청산 기구의 핵심 멤버였던 것이다. 1995년 이후의 당선자들과는 결이 다르지만, 그도 어느 정도는 참신함을 갖고 있었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신선함이나 참신함이 중요했다는 점은 유력 낙선자들의 면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1995년 조순(42.4%)에 이어 2위를 기록한 무소속 박찬종(33.5%) 역시 우유광고 모델까지 했을 정도로 신선함의 대명사였다. 무소속인데도 33.5%를 득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거기에 있었다.

2002년에 이명박(당시 61세)과 격돌한 김민석(38세)은 젊고 유능하긴 했지만, 정치적 경력이 있는 편이었다. 1996년과 2000년 총선 때 당선된 그는 낙선한 1992년 총선 때도 주목을 크게 받았다. 민주자유당(민자당) 나웅배 후보에게 3백 표도 안 되는 근소한 차이로 패했기 때문이다. 나이로 보면 그가 더 신선했지만, 정치적 경험이 더 많고 정치적 이미지가 더 강했다는 점이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불리했다고 볼 수 있다.

오세훈 후보와 2006년에 맞선 강금실(열린우리당)과 2010년에 맞선 한명숙(민주당) 역시 신선하고 참신했지만, 두 인물의 신선함은 노무현 정권과의 강력한 인연 때문에 어느 정도 상쇄되는 측면이 있었다.

박원순 후보와 2011년에 맞선 2선 국회의원 나경원(한나라당)은 박원순의 신선함에 비견될 만한 요소가 별로 없었고, 2014년에 맞선 정몽준(새누리당) 역시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2018년에 박원순에 이어 2위를 기록한 김문수(자유한국당)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3위를 차지한 안철수(바른미래당)의 경우에는, 안철수 신드롬이라는 신선한 현상이 일어난 지 7년 정도 경과한 뒤였다.

열망
 

▲ 지난 10일 이명박씨가 기저질환 치료를 위해 동부구치소를 나와 머물던 서울대병원에서 퇴원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법무부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 권우성


1995년 이후의 역대 선거가 사실상 양당 구도로 전개되면서도 후보자의 신선도가 중요했다는 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특정 정당을 찍어주는 충성표가 대선에 비해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크게 축소됐음을 의미한다. 총선이나 대선과 달리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양대 정당으로부터 자유로운 유권자들의 범위가 넓어졌고, 이 유권자들은 현실 정치적 능력보다는 정치적 신선함이나 참신함을 우선시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서울시민들이 무조건 참신함이나 신선함만을 절대시 한 것은 아니다. 깨끗함으로 치면 조순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박찬종이 패배한 것에서도 나타나듯이, 서울시민들은 깨끗한 후보가 유력 정당의 공천이나 지지를 받는가도 참고했다고 볼 수 있다. 당선 후에 정치적 역량을 어느 정도 발휘할 수 있는지도 당연히 감안했던 것이다.

이처럼 서울시민들은 때가 덜 묻은 순수한 인물을 시장으로 선호했지만, 1995년 이후의 당선자들은 그 뒤 그런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다. 그 뒤 그들은 정치적으로 크게 변질 또는 변색됐다.

조순은 대통령 출마를 목적으로 임기도 채우지 않은 채 서울시청을 나갔고, 오세훈은 시대 흐름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무모함을 보였다. 박원순 역시 자신의 평생 업적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의 과오를 범했다. 이명박도 다르지 않다. 그는 지금 감옥에 들어가 있다. 다들 깨끗함과는 거리가 먼 방향으로 자신의 정치 인생을 훼손했던 것이다.

고건을 제외한 나머지 시장들은 서울시민들의 열망을 명시적으로 저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 때가 덜 묻은 시장을 선호하는 서울시민들의 열망은 아직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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