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뒤통수 치며, 한국 은밀히 도운 체코 사람들
[김종성의 히,스토리] 체코 군단
한국이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데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나라들이 있다. 그중에서 미국·소련·중국의 지원은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그 뒤 부정적 영향도 남겼다. 미국의 지원은 특히 그랬고, 소련의 지원도 상당 부분 그랬고, 중국의 지원도 그랬다.
이 세 나라는 한국과 가까웠다. 소련은 본거지는 멀었지만 극동 영토를 통해 한국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는 멀어도 군사적으로는 가까웠다. 태평양 건너편에 있지만, 군대 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는 태평양을 걷어내면 일본과 붙어 있는 것과 진배없다. 거기다가 1886년에 인디언과의 전쟁을 끝내고 1898년부터 2년간 필리핀·괌·웨이크·사모아·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주요 섬들을 차지한 뒤로는 훨씬 가까워졌다.
이들 가까운 나라들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은 어떤 형태로든 짐이 된 데 비해, 이런 부담을 남기지 않은 지원도 있었다. '기분 좋은 지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있는 체코가 그런 도움을 제공했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한국 독립군이 거둔 최대 전승은 청산리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연대장을 비롯해 네 자릿수의 인명을 잃었다. 독립군의 희생도 물론 적지 않았다. 세 자릿수의 한국인도 생명을 잃었다.
김좌진·이범석·나중소가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치른 청산리 대첩은 현지 한국인들의 지원과 독립군 장병들의 희생에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체코인들의 조력에도 적지 않게 의존했다. 체코와 한국 독립운동의 인연도 보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동병상련
체코도 외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민족은 한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조선왕조에서 폭군 연산군이 축출되고 20년 뒤인 1526년부터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이 일본한테 당한 경제적 측면의 제국주의 지배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까지도 체코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이 민족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체코인들의 관심은 1919년 3·1운동 얼마 뒤 체코 독립군의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 1892~1948) 사령관이 상하이에서 만난 여운형·안창호 등에게 했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카르다'로 잘못 표기된 이 20대 독립투사는 이렇게 발언했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체코인들의 관심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주한체코대사로 근무한 역사학자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sa jr)에 의해서도 한층 더 알려졌다. 체코 망명정부 기관지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서 3·1운동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는 점이 그가 한국 언론에 공개한 기관지 원본을 통해 더 명확히 전해졌다.
올샤 대사와 한 인터뷰를 담은 2010년 2월 23일 자 <주간조선> 기사 '체코슬로바키아 신문, 3·1운동 잇따라 보도'에 따르면, 위의 <덴니크>는 1919년 3월 18일 자 기사에서 3·1운동을 이렇게 보도했다.
<덴니크>는 3월 18일과 28일에 이어 5월 13일에도 3·1운동을 보도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은 혁명 잡지를 인쇄한 비밀시설을 찾아냈다"라고 한 뒤 "도쿄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이렇듯 <덴니크>는 2개월 넘게 진행되던 3·1운동의 동향을 지켜봤다.
1910년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국과 체코는 동병상련이 됐다. 그런데 4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두 민족의 처지가 달라졌다. 한국은 연합국 소속인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데 반해, 체코는 동맹국 소속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1867년부터 동일한 군주 하에서 동일한 국제법 주체가 되는 물적동군연합(物的同君聯合, 둘 이상의 국가가 실질적으로 연합하여 한 군주를 세운 연합)이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시기의 국명이다. 체코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로 바뀌었다.
제1차 대전 당시 한국인들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로 구성된 동맹국 진영이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반면, 체코인들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일본으로 이뤄진 연합국 쪽이 이기기를 바랐다. 전쟁을 대하는 두 민족의 감정은 달랐다.
체코 군단과 청산리 대첩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을 돕게 될 체코 군단은 이런 구도에서 탄생했다. 당시 러시아 땅인 우크라이나(폴란드와 러시아 중간)에서 결성된 이 독립군 부대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앞세워 러시아를 도와 동맹국 진영에 맞섰다. 한국 독립군이 가져보지 못한 대규모 병력을 이들은 갖고 있었다.
만약 대전 중에 판세가 바뀌지 않았다면, 체코 군단과 한국 독립운동의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의 전쟁 이탈을 초래했고, 이는 러시아와 독일의 강화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성된 상황이 체코 군단과 한국 독립운동을 이어주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 혁명으로 체코 군단은 미묘한 처지에 놓였다. 러시아가 더 이상 동맹국과 싸우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2019년에 <동국사학> 제67집에 실린 황정식 동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 군단'은 러시아 혁명 뒤 프랑스의 지휘를 받게 된 체코 군단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동맹국 진영 때문에 서쪽으로 직행할 수 없기 때문에 체코 군단은 우랄산맥을 넘고 시베리아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유럽으로 돌아가는 노선을 택했다. 일본군의 영향이 미치는 시베리아를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체코 군단이 일본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제로도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은 그들을 보호하여 블라디보스토크항까지 안내하였다"라고 1996년 <군사논단> 제7호에 실린 허만위 북한학회 이사의 논문 '항일독립군, 체코 군단 무기 비밀 운반 사례 연구'는 말한다.
이처럼 일본군의 지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온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군의 조력자가 된 것은 그들이 식민지 한국의 처지에 주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허만위 논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체코 군단이 보유한 무기가 더는 필요 없게 된 사정이 그들과 한국 독립군을 연결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한국 독립군 진영인 북로군정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 군단의 사정을 파악한 뒤 비밀 접촉에 나섰다. 그 결과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 발, 수류탄, 권총 등을 대량으로 확보하게 됐다.
북로군정서가 요구한 양은 그보다 많았지만, 체코 군단은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허만위 논문은 "후에 알려진 바로는 보병 소총 1정당 가격은 7원이었다고 한다"라며 "이는 독립군이 무장을 넘겨받을 때 중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노동자의 품삯에 지나지 않는 헐값이었다"라고 말한다.
체코 군단은 1920년 7월 북로군정서에 무기를 넘기겠다고 통지했고, 현지 한국인들과 독립군은 500리 숲길을 통해 은밀히 무기를 운반했다. 이것이 그해 10월 청산리 대첩에 투입됐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인들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체코인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한국 독립군의 전력 강화를 이뤄냈던 것이다.
체코 군단 자신의 필요나 금전적 이해관계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들의 지원은 한국이 식민지 시기 최대의 항일 전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것이 곧바로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체코인들의 지원은 미국·소련·중국의 지원보다 값진 측면이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군사적 지원은 훗날 한국의 주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기분 좋은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나라는 한국과 가까웠다. 소련은 본거지는 멀었지만 극동 영토를 통해 한국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는 멀어도 군사적으로는 가까웠다. 태평양 건너편에 있지만, 군대 이동 시간이 그리 길지 않는 태평양을 걷어내면 일본과 붙어 있는 것과 진배없다. 거기다가 1886년에 인디언과의 전쟁을 끝내고 1898년부터 2년간 필리핀·괌·웨이크·사모아·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주요 섬들을 차지한 뒤로는 훨씬 가까워졌다.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한국 독립군이 거둔 최대 전승은 청산리 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연대장을 비롯해 네 자릿수의 인명을 잃었다. 독립군의 희생도 물론 적지 않았다. 세 자릿수의 한국인도 생명을 잃었다.
김좌진·이범석·나중소가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치른 청산리 대첩은 현지 한국인들의 지원과 독립군 장병들의 희생에 일차적으로 기인하지만, 체코인들의 조력에도 적지 않게 의존했다. 체코와 한국 독립운동의 인연도 보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청산리 대첩 승전 기념 사진 ⓒ 독립기념관
동병상련
체코도 외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민족은 한국보다 훨씬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조선왕조에서 폭군 연산군이 축출되고 20년 뒤인 1526년부터 이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한국이 일본한테 당한 경제적 측면의 제국주의 지배와는 성격이 다소 다르지만,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대까지도 체코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이 민족은 한국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 대한 체코인들의 관심은 1919년 3·1운동 얼마 뒤 체코 독립군의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 1892~1948) 사령관이 상하이에서 만난 여운형·안창호 등에게 했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카르다'로 잘못 표기된 이 20대 독립투사는 이렇게 발언했다.
귀국의 독립선언은 역사상 드문 용기와 애국심을 보인 것입니다. 세계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고 칭찬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감동을 많이 받은 것은 우리 체코 국민입니다. 나는 귀국의 앞날이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아직은 일본의 압박 밑에 있으나 세계의 대세는 이미 일본군국주의를 허용하지 않는 시기입니다. 귀국민이 통일·인내·용전의 세 가지로 진행한다면 독립이 완성될 날도 멀지 않을 것입니다.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체코인들의 관심은 2008년부터 2014년까지 주한체코대사로 근무한 역사학자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sa jr)에 의해서도 한층 더 알려졌다. 체코 망명정부 기관지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서 3·1운동을 관심 있게 보도했다는 점이 그가 한국 언론에 공개한 기관지 원본을 통해 더 명확히 전해졌다.
올샤 대사와 한 인터뷰를 담은 2010년 2월 23일 자 <주간조선> 기사 '체코슬로바키아 신문, 3·1운동 잇따라 보도'에 따르면, 위의 <덴니크>는 1919년 3월 18일 자 기사에서 3·1운동을 이렇게 보도했다.
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고 서울발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시위 군중은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까지 행진했다. 서울 거리는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경찰과 군은 봉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덴니크>는 3월 18일과 28일에 이어 5월 13일에도 3·1운동을 보도했다.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은 혁명 잡지를 인쇄한 비밀시설을 찾아냈다"라고 한 뒤 "도쿄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이렇듯 <덴니크>는 2개월 넘게 진행되던 3·1운동의 동향을 지켜봤다.
1910년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한국과 체코는 동병상련이 됐다. 그런데 4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두 민족의 처지가 달라졌다. 한국은 연합국 소속인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데 반해, 체코는 동맹국 소속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1867년부터 동일한 군주 하에서 동일한 국제법 주체가 되는 물적동군연합(物的同君聯合, 둘 이상의 국가가 실질적으로 연합하여 한 군주를 세운 연합)이 됐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그 시기의 국명이다. 체코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로 바뀌었다.
제1차 대전 당시 한국인들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터키로 구성된 동맹국 진영이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반면, 체코인들은 영국·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일본으로 이뤄진 연합국 쪽이 이기기를 바랐다. 전쟁을 대하는 두 민족의 감정은 달랐다.
체코 군단과 청산리 대첩
1920년의 청산리 대첩을 돕게 될 체코 군단은 이런 구도에서 탄생했다. 당시 러시아 땅인 우크라이나(폴란드와 러시아 중간)에서 결성된 이 독립군 부대는 10만 이상의 병력을 앞세워 러시아를 도와 동맹국 진영에 맞섰다. 한국 독립군이 가져보지 못한 대규모 병력을 이들은 갖고 있었다.
만약 대전 중에 판세가 바뀌지 않았다면, 체코 군단과 한국 독립운동의 만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의 전쟁 이탈을 초래했고, 이는 러시아와 독일의 강화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조성된 상황이 체코 군단과 한국 독립운동을 이어주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 혁명으로 체코 군단은 미묘한 처지에 놓였다. 러시아가 더 이상 동맹국과 싸우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체코 군단은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2019년에 <동국사학> 제67집에 실린 황정식 동국대 연구교수의 논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 군단'은 러시아 혁명 뒤 프랑스의 지휘를 받게 된 체코 군단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1918년 이후 프랑스 체코 군단에 편입된 러시아 체코 군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소련과 동맹국 진영의 강화조약) 이후 연합군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서부전선으로의 이동 배치가 결정되었으나, 동부전선 혹은 북해나 흑해 등을 통한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유럽으로 귀환하는 경로를 택하였다.
동맹국 진영 때문에 서쪽으로 직행할 수 없기 때문에 체코 군단은 우랄산맥을 넘고 시베리아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유럽으로 돌아가는 노선을 택했다. 일본군의 영향이 미치는 시베리아를 지날 수 있었던 것은 체코 군단이 일본군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 지붕 위에서 열차를 호위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인 체코 군단 ⓒ 위키피디아
그들은 실제로도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다. "일본군은 그들을 보호하여 블라디보스토크항까지 안내하였다"라고 1996년 <군사논단> 제7호에 실린 허만위 북한학회 이사의 논문 '항일독립군, 체코 군단 무기 비밀 운반 사례 연구'는 말한다.
이처럼 일본군의 지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온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군의 조력자가 된 것은 그들이 식민지 한국의 처지에 주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허만위 논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때 연합군은 해상 수송 능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체코 군단의 체중을 감량시켜 그들을 빠르게 수송하려 하였다. 연합군 계획은 체코 군단이 서구에 도착하면 최신 장비로 그들을 무장시켜 서부전선에 투입시키는 것이었다.
체코 군단이 보유한 무기가 더는 필요 없게 된 사정이 그들과 한국 독립군을 연결하는 계기가 됐다는 분석이다. 한국 독립군 진영인 북로군정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체코 군단의 사정을 파악한 뒤 비밀 접촉에 나섰다. 그 결과 소총 1200정, 기관총 6정, 박격포 2문, 탄약 80만 발, 수류탄, 권총 등을 대량으로 확보하게 됐다.
북로군정서가 요구한 양은 그보다 많았지만, 체코 군단은 상당한 성의를 보였다고 한다. 허만위 논문은 "후에 알려진 바로는 보병 소총 1정당 가격은 7원이었다고 한다"라며 "이는 독립군이 무장을 넘겨받을 때 중간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노동자의 품삯에 지나지 않는 헐값이었다"라고 말한다.
체코 군단은 1920년 7월 북로군정서에 무기를 넘기겠다고 통지했고, 현지 한국인들과 독립군은 500리 숲길을 통해 은밀히 무기를 운반했다. 이것이 그해 10월 청산리 대첩에 투입됐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인들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체코인들이 일본의 눈을 피해 한국 독립군의 전력 강화를 이뤄냈던 것이다.
체코 군단 자신의 필요나 금전적 이해관계도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그들의 지원은 한국이 식민지 시기 최대의 항일 전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이것이 곧바로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체코인들의 지원은 미국·소련·중국의 지원보다 값진 측면이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군사적 지원은 훗날 한국의 주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기분 좋은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