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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그녀가 술에 취한 척 연기했던 이유

[리뷰]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카산드라 콤플렉스의 현대적 재해석

등록|2021.03.03 17:06 수정|2021.03.03 17:06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포스터 ⓒ imdb


7년 전 전도유망했던 의대생 캐시(캐리 멀리건)는 친한 친구 니나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커피숍에서 서빙 중이다. 낮에는 평범한 알바생이지만 밤이면 어둑한 술집과 클럽을 다니며 술을 마신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캐시의 부모는 밤새 딸이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걱정이다. 7년 전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딸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기학대까지 서슴지 않는 것 같다. 이제 과거로부터 벗어나도 될 것 같은데 마음의 정리가 쉽지 않아 보인다.

캐시는 밤이면 짙은 화장을 하고 술집을 전전한다. 혀가 꼬이고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만취 상태인 척을 해 꼬여드는 남성과 단둘이 만남을 갖는다. 남성들이 하나같이 인사불성이 된 여성에게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를 시도하려는 순간 멀쩡한 모습으로 돌변해 응징한다.

이는 친구 니나에게 바치는 지적인 복수로 피 한 방울 없이 상대방을 죄의식으로 몰아가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복수에 쏟아붓던 어느 날, 같은 대학에 다니던 라이언(보 번햄)을 만나게 되고 캐시의 이상한 행동의 이유가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 오른다.

라이언은 오랜만에 만난 캐시에게 잘 살고 있는 동기들의 소식을 전한다. 특히 니나를 성폭행한 알(크리스 로웰)이 의사로서 성공했고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접한다. 캐시는 순간 분노를 참지 못한다. 인사불성인 니나를 성폭행한 가해자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떵떵거리며 살아가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친구를 잃은 슬픔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 남성 혐오를 떠안고 죄인처럼 사는 현실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느끼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피해자는 사망했고, 가해자는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 ⓒ imdb


이에 분노한 캐시는 본격적으로 사건 연루자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먼저 함께 어울려 다니던 매디슨(알리슨 브리)을 찾아가 복수의 서막을 끊는다. 오랜만의 식사 자리에서 과하게 술을 권하고 고용한 남성에게 그녀를 부탁한다. 필름이 끊긴 매디슨은 지난 일을 기억하지 못해 불안하고 캐시를 붙잡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만 캐시는 쉽게 대답하지 않는다. 7년 전 캐시는 니나가 당한 일을 매디슨에게 털어놓았지만 오히려 니나의 잘못이라 말했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해 준 것이다.

다음은 이 문제를 덮었던 당시 학과장의 딸을 납치해 남자 기숙사에 데려다 두는 발칙한 계획을 벌인다. 당시 학과장은 만취한 채 남자 기숙사에 있었던 게 오히려 잘못이라며 니나를 몰아세웠고,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니나는 극단적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학과장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규탄하는 퍼포먼스. 캐시는 입장 바꿔 생각해 보길 바랐다.

마지막 복수를 위해 찾은 가해 측 변호사는 이미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저지른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자 마음이 약해진 캐시는 복수를 중단키로 결심한다.

드디어 7년 만에 자신을 가둔 벽장에서 나올 수 있었던 캐시. 자상한 소아과 의사 라이언의 연이은 구애에 마음이 움직이고 새출발을 꿈꾼다. 하지만 이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캐시는 매디슨에게 과거 어떤 영상을 넘겨받고 충격에 휩싸이게 되는데.

영화는 연일 학교 폭력의 진실공방이 대두되고 있는 가운데 낯설지 않는 소재로 흥미를 유발한다. 복수자 캐시와 마주한 가해자들은 '그때는 어렸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한다. 피해자를 향한 진심 어린 참회와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과거를 정당화하고 사소한 실수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캐시의 풀네임이 카산드라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공주였던 카산드라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능력으로 트로이의 멸망을 예언하지만 설득력을 빼앗긴 저주를 받은 비운의 인물이다. 카산드라는 서양 문화권에서 힘없는 예언자나 개혁자로 통한다. 이에 유래된 카산드라 콤플렉스는 예언이 사실일지라도 믿지 않거나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을 가리킨다.

마치 21세기의 카산드라의 부활처럼 느껴진다. 캐시는 자기 말을 믿지 않는 사회를 향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 스틸 ⓒ imdb


특히 드라마 <킬링 이브>의 시청자라면 낯설지 않은 연출이 반가울 것이다. <킬링 이브> 시즌2의 시나리오와 제작을 맡았으며 드라마 <더 크라운> 시즌 3,4, 영화 <대니쉬 걸> 등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에머랄드 펜넬의 장편 데뷔작이다. 연기, 각본, 제작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주목할 만한 차세대 감독 반열에 올랐다.

감각적인 음악, 한 시즌 드라마의 각각의 에피소드처럼 꾸려진 구성, 화려한 패션 감각과 외모를 가진 여성의 폭주하는 질주가 닮았다. 초반에는 캐시의 의뭉스러운 행동에 궁금증이 증폭되며 미스터리로 가는 듯 보이지만, 중반부에서는 뜬금없는 로맨스물이 된다. 이후 캐시가 다시 복수의 칼을 갈며 스릴러의 성격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서사가 산만하거나 늘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캐리 멀리건의 팔색조 매력이 지루함을 경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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