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다 싫어"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욕망한다
[인터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로 돌아온 배우 전성민
▲ '아픈 손가락'이 된 넷째딸“(정)영주 언니가 그 말을 되게 많이 했어요. ‘아픈 손가락’이라고. 그래서 제가 뻬뻬 사진을 훔쳤을 때 알바들의 표정은, 정말 저를 나무라기 위한 표정은 아니에요. 그런데 제가 너무 뻔뻔하게 ‘네’라고 이야기하니까 ‘이것 봐라’하고 때린 거죠. 정말 마음 아파하고, 계속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공연 전에 분장실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대표께서 오더니 ‘어 아픈 손가락 왔다!’ 그러는 거예요. 호세파 하시는 강애심 선배께 ‘제일 눈이 가는, 애정하는 역할이 뭐냐’ 했더니, 마르띠리오가 ‘아픈 손가락’이라고 하셨대요. 호세파와 알바가 생각하는 마르띠리오는 그런 인물인 것 같아요.” ⓒ 곽우신
두 번째 남편인 안토니오의 죽음 이후,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은 가부장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억압적 통치가 지배하는 공간이 됐다. 지배자가 베르나르다 알바로 바뀌었을 뿐이다.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출입마저 제한된 딸들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자신을 옥죄는 모든 걸 떨쳐내는 종마들처럼 이 통제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다만 그것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일어나느냐의 차이일 뿐.
"내 발 너무 크다고 놀려들 대. 매부리코에다 등이 굽었다고. 토 나온다고 저주를 퍼붓지. 내게는 참 익숙한 일, 익숙한 일." -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No.10 마르띠리오(Martirio) 중에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넷째 딸 마르띠리오는 콤플렉스와 열등감으로 뭉친 인물이다. "남자들이 다 싫어"한다는 그는 "그래도 사랑 받을 자격 없는 건 아니다"라고 외친다. 그는 억압과 해방 사이의 균열, 그 위에 발 딛고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탈출을 꿈꾸면서도 이를 내색하지 않는다. 그 역시 욕망하는 인간이지만, 엔리케와의 혼인이 무산된 이후 자신에게 그 욕망의 자격이 있는지 되묻기도 한다.
그래서 마르띠리오는 해방을 동경하면서도, 엄격한 규율을 중시한다. 자신이 깰 수 없는 규율을 누군가 깨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남을 질투한다. 특히 그 질투는 어리고 예쁜 막냇동생 아델라에게 집중된다. 모두가 사랑하는 뻬뻬를 독차지한 아델라, 맏이인 앙구스티아스와 결혼이 예정된 뻬뻬를 가로챈 아델라. 마르띠리오의 이중적 욕망과 모순적 언행은 결국 정해진 비극을 가속하는 동력으로 작동한다.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돌아왔다. 2018년 초연(관련 기사: 대한민국 뮤지컬의 역사, 이 작품 이후로 바뀔 것이다) 이후 3년 만의 귀환이다. 배우 전성민도 함께였다. 초연 때 마르띠리오로 분해 소화했던 그는, 이번에도 다시 한번 이 '아픈 손가락' 같은 캐릭터를 만나 그를 대변한다.
장애를 걷어내고, 내면에 집중하다
▲ 과감한 쇼트커트“잘생겼는데 커트도 하니까 더 잘생겼죠? (웃음) 그래도 이전과 좀 차별화가 있어야 할 텐데, ‘뭐가 있을까’라고 고민했어요. ‘머리를 과감하게 한 번 커트 해보자!’라는 제안을 했고, 다행히 받아들여져서 지금 머리가 됐죠. 장애라는 설정을 걷어내는 대신에, 조금더 민감하고 예민한 마르띠리오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잘 어울리지 않나요?” ⓒ 곽우신
초연과 재연의 큰 변화 중 하나는 마르띠리오의 설정이다. 초연의 마르띠리오는 넘버 가사 그대로 신체적 장애를 지닌 이였다.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 사랑받지 못하는 데 대한 분노 등이 '장애'라는 설정 덕분에 보다 즉각적으로 관객에게 닿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장애를 무대 위에 표현한다는 것은 언제나 민감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장애는 결핍이 아니다. 모든 장애인이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이번 재연에서는 캐릭터에 대한 접근 자체를 다르게 가져갔다.
"초연 때는 신체적인 장애를 직접적으로 표현을 했지만, 이번에는 신체적인 장애를 좀 빼 보자는 제안이 왔죠. 대신 정신적인 예민함, 그런 쪽으로 가보자는 제안이었죠. 처음에는 고민했어요. 제 솔로곡 가사에도 직접적으로 외모를 놀려대는 부분들이 있었으니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마르띠리오의 콤플렉스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일단 믿었어요. 프로덕션의 결정과 연출의 생각을 믿고 일단은 가보자고. 초연 당시에는 보이는 캐릭터 자체가 남들과 달리 장애를 가진 인물이다 보니까, 신체적 장애를 표현하면 그것만으로 설명이 되는 게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지금보다 접근하는 방법이 쉬웠던 거죠. 내가 내뱉는 이야기나 노래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게 분명했죠. 재연에서 이거를 버림으로써 내면의 마르띠리오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가지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되었어요, 캐릭터가 좀 더 풍성해진 것 같다고 할까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초연에서 '몸을 쓰는' 연기가 힘들어 그 부분에 집중했다면, 재연 때는 '몸을 쓰지 않고도' 마르띠리오의 감정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대사와 노래 등 정해진 분량은 그대로인데,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물을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이었던 덕분에, 오히려 더 깊이 있고 풍부한 표현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발이 크고, 매부리코에 못생기고, 등이 굽고' 같은 말들이 진짜로 외모가 그랬던 거라면, 지금은 마르띠리오 안에 있는 콤플렉스 때문에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마치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 상태인 거죠.
처음에는 조금 헤맸어요. 아무래도 초연 때의 '나'에 좀 갇혀 있던 게 있다 보니까 이거를 벗어나기가, 깨고 나오기가 되게 힘들었죠. 약간은 애매한 지점이 생겼다는 지적에 대해 동감해요. 하지만 연기를 함에서는, 마르띠리오를 표현하는 데는 오히려 초연 때보다 조금 더 분명해졌어요.
다른 인물들과 별 차이가 없는 외양을 하고 있지만, 대신 제스처들을 더 연구했죠. 중간중간에 혼잣말을 한다든지, 손가락을 까딱까딱한다든지, 예민함에서 나오는 지점들을 연기적인 디테일로 살렸죠. 왜 마르띠리오가 아델라를 못살게 굴고, 왜 콤플렉스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초연 때보다 훨씬 더 많이 하게 됐어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르띠리오가 가지고 있는 욕망에 대해서, 내면에 있는 욕망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화할 수 있었어요."
마르띠리오의 사랑 그리고 욕망
▲ 아델라를 향한 마르띠리오의 마음“강애심 선배가 예전에 연극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하셨어요. 연습하는데 ‘내가 진짜 아쉬운 장면이 있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델라가 ‘산책 좀 하러 갈게’ 할 때 마르띠리오도 간다고 하잖아요? 연극에서는 아델라가 정말 밖으로 나가서 혼자 춤을 춘대요. 미친 사람처럼 자유롭게요. 마르띠리오는 그걸 보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아델라에 대한 어떤 부러움이,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엄청 구체화되더라고요. 그 장면은 우리 작품에 없지만, 무대 위에서 그 장면을 떠올린 다음에 나가거든요. 왜 마르띠리오가 아델라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됐는지….” ⓒ 곽우신
"마르띠리오도 아델라 못지않게, 어떻게 보면 아델라보다 훨씬 더 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죠. 마르띠리오는 똑똑하거든요.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웃음)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폭력이라든지 집안의 억압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결핍이 자라났고, 그 결핍 때문에 자신은 이 집을 탈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아델라를 보면서, 본인도 사실은 아델라처럼 되고 싶은 꿈은 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계속 콤플렉스가 쌓였을 걸로 생각해요. 예쁘고 아름답기까지 한 동생을 보며 더…."
"어리고 제일 예쁜" 아델라는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인물이다. 그는 집안의 부당한 규율에 저항하고, 남들이 상상만 하는 일탈을 직접 실행에 옮기는 이다. 마르띠리오는 그런 아델라를 계속 관찰한다. 그리고 질투한다. 마르띠리오의 콤플렉스는 자신을 아델라와 비교해가며 더욱더 깊어져 간다. 그리고 마르띠리오는 고백한다. 자신도 뻬뻬를 사랑했노라고.
"뻬뻬는 동네의 모든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예요. 마르띠리오는 진심으로 뻬뻬를 사랑했다기보다, 왜 우리 어릴 때 보면, 막 친언니가 연예인 누구 좋아하면 그냥 나도 따라 좋아하고, 동네의 누가 좋다고 하면 '그래, 나도 좋은 것 같아' 막 이러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게 진짜로 좋아하는 게 아니었던 경험들이 있잖아요. 마르띠리오도 뻬뻬와 함께 자유를 만끽하는 아델라를 보면서 자신의 콤플렉스가 드러나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나도 그걸 쟁취할 거야'라는 욕망이 생긴 거죠. 마르띠리오의 근본적인 욕망은 이 집을 탈출하는 거예요. 모든 딸이 그렇지만, 마르띠리오가 더 강하지 않을까요?"
▲ 엔리케와의 결혼이 좌절된 이유“초연 때는 알바가 폰시아한테 ‘엔리케의 집안이 우리 집안과 맞지 않아서 나를 보내지 않았다’라고 이야기한 걸 믿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어쩌면 계급의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알바는 보이는 것을 굉장히 중시하고, 남들이 자기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봐, 우리 집안이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매우 조심스러워하고 기피하는 사람이잖아요. 알바가 봤을 때 마르띠리오는 정상적이고 평범한 딸이 아니었던 거죠. 말로는 계급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만, 제가 이 집에 나가는 것 자체가 알바에게 수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집을 가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알바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겠죠. 그래서 엔리케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결혼을 시키지 않았을 것 같아요.” ⓒ 곽우신
아델라와 뻬뻬 사이의 애정행각에 감정이 폭발하는 건, 본래 뻬뻬와 결혼이 약속되어 있었던 첫째 앙구스티아스가 아니라 오히려 마르띠리오 쪽이다. 엔리케와의 결혼이 베르나르다 알바의 반대로 무산됐음에도, 여전히 그의 통제에 가장 적극적인 것 역시 마르띠리오이다. 마치 본인이 '군기반장'이 된 것처럼, 다른 누군가의 일탈을 누구보다 용납하지 못한다. 마르띠리오는 뻬뻬와 결혼해 이 집을 나가게 될 앙구스티아스보다, 뻬뻬와의 밀회를 즐기는 아델라를 더욱 견딜 수 없다.
"아델라를 향한 마르띠리오의 동기는 질투가 크죠.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해요. 앙구스티아스가 뻬뻬와 결혼해서 집을 나가는 것도 싫지만, 앙구스티아스는 주어진 상황에 수동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보니까 마르띠리오에게는 자극이 덜 되는 것 같아요. 앙구스티아스는 또 큰언니이니까, 질투는 나지만 집을 나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죠. 그게 순서이니까.
하지만 아델라는 아니죠. 뻬뻬의 사진을 훔치는 것도 장난이 아니에요. (웃음) 마르띠리오는 이미 아델라가 뻬뻬를 몰래 만나고 있을 때 지켜봤어요. 영화에서 보면 뻬뻬와 아델라가 애정행각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보면서 본인도 스스로 성적인 행위들을 하거든요. 뻬뻬 사진을 훔치는 것도 그렇고 욕구를 채우기 위한 걸로 생각해요. 그래서 속옷 이야기도 하잖아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더라도 나를 위한 속옷을 만들겠다고 하는, 혼자 즐기면서 혼자 욕구를 채우는 성향인 거죠. 굉장히 큰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유를 갈망하지만 그러면서도 규율을 굉장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저는 그래서 마르띠리오가 베르나르다 알바와 되게 닮아 있는 인물이라 생각해요. 알바의 권위적인 부분들을 마르띠리오도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살아야지만 '나'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요. 할머니가 탈출했을 때, 노래 중간에 어서 다시 들어가라고 고함을 지르잖아요? 거기에서도 '아, 마르띠리오가 알바와 비슷한 면이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죠. 내가 바라는 자유와 집안의 규율이 계속 상충하는 거죠."
여성 서사 속 남성의 존재
▲ 마르띠리오와 전성민의 닮은 점“닮은 게 있나? (웃음)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제가 표현하고 있잖아요. 배우가 한 캐릭터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부분들을 끄집어내거든요. 욕망을 막 감추고, 그거를 다르게 표현하는 건 달라요. 저는 좀 더 직설적이고 솔직한 편이죠. 대신 예민하고, 어둡고 이런 부분은 좀 닮았어요.” ⓒ 곽우신
1930년대 스페인을 무대 위로 옮긴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존재이다. 남성은 여성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지만, 여성에게는 강한 정조 관념이 강제된다. 남성이 여러 여성을 취하는 건 능력의 상징이지만, 여성이 아버지 모를 자식을 낳는 건 돌에 맞아 죽을 일이다. 안토니오와 뻬뻬 모두 가부장제의 상징이자 폭력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자 해방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 집의 문을 열고 나갈 유일한 수단은 남성과의 결혼이고, 신체의 문을 여는 방법 역시 남성과의 결합이다. 이 작품에서 남성은 끊임없이 소환되고 호명된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남성 의존적이라는 이야기는 사실 초연 때부터 나왔어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이 작품을 처음 썼을 당시에는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인물이 국가를 상징하고, 집 자체도 사회적인 분위기를 한 가정으로 표현했던 것인데, (마이클 존) 라키우사가 이걸 뮤지컬로 바꾸는 과정에서 조금 더 성적인 억압에 초점을 둔 건 맞아요. 우리는 로르카의 희곡을 연극으로 하는 게 아니라, 라키우사가 쓴 뮤지컬을 하다보니, '남자 하나 때문에 싸우는 내용이야?'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해요.
그 부분이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이 작품을 만들고 연기하는 스태프와 배우는 이게 그냥 여성과 남성의 성애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현시대에서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사회적인 억압에 대해 고발하는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이 계급사회는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는 계급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신분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남아 있잖아요. 또, 집 안에 갇힌 피 끓는 청춘들이었고, 그 당시에 여성은 결혼해야만 집을 탈출할 수 있으니 남자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니까요. "
혹자는 그래서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치를 낮게 보기도 한다. 여자 배우들의 여성 서사라고 하지만, 정작 그 중심에 남성의 존재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우리 공연계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지향점이고, '더 나은' 작품을 위한 비판은 소중하고 또 필요하다. 무대가 시대에 맞는 '젠더 감수성'을 갖추는 것은 이제 권장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
▲ 닫힌 문은 다시 열릴 것인가“어쨌든 아델라는, 그 방법이 죽음이긴 했지만 탈출한 거잖아요. 이 작품이 스페인에서 로르카 3대 비극 중 하나라고 알고 있는데 ‘이게 정말 비극일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희비극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문은 닫혔지만, 아델라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 이후의 상황은 분위기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을 거예요. 마르띠리오가 될 수도 있고, 아멜리아나 폰시아가 될 수도 있고,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이 닫혀 있게끔 놔두지 않을 것 같아요.” ⓒ 곽우신
하지만 그렇다고 개별 작품에 어디까지 그 기준을 적용할지는 조금 다른 문제이다. 지난 몇 년간 여성 중심의 서사가 주목 받으며 여러 작품이 무대 위에 올라섰지만, 반대로 여성 서사라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게 엄정한 잣대로 비난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한국 공연계의 젠더 이슈 최전선에서 모든 부조리를 분쇄하는 작품이어야 할까? 어떤 관점에서는 다소 부족하고 아쉬운 작품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충분히 훌륭하고 멋진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슈가 굉장히 중요한 사회죠. 그 이슈를 무대 위로 가지고 온 공연들도 많이 있고요. 지금까지 우리나라 공연계에는 전원 남배우만 출연하는 공연이 많았는데, 여성들만 나오는 공연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작품도 페미니즘과 연관이 있잖아요. 사회적으로도 여성주의와 관련된 이슈로 계속 논쟁도 하고 있고요.
이 작품은 마력이 있어요. 사실 너무너무 힘들어요. 지금도 정말 공연이 끝나고 나면 몸이 굳어 있거든요. 여기저기 뭉쳐서 목도 너무 아프고 막, 온몸이 다 아파요. 너무 힘들어서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나 즐거워지자고 무대를 하는데 너무 많이 아픈 거 아닌가?' (웃음) 진짜 너무너무 괴로운데, 이상하게 해소되는 것도 있는 작품이죠. 여배우로서 이 작품의 캐릭터들을 구현하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에요. 행운이고요.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캐릭터가 있고, 서사가 있으니까요."
작품에 취하지 않으려는 노력
▲ 삼연에도 참여할 수 있을까?“진짜 소름 돋는 게, 얼마 전에 배우들과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할 거야?' '할 거야?' 하면서…. (웃음) 하고 싶지 않을까요? 다만 그 고민은 해 봐야죠. 내가 얼마만큼 마르띠리오를 더 잘할 수 있을까? 같은 공연의 같은 캐릭터를 거듭해서 하다 보면 매번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잖아요. 다음에는 내가 지금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마르띠리오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 보긴 해야겠죠.” ⓒ 곽우신
"이 작품이 나에게 엄청난 의미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지금도 가끔 '위험하다'라고 생각이 드는 게, 그 분위기에 계속 취하게 돼요. 어쩔 수 없이 저도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인지라, 이 작품으로 많은 분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게 좋아요. 하지만 이 작품에 지나치게 특별함을 부여하는 순간, 나 스스로는 되게 만족할 수 있겠지만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요. 그래서 좋은 이야기들이 들리면, 좋으면서도 스스로 차단해버려요.
연기하는 배우들은 기질 자체가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요. 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직업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어떤 한 인물에 들어가는 데에는 굉장히 방해될 수도 있거든요. 내가 내 역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면, 제대로 그 인물을 표현할 수 없어요. 자기객관화가 굉장히 중요하죠. '나는 그냥 이 작품의 한 인물일 뿐이다' '이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일 뿐이다' 이런 것만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인기를 얻고 있는 작품에서, 어떤 역할의, 어떤 의미의, 뭐 뭐 뭐…. 뭔가를 덧붙일수록, 인물이 표현되기보다는 전성민이라는 사람이 더 표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경계를 많이 해요."
<베르나르다 알바>가 배우 전성민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게 될지 묻자,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이 작품에 쏟아지는 찬사에 도취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었다. 극장이 바뀌고, 연출이 바뀌면서 극의 분위기도 다소 바뀌었지만, 그 외피의 변화와 관계없이 그 안에는 여전히 관객들이 사랑한 <베르나르다 알바> 그리고 이 작품을 사랑하는 배우들이 있었다. 전성민의 거리 두기는 이 작품을 사랑해준 이들에 대한 예의이자 보답이었다.
"우리 작품이 사실 취하려면 엄청나게 취할 수 있어요. 여배우들만 출연해서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는 공연이 없었고, 지금 이 작품에 참여하지 않은 배우들 중에서도 출연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매우 많다고 들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나조차도 생각이 기울 수 있죠.
공연이 끝날 때까지 그냥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라는 작품의 마르띠리오로 남고 싶은데, 인기에 제가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여지가 큰 사람인 걸 스스로 잘 알아서 그런 것 같아요. 자칫하면 '좀 덜 열심히 해도 좋아해 주니까' 같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요. 그건 저한테 독이잖아요. 관객 분들께도 그렇고요. 캐릭터 마르띠리오로 더 돋보이고 싶지, 배우 전성민으로써 '나는 이만큼 이런 걸 이루었다'라고 자랑하는 건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러려고 할 것이고요. (웃음)"
배우 전성민은 "바꿔 말하면, 그만큼 이 작품이 정말 소중하고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에도 불구하고 전회차 전석 매진에 가까운 호응을 보여주는 관객들에게도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리고 이 작품에 이런 마인드로 임하고 있는 배우는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오는 14일까지 서울 정동극장에서 상연된다. 17일에는 네이버 후원 라이브를 통한 녹화 중계가 예정되어 있고, 19일부터 28일까지는 부산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코로나19 탓에 자유로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지금 너무 힘들게 살잖아요. ‘마스크 쓰고 얼마나 답답하실까?’ 싶은데도 이렇게 보러 와주시고…. 관객분들은 이 억압된, 제한된 상황에서도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문화생활을 하시는 거잖아요. 그대로 계속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조금 더 자유롭게, 흘러가면 흘러가는 대로 좀 내버려 두고 살았으면 좋겠고요. 더 다양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더 자유로운 세상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은 팍팍하고 힘들잖아요. 누구나 억압을 받는 게 다 있고요. <베르나르다 알바>는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해소해주는 작품이 아닌가 해요. 억압으로 인한 부작용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공감도 해주시고 봐주시는 것 같아요. 이 작품을 통해서 자유를 더 즐기고, 많이 느끼고 가셨으면 좋겠어요. (웃음)”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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